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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1] – SF호러영화의 괴물은 우리 자신이다

2004.02.05 20:00

“사드와 함께 칸트를!” 이 라캉의 공식을 능수능란하게 유용하는 스타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 그가난해하지만 귀한 글 한편을 <씨네21>로 보내왔다. 그는 이 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영화 <딥임팩트>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영화 <솔라리스>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텍스트들을 ‘실제적사물’의 출현 방식을 따라 관통해 나아가면서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라캉을!’이라고 외친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입문해보자.자, 흥미진진한 기대로 지젝과 함께 영화를!
(이 글은 영어로 쓰여졌으며, 저자 자신이 붙인 The Thing from the Inner Space라는 제목 이외의 부제와 중제는 <씨네21> 편집부에서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

 

슬라보예 지젝 I 문화이론가

우리 자신의 일부로서의 사물 –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가?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세미나(1959∼60)를 진행하며 예술이란 언제나 불가능한, 즉실제의 사물이 만들어내는 중심적 공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진술은 아마도 릴케의 ‘미(美)란 두려운 것을 가리는최후의 베일이다’라는 오랜 명제에 대한 변주로 읽혀야 할 것이다. 라캉은 이 공백의 주변이 시각예술과 건축에 있어 어떠한 기능을하는지 암시한다. 여기서 (영화적 예술 역시 포함하는) 시각장(場), 재현의 장이 중심적이면서도 구조적인 공백과 그 공백에고착되어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결국 영화이론에서 봉합이라는 개념으로 부를만한 부분을 설명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좀더 나이브하면서 비약적인 무언가를 하려 한다. 즉 실제적 사물이 영화내러티브의 디제시스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을, 좀더 짧게 말하자면 그 내러티브가 SF호러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외계의 사물들과같이 불가능한/외상적 사물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이다.

<스타워즈>의 첫 번째 신이 이러한 사물이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에 보이는 것은 한없이 어두운 하늘, 불길할 정도로 고요한 우주의 심연이다. 그 우주에 흩뜨러져빛나는 별들은 물질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점들이고, 조화로운 우주를 보여주는 표식이며, 가상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던중, 돌연 돌비 서라운드 음향에 따라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부터 진동이 들려오고, 잠시 뒤 타이태닉호의우주 버전이라고 할 만한 거대한 우주선이 의기양양하게 스크린 안으로 등장하여 그 진동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다. 이렇게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우리가 리얼리티로 쫓아내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대한 대상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우주의 한없는 공백을 바라보는 두려운 공허를 피해 어떤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침입이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가있다면 어떻겠는가? 진정한 공포란 우리가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어떤 과잉되고, 거대한 실제의 침입과도 같은 것에 대한공포라면 어떻겠는가? ‘무(無) 대신 (실제의 얼룩과도 같은)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무언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의 근원에 위치한 경험일 것이다.

‘외계의 물체’, 또는 ‘괴물’로 찾아오다

실제적 사물을 설명하는 예를 보자면 (존 카펜터의) <괴물>로부터 좀더 최근의 영화인 (빌어거스트의) <센스 오브 스노우>에서와 같이, 우주로부터 떨어져 내려온 비밀스럽고 유령 같은 외계의 물체, 즉인간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고, 간혹 그 스스로의 악의를 품기도 하는 외계의 물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정신분석의 윤리학>에서 라캉이 실제적 사물의 예로 마르크스 형제 중 과묵한 하포 마르크스를 들고 있다는 것을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치있는 천재인지, 완전한 바보인지 확신할 수 없는 괴물과도 같은 그는 어린애같이 순수하고, 친절한면과 극단적인 타락, 성적 붕괴가 한데 겹쳐져 어느 쪽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 이전의 순결함을상징하는가,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완전한 자기중심주의를 상징하는가? 그는 이러한 절대적인 비결정성, 혹은 그보다 통약불가능성이라 해도 좋을 특성 때문에 괴물스러운 사물, 실제적 사물로서의 타자가 된다. 즉, 상호주체적인 파트너가 아니라 철저히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이미 밝혀진 것처럼, 이 세명의 마르크스 형제는 프로이트가 자아(치코), 초자아(구루초),이드(하포)로 나눈 삼각형과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실제적 사물은 <킹콩>으로부터 <모비딕>을 거쳐, <모비딕>의 새로운버전임에 분명한 J. 리 톰슨의 <하얀 물소>(The White Buffalo)에 이르는 과정에서처럼 괴물스러운동물이 될 수도 있다. <하얀 물소>에서 주인공 빌 히콕은 그가 꿈에 보았던 (성스러운, 미국의 토착 동물이기도 한)하얀 물소에 이끌려 서부로 돌아온다. 영화의 전체는 좁은 산길에서 하얀 물소가 주인공을 공격하고, 주인공이 결국 그 물소를죽이는 마지막 대결신을 준비하고 상연하는 데 집중한다. 중요한 점은 찰스 브론슨이 자신의 눈먼 응시와 성적 무능함, 다시 말해거세를 나타내는 기호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찰스 브론슨은 그의 옛 애인인 포커 제니를 만나지만 그녀의 기대를충족시켜줄 수 없으며, 그녀와 섹스를 하지 못한다. 영화의 이러한 부분에서 찰스 브론슨의 성적 무능을 확인할 수 있다).(여기서 기초적인 단계에서의 프로이트식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즉 하얀 물소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주인공의 성적 능력을 가로막고 있는 원시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 그 물소가 내는 절망적인 소리는 유대교에서 양각호(羊角號)가내는 소리와 동질적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장면은 부친살해의 장면이다.)

그러나 더욱 중대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실제적 사물(하얀 물소)은 성적 무능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미국자본주의의 파괴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히콕이 마지막으로 기차역에 도착할 때, 그는 수천 마리 물소들이 도살되어 산과 같이 쌓인하얀 뼈들을 보게 된다(또한 역사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는 그러한 대량살상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하얀 물소는모든 죽은 물소들의 원혼을 싣고 있는 유령이기도 한 것이다(히콕은 인디언 살인자로도 제시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처럼 물소를 쫓고있는 인디언 전사와 친구가 되는 것은 서부지역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봉사했던 그의 잔악한 과거와 타협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2] – 내부로부터 온 괴물

2004.02.05 20:00

‘바위산’, 실종이 아니라 해방의 영역

물론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무성적인) 이 실제적 사물은본질적으로 성적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터 위어의 <행잉록에서의 소풍>(사진)에서 나오는 북부 멜버른의거대한 화산암은 그러한 실제적 사물의 또 다른 버전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상의 사회 규약들이 다소 유예되는 금지된 영역인이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성적 향유의 외설적 비밀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1900년 2월14일 밸런타인데이에 멜버른 북부의 상류층 학교인애플야드의 여학생들이 고대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경관인 행잉록으로 소풍을 떠나며 벌어진 기이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이러한사실 자체가 미스터리의 첫째 요소가 된다. 비록 이 영화가 실제로 일어났던 신비한 실종사건에 기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는주장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실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떻게 수십년 동안 그러한 일이 실제 일어났었다고 믿을 수있겠는가?). 그들이 떠나기 전에 금발의 미란다는 고아 친구인 사라에게 더이상 학교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풍도중에 네명의 소녀들(미란다, 부유한 상속녀 이르마, 이성적인 매리언, 못생긴 이디스)은 바위산을 탐사하기로 마음먹는다.지치고, 변덕스러운 이디스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가기 싫어 남지만, 무엇엔가 겁을 먹고서는 비명을 지르며 나머지 친구들에게로뛰어오고, 나머지 세명의 소녀들과 맥크로 선생은 바위산에서 실종된다. 소녀들이 바위산으로 다가서는 것을 보았던 두명의 청년들이그들을 찾으러 가고, 그 도중 부유한 마이클이라는 청년이 환각에 빠져서는 바위에 자해를 한다. 그는 이르마를 찾아내긴 하지만,이르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알코올 중독인 교장 애플야드는 사라의 후견인으로부터 후원금이오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사라에게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그녀를 학교지붕에서 밀어 떨어뜨린다(혹은 사라 스스로 자살을 했을까?). 며칠 뒤, 애플야드 교장 스스로도 행잉록을 오르려다 죽는다.

행잉록의 수수께끼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이야기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들 때문이다. 우선 그 미스터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다섯 가지 가능성이 있다.

-간단하면서도 지당한 설명: 세명의 여학생과 선생은 복잡한 바위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 속에 빠졌거나, 거기에 널려 있는 거미나 뱀에 물려 죽었을 것이다.

-성범죄와 관련되어 있는 설명: 바위 근처에 숨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방문객들을 기다리는 사악한 원주민들이그들을 유괴, 강간하고서는, 바위 근처에서 살해했을 것이다. 혹은 여학생들에게 매력을 느꼈을 젊은 남성 캐릭터들인 마이클과앨버트가 그들을 유괴, 강간하고서는 그들 중 한명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성적·병리학적 설명: 성애를 억압당했던 여학생들이 폭력적이며 자기파괴적인 히스테리 폭발로 이끌린 것이다.

-원시종교적이며 초자연적인 설명: 바위산의 정령이 자신의 부름을 알아듣는 여학생들만을 선택하여 데려간 것이다(또 그러한 관능적인 불가사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네 번째 여학생 이디스는 돌려보낸 것이다).

-외계인 유괴설: 여학생들은 다른 시공간대로 들어섰던 것이다(첨언하자면, 원작소설의 작가인 조앤 린제이는사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판본에서 18번째 챕터를 ‘행잉록의 비밀’이라 이름 붙였는데, 여기서 그녀는 이 마지막 두 가지설명을 조합한다).

이와 별도로 적어도 두 가지의 은유적 설명이 존재한다. 즉 이 이야기는 (낡고 잘 정리된 기숙사에 스며있는) 경직된 규율의 빅토리아 시대 기숙학교의 분위기와 (거친 바윗덩이들에 스며 있는) 구속받지 않고 왕성히 뻗어가는 삶 사이의대립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직된 학교의 분위기는 단지 표면 밑에 숨어 있을 뿐인, 반쯤은 억압되어 있는여학생들 사이의, 선생에 대한 학생의, 또 학생에 대한 선생의 레즈비언적 갈망 등과 같은 에로티시즘과 공명한다. 이런 식으로자신의 억압된 갈망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함으로 눌러놓은 것과 달리 바위는 종종 역겹기까지 한 그 세부 형상들에서 해방된 삶의힘을 상징한다(야생의 무성한 식물, 새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죄와 관련되어 있는 파충류, 뱀들이 잠든 여학생들 주위를기어다니는 것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컷 등을 통해).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의 실종은 폭발에 이르는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라는 오랜 주제를 변주하는 것으로읽어낼 수 있다. 쌀쌀맞은 수학 선생 맥크로는 바위를 두고 용해된 용암이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아… 매우 점성있는 상태로분출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묘사는 지구의 저 밑으로부터 솟아나오는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억압된 사춘기 소녀들이 서서히 깨우쳐가는 호르몬에 대한 묘사와도 같은 설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위는 오랫동안 사회관습으로통제되어오다 결국은 폭발하는, 해방된 삶의 열정을 나타낸다.

이 실종을 반식민주의적으로 비틀어 읽을 수도 있다. 물론 바위산의 복수라는 식의 성(性)화된 개념은 타자자체에 대해 말해주기보다는 식민주의자들이 피식민 타자에게 투사했던 환상적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바위산의 사악한유괴 행위는 영국의 식민화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이렇게 읽을 때, 바위산은 복수를 펼치며, 학교라는 제도화된 일상을손상시키는 기본적이며 ‘열정적인 연계’(attachment)의 신호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권위적인 교장애플야드는 자제력을 잃고서, 산에 가서는 높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비남근적, 비이성애적 에로티시즘으로

이 영화는 수수께끼를 직접 풀어주지는 않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가리키는 많은 힌트들을제시한다(여학생들이 사라졌을 때 보이는 이상한 붉은 구름은 산의 정령이 그녀들을 유괴해갔을 것이라고 가리킨다. 또한 시계는소풍날 정오에 멈춰서며, 생존자들은 완전히 기억을 잃고, 그들 이마에 똑같은 모양의 상처들은 외계인 유괴와 다른 시간대로옮겨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기호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퍼져 있는 분위기는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즉일어났던 일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던 것이며, 그것은 마치 산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천사와도 같은소녀 미란다가 이 운명에 대해 예감이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묘사된다. 그 운명은 비남근적이며, 비이성애적인 에로티시즘과동일시된다.

바위산과 그 바위산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소녀들을 성애에 이끌린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뒤에반쯤 죽은 채 발견되는 유일한 생존자인 이르마는 발견되었을 때 옷을 모두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옷을 벗길 때 빅토리아 시대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쌀쌀맞은 수학 선생 맥크로 역시 바위산에서사라지는데, 사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마치 홀린 듯이 바위산을 향해 스커트도 입지 않은 채 속옷만을 걸치고 걸어가고 있었다),이 이야기는 그녀들이 강간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살아남은 이르마를 진찰하던 의사는 그녀의 처녀막이 ‘손상되지 않았다’라고재확인한다).

바위산이 상징하는 것은 남근과 관계하는 일반적인 성적 경험보다는 리비도적이며, 해방된 삶의 경험이며,어쩌면 라캉이 여성적 희열(jouissance feminine)이라고 불렀던 것까지를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 점에서 이영화와 역시 거대한 바위 동굴에서 분석 불가능한 성적 수수께끼가 일어나는 <인도로 가는 길>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인도로 가는 길>이 식민주의자가 맞이하는 교착상태를 훨씬 복잡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욕구불만인 여주인공이 일반적인 이성애적 경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섹스신이 학교에서 가장 덜 세련되었고, 따라서 가장 덜 억압된 하인인 톰과 미니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표준적인 설명을 해보자면, 바위가 내뿜는 과잉되고, 숨막힐 듯하며 운명적인관능성은 오직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라는 마법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억압으로 인해 건강한 성적 만족이 가로막히고, 그렇기 때문에 퇴폐적으로 영적이며, 도착적인 방식으로 성화(性化)되었다는)이러한 설명을 돌려 생각하여, 이성애 자체가 좀더 근본적인 동성간의 ‘정열적인 연계’에 기반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래서빅토리아 시대가 억압하고 있는 이성애라는 것이 훨씬 더 억압된 것의 귀환에 의해 지탱되는 동시에 그 귀환을 가능하게 한다면어떻겠는가.

프로이트는 이성애적 충동은 그 충동의 에너지가 훨씬 더 근본적인 남근기 이전의 충동을 재가동시키지않아야만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즉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억압은 역설적으로 리비도적 역행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리비도적 역행성을 얻게 된다. (남근적) 성욕을 억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애화되어 있는것이며, 그러한 억압은 남근기 이전에 대한 고착(pre-phallic perversity)의 형태를 동원한다. 여기서 엘리자베스코위가 <가라, 항해자여>(Now, Voyager)에서 베티 데이비스가 그녀의 연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를 분석한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베티 데이비스는 어째서 그 이상의 성적 접촉을 포기해야만 하는지 설명한다(‘별들을 가질 수 있는데,왜 달에 닿으려 하지요?’). 즉 우리가 이성애적 섹스를 거부한다면, 난 레즈비언적 ‘원시적 연계’라는 더욱 강도 높은 쾌락을얻을 수 있는데, 어째서 이성애적 섹스를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측면이 선생들 가운데 가장 덜 성화되었으며, 불감증의 모델과도 같은 가엾은 맥크로 선생이 세명의소녀들과 함께 사라지고, (18번째 챕터에서) 다시금 신비스러우며 외설적일 정도로 성화된 ‘클라운-우먼’으로 등장하는 유일한캐릭터가 되는 이유가 된다. 이제 이러한 추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교장 선생이라는 인물도 재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애플야드 교장이 그저 바위산의 반대편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바위산 자체라면 어떻겠는가? 그녀가 암벽의 경사면에서 자살하는 것이바위의 원시적 열정에 대한 패배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들의 궁극적인 동일성을 나타낸다면 어떻겠는가?

 

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3] – 최초에 아버지와 딸이 있었다

2004.02.05 20:00

최초에 아버지와 딸이 있었다

우주적 재난영화 시리즈 가운데 가장 최근작인 미미 레더의 <딥 임팩트>사진에서 실제적 사물은 지구와 충돌해 모든생명체를 2년 동안 절멸시켜버릴 거대한 혜성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지구는 핵무기를 싣고서 혜성으로 향한 우주비행사들의영웅적 자살 행위 덕분에 구원받고, 오직 혜성의 한 조각만이 뉴욕 동부 해안에 떨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수백 야드나 되는거대한 해일이 뉴욕, 워싱턴을 포함한 미국의 북동 해안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한다. 또한 이 혜성은 예상치 못했던 커플을만들어내기도 한다. 젊고, 명백히 신경증적이며, 성적으로 비활동적인 TV리포터와 어머니와 이혼하고, 딸과 동갑인 젊은 여자와결혼한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그 예상치 못했던 커플을 이룬다.

이 영화는 확실히 전(proto)-근친적인 부녀관계에 대한 드라마이다. 애인이 없고, 아버지에 대해외상적으로 고착되었으며 아버지의 재혼에 당황해하며, 자신의 동갑내기인 여성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여주인공의 자기파괴적인 분노가 위협적인 혜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통령은 다가오는 파국을 공표하는 기자회견에서 그녀에게 처음질문을 하도록 허락하는 특권을 주는 식으로 외설적인 실제의 아버지에 대한 이상적 대당으로, 보살펴주는 아버지상으로행동한다(게다가 대통령에게는 영부인도 없는 듯하다). 혜성과 부권적 권위의 어둡고 외설적인 이면 사이의 연결은 여주인공이대통령과 접촉하는 방식을 통해 명확해진다.

그녀는 조사를 진행하다가 ‘엘르’(elle)와 연결되어 있는 금융 스캔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주인공이처음 생각하는 것은 물론 대통령 본인이 개입되어 있는 섹스 스캔들이다. 즉 ‘그 여자’(elle)란 대통령의 정부를 가리킨다고생각한 것이다. 그뒤에 알게 된 진실은 ‘E.L.E’란 생명체의 전멸을 이끌 수도 있는 재난에 대해 취해질 비상수단에 대한암호명이었으며, 정부는 그 대재앙으로부터 100만명의 미국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거대한 지하 피난처를 건설하는 데 비밀스럽게비용을 지출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혜성은 아버지의 배신(infidelity)에 대한 은유적 대체물이 된다. 그녀의외설적 아버지가 그녀 대신 다른 젊은 여성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맞이한 딸의 리비도적 파국에 대한 대체물인 것이다. 그 때문에 전지구적 재난은 아버지의 젊은 부인이 그를 버리고, 아버지는 (본래 부인, 즉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딸에게 돌아오도록 하기위해 움직이는 기계가 된다.

영화의 절정은 해변의 호화스러운 집에서 홀로 해일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딸이 재회하는 신이다. 그녀는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화해를 청하고는 조용히 해일을 기다리며 포옹한다. 해일이 다가와, 이미 그 커다란그림자를 그들 위로 드리웠을 때, 그녀는 마치 아버지에게서 보호라도 구하려는 듯 나지막하게 ‘아빠’라고 울먹이며 더 가까이다가서고, 이 장면에서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품속에서 보호받던 어린 여자아이였을 때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그리고선 곧바로그들 모두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이 신에서 여주인공의 무력함과 약한 모습에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영화내러티브의 바닥에 깔려 있는 리비도적 기계장치 속에서 줄을 잡아당기며 조종하는 사악한 요정이며,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죽음을 맞이하는 이 신은 그녀의 궁극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금지된 혹성> 정반대편 극단에 위치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근친적 부녀관계를다루지만, <금지된 혹성>에서는 파괴적 괴물이 아버지의 근친적 죽음-소망을 물질화시키는 반면, <딥임팩트>에서는 딸의 근친적 죽음-소망이 파괴적 괴물을 물질화한다. 끌어안고 있는 딸과 아버지를 쓸어가는 거대한 파도가 있는해안은 (파도에 해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 등장하는 프레드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유명한) 일반적인할리우드영화의 모티브와 반대로 읽을 수 있다. <딥 임팩트>에서 커플은 진정 치명적인 근친 커플이라서 작은 해안에서적당히 쳐대는 파도가 아니라, 거대하며 살인적 해일이 되는 것이다.

이드-기계, 욕망과 판타지의 물질화 ‘되기’

그와 함께 난 이 실제적 사물의 특정한 버전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공간으로서의 사물(성스러운/금지된 지역)에서 상징계와 실제계사이의 거리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물질화된다는 것이다(혹은 칸트의 선험적관념론의 용어를 쓰자면, 우리의 직관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지대로, 무한히 신성한 이성을 나타낼 뿐인 사물들의 상태가되는 지대이다).

실제적 사물이 우리의 내밀한 판타지를 직접 물질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지닌 이드-기계(id-machine)로나타나는 것은 훌륭할 것까지는 없지만, 오랜 계보가 있다. 영화에서 그 계보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기본 이야기구조를 머나먼 행성으로 옮겨놓은 프레드 윌콕스의 <금지된 혹성>으로 시작한다. 즉, 다른 남자라고는 만나본 적 없는딸과 외딴섬에서 홀로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데, 탐험대가 침입해 들어오면서 그 평화는 깨진다. <금지된혹성>사진에서 미치광이 천재 과학자는 그의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데, 우주 여행자들이 그 행성에 도착하며 평화가 깨지는것이다. 곧, 보이지 않는 괴물이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서 이 괴물은 근친적 평화를 깨뜨린 침입자들에 대한아버지의 파괴적 충동이 물질화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소급적으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의 템페스트 또한부권적 초자아의 분노가 물질화된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스스로는 알지 못하지만, 파괴적인 괴물을 만들어내는 이드-기계는 이 머나먼 행성의 표면 아래작동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며, 그 메커니즘은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물질화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고, 바로 그기계 때문에 자멸한 어떤 문명의 신비로운 잔여물이다. 여기서 이드-기계는 프로이트적인 리비도의 문맥에 자리잡는다. 이드-기계가만들어내는 괴물들은 원시 아버지가 딸과의 공생을 위협하는 다른 남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근친적 파괴 충동을 실현한 것이다.

이드-기계라는 모티브의 궁극적 변주는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솔라리스>(사진)가 될 것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에 기초한 이 영화에서 실제적 사물은 성적 관계라는 교착상태와연관되어 있다. <솔라리스>는 새로 발견된 행성인 솔라리스에 보내진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과학자들이미쳐버리거나, 환각에 빠진 채 자살하는 등)들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우주국 심리학자 켈빈의 이야기이다. 솔라리스라는 행성은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거대한 아이의 몸이나 인간의 건축물 등과 같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흉내내어 만들기도 하는 액체 표면을 지녔다. 행성과 의사소통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기는 하지만, 과학자들은 솔라리스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내는 거대한 두뇌라고 가정한다.

켈빈이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켈빈은 자신의 침대 옆에 누워 있는, 자신의 사별한 부인 하리를발견한다(하리는 몇년 전 켈빈이 그녀를 떠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켈빈은 하리를 떼어내려 온갖 시도를 하지만 비참히실패하고 만다(로켓에 하리를 태워보내지만, 그 다음날 다시 물질화되어 돌아와 있다). 켈빈은 그녀의 조직을 검사하던 중, 그녀가보통의 인간과 같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정한 미시적 레벨 이하로 보자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그저 공백일 뿐인 것이다. 결국 켈빈은 하리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외상적 판타지가 실현되어 나타난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써하리의 기억에 존재하는 이상한 갭에 대한 수수께끼가 설명된다. 물론 하리는 실제 사람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그녀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켈빈이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적 이미지가 그 모든 모순 속에서 물질화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는 하리가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에 영원히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고,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실제의 위치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극장판 <트윈픽스>(Fire Walk withMe)에서 나타나는 불처럼, 그녀는 영원히 ?주인공과 함께 걷고?, 그에게 들러붙어,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가녀린유령이며, 순전히 외관에 불과한 그녀는 결코 지워질 수 없다. 그녀는 두개의 죽음 사이에서 영원히 되돌아오며, 죽었지만 죽지않은(undead)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며, 남성의 죄책감이 물질화된 것이며, 죄로 타락하는 것일 뿐이기때문에 남성은 오직 여성의 자살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바이닝거식의 반(反)페미니즘적 개념으로 돌아가야 하지않을까?

<솔라리스>는 여성이란 남성 판타지의 물질화에 불과하다는 개념을 그저 물질적인 사실로 제시하기 위해, 리얼리티 내부에서작동하고 있는 SF 규칙에 기대어 선다. 하리가 점하는 비극적인 위치는 오직 자신은 타자의 꿈으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어떠한본질적 정체성도 없으며, 자신 스스로가 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윤리적 행위는자살이 되는 것이다. 하리는 자신이 영속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켈빈이 받을 고통을 알고서, 결국 자신의 재생을 불가능하게 할화학약품을 삼켜 스스로를 파괴한다(이 영화에서 가장 두려운 장면은 유령과 같은 하리가 최초의 자살 시도에서 실패하고 다시깨어나는 장면이다. 액체 산소를 들이마시고서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바닥에 눕지만, 에로틱한 아름다움과 비천한 공포가 섞인 가운데그녀의 육체가 경련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영화에 계속나타나는 외설적인 물질덩어리로 환원되고 말 때, 자기소멸의 시도마저도 실패하는 것보다 더욱 비극적인 순간이 있겠는가?). 소설의끝부분에서 켈빈은 솔라리스 대양의 신비로운 표면을 응시하며 홀로 우주선에 남는다.

부정태의 전략- 여자는 남자의 징후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 둘 사이에 감추어진 계약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즉‘노예에 대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성된다. 너는 나의 육체이나, 너의 것인 그 육체가 나의 육체라는 것은 내게알려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인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부인은 이중적이다. 우선 주인은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며, 탈육화된 욕망으로남고자 하며, 노예가 자신의 육체로 행하기를 강요한다. 둘째, 노예는 마치 주인을 위해서 행하는 자신의 육체적 노동이 강요된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활동이라는 듯 주인의 육체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행위자로서 행동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중적(이며 자신을 지워내는) 부정의 구조는 남성과 여성관계의 부권적인 기반을 그려내기도 한다.첫째, 여성은 단지 남성의 비본질적인 그림자이며 투사/반영으로 위치할 뿐이다. 그래서 신경증적으로 남성을 모방하려 하지만 결코완전히 구성된 자기동일적인 주체성이라는 도덕적 고매함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반영일 뿐인 이 상태는 부정해야만 하는것이고, 여성은 마치 여성이 (여성은 태생적으로 복종적이며, 동종적이며, 자기희생적이라는) 자신 스스로의 자율적인 논리에 따라가부장제의 논리 내에서 행동한다는 식의 거짓된 자율성을 부여받을 뿐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역설은 노예가 더욱 노예가될수록 자신의 위치를 더욱 자율적인 작인으로 (잘못)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여성의궁극적인 노예상태는 그녀가 ‘여성적’인, 즉 순종적이며 동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스스로 자율적인 행위자가 된다고 (잘못)인식할 때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을 단지 남성의 징후일 뿐이고, 남성 판타지의 체현이며, 진정한 남성 주체성에 대한신경증적 모방으로 보았던 바이닝거의 존재론적 명예훼손은 그 자체를 넓게 수용하고, 충분히 전유하자면 훨씬 전복적인 측면이 나타날수도 있다. 즉, 여성적 자율성에 대한 거짓된 주장, 아마도 최종적인 페미니즘 진술이란 ‘나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단지 타자의 환상이 체화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솔라리스>에서 취한 것은 하리의 ‘두 가지’ 자살이다. 첫째, 실제로 켈빈의아내로 살았던 시절의 자살과 둘째, 죽었으나 죽지 않은 유령과도 같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소거하려 한 영웅적 행위이다. 첫번째 자살 행위가 삶의 짐을 벗어내기 위한 도피에 불과한 반면, 두 번째 자살 행위는 윤리적 행위이다.

다시 말해, (지구에서 자살하기 이전의) 하리가 ?보통 인간 존재?였다면, 두 번째 하리는 그녀가 본질적정체성의 흔적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급진적인 의미에서의 주체가 된다(영화에서 하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냐.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하리가 아니야/…/말해봐요… 말해봐요…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역겹나요?’). 켈빈에게나타난 하리와 우주선의 동료인 기바리안에게 나타난 괴물 같은 아프로디테의 차이는 기바리안의 유령이 실제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아니라, 순수한 판타지로부터 왔다는 것이다(영화가 아니라 소설의 경우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괴물 같은 아프로디테를 작고 순결한금발 소녀로 바꿔넣었다). ‘거대한 흑인 여인이 경쾌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게 조용히 다가왔다. 난 그녀 눈의 흰자위에서 미광을보았고, 그녀의 벗은 발이 내는 부드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풀로 엮은 노란 스커트만 입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커다란가슴은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검은 팔은 종아리만큼이나 두꺼웠다.’ 기바리안은 원시적 모성 환상과의 대면을 견디지못하고 수치심에 자살한다.

이 행성은 사유하는 듯이 보이는 신비로운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가? 라캉이 말하는 외설적덩어리로서, 상징적 거리가 붕괴하며 언어, 기호가 아무런 소용없는 지점, 즉 외상적 실제인가? 이 거대한 두뇌, 타자는 일종의심리적 단락(short circuit)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질문과 답변의, 요구와 만족의 변증법을 단락화하며 우리가 질문을제기하기에 앞서 우리의 욕망을 지탱하는 가장 내밀한 판타지를 직접적으로 물질화하여 답변으로 내놓는다(오히려 부과한다, 라는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솔라리스는 비록 우리의 심리적 삶 전체가 그 판타지 주위를 맴돌기는 하지만, 결코 현실에서받아들일 수 없는, 궁극의 환상적이며 대상적인 파트너를 생성하는 기계이다.

 

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4] – 결핍 대 소유, 여성 대 어머니의 대립구조

2004.02.05 20:00

결핍 대 소유, 여성 대 어머니의 대립구조

자크-알랭 밀레는 여성의 비존재, 구성적 결핍(‘거세’), 다시 말해 주체성의 공백을 가정하는 여성과거짓 여성을 구분한다. 거짓 여성은 자신의 본래 매력을 믿지 않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섬기고, 집안을 돌보는 등의 사명을버리며, 유행하는 옷과 메이크업, 타락한 난교파티에 빠져드는 여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여성이다. 거짓 여성은 그녀주체성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공백으로부터, 그녀의 존재를 특징짓는 ?결핍?으로부터 도피하여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며 참된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거짓 확신에 빠져드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은 확고히 고정된 존재이며 자기완결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남편이 바쁘게 뛰는 동안, 자신은 고요한 삶을 이끌며, 남편이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항구와도 같이 봉사하며) 일상생활에만족해 있는 듯이 보인다(그러나 여성에게 ?소유?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은 물론 아이를 갖는 것이며, 그래서 라캉은 여성과 어머니사이의 궁극적 대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존재하지 않는 여성에 비해, 어머니는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쪽은 공백을 가리면서 신경증적이 되며, 자신의결핍(‘거세’)을 과시하는 여성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여성들이란 가부장적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지않을 뿐더러 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부인하는 ‘소유’한, 즉 자기만족적인 거짓 여성들이라는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역설은 여성이 공백 주위의 허울을 구성하는 비본질적이고, 모순된 존재로 모욕당하고, 환원되면 될수록,그녀는 확고한 남성의 본질적 자기동일성을 더욱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오토 바이닝거의 전체 작업은 이러한 역설에 집중하고있다). 반면, 여성이 확고하고, 자기완결적인 실체가 되면 될수록, 그녀는 더욱 남성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준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이러한 대립은 <노스탤지아>에서 가장 명확히드러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작가의 원고를 찾아 여행 중인 주인공 러시아 작가는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그를 유혹하는 결핍된 존재이며, 신경증적인 여성인 유지니아와 그가 러시아에 남겨두고 떠나온 부인의 모성적 모습에 대한 기억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매우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어머니 대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적으로활동적이며, 도발적인(<노스탤지아>의 유지니아처럼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과 같은 기호화된 신호로 유혹하는) 여성은거짓되며 히스테릭한 존재로 거부당하며, 단정하게 빗어 묶은 머리를 하고 있는 모성적 형태와 대조를 이룬다. 타르코프스키에게있어, 여성을 성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녀 존재에 있어 영혼의 정수를 희생하고, 그때문에 스스로 황폐해지며, 척박한 존재가 되고 만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도발적 여성에 대한 구토를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다.타르코프스키는 신경증적인 불안에 걸리기 쉬운 이러한 여성보다, 확실하며 안정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택하고 있다. 이 구토는유지니아가 주인공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 내뿜는 길고 신경증적인 비난에 대한 주인공(과 감독)의 태도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타르코프스키가 정적인 롱숏들(혹은 느린 패닝이나 트래킹 이동만을 할 뿐인 숏들)을 선택한 것은 바로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숏들은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노스탤지아>에서는 두 가지 모두 잘드러난다. 그 숏들은 지구의 중력장으로부터 거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장에 완전히 굴복하는 지점에서처럼갈망하던 영적 조화를 발하며 그 내용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거나(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긴 숏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데,러시아인 주인공이 불붙여진 초를 들고서 텅 빈 수영장을 걷는 장면이다. 죽은 도미니코가 구원받기 위해 완수해야 한다고 말한사명으로, 결국 한번 실패한 뒤에 주인공은 수영장의 다른 편 끝에 다다른다. 이때 그는 환희에 충만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더욱흥미로운 것은 그 숏들이 유지니아가 주인공에게 퍼붓는 (성적으로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제스처와 경멸적인 관찰이 한데 섞여 있는)신경증적 폭발을 담은 롱숏과 같이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숏에서 유지니아는 지친 주인공이 보여주는 무관심함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격발에도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길고 정적인 숏 그 자체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성적이며)신경증적인 격발들을 피사체에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간 채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고 있는 카사베츠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러한카사베츠의 작업은 격분한 여성들의 얼굴을 형태변화시키며 시점의 안정성을 잃는다.

타르코프스키의 오판, 또는 완전한 결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는 비록 부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인 남성 시나리오의주요 특징들을 보충한다. 여성을 남성의 증상으로 보는 구조는 남성이 그의 타자적 사물, 즉 그의 가장 내밀한 꿈을 읽고 그에게증상과 그 자신의 메시지로 되돌아오는 탈중심화되었으며 불투명한 타자적 대상과 대면했을 때에만 작동가능한 것이다(그러나 남성주체는 그 증상, 메시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융의 방식을 따라 <솔라리스>를 단순히(남성) 주체의 부인된 내적 충동의 투사나 물질화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일 이 투사가일어난다면, 불가해한 타자적 사물이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정 수수께끼로 삼아야 할 것은 이 실제적 사물이라는 존재이다.타르코프스키의 문제는 그 스스로 외적 여행이란 단지 한 개인의 내밀한 심리로 떠나는 여행의 외화인 동시에 (혹은 외화이거나)투사일 뿐이라는 융식의 해석을 택했다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켈빈이 솔라리스에서 행할 임무는 아마도 오직 하나일 것이다. 사랑을 잃은남자는 더이상 남자가 아니다. 이 ‘솔라리스적’인 전체의 목표는 휴머니티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렘의 원작소설은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행성 솔라리스, 이 ‘사유 존재’(res cogitans)의 비활성적인 외적 현존에 초점을맞춘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솔라리스는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불가해한 절대적 타자로 남는다는 것이다. 사실,그것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인된 판타지로 되돌아오긴 하나, 이러한 회귀 아래에 놓여진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문제는 완전히불가해한 것으로 남는다(그것은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순수한 기계적 반응일 뿐인가? 우리와 악마의 게임을 하자는 것인가?우리를 도와 (혹은 강제로) 우리가 부인한 진실을 대면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를 할리우드에서영화화하기 위해 소설을 상업적으로 각색하는 작업과 유사한 위치에 놓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가장 질 낮은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이 하는 바로 그런 일을 했다. 즉 수수께끼 같은 타자성과의 만남을 커플을 만들어내는 틀 안으로 다시 써넣은것이다.

<솔라리스>의 소설과 영화 사이의 거리는 각기 다른 엔딩장면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소설에서 켈빈은 솔라리스 대양의 신비스러운 표면을 응시하며 우주선에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이 내던져진타자성(솔라리스의 혼돈스러운 표면)과 그가 돌아가길 갈망하는 다차(러시아식 나무집)를 하나의 숏 안에 조합해 넣는, 원형적이며타르코프스키적인 환상으로 끝맺는다(여기서 다차는 솔라리스, 즉 극단적 타자성의 내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가장 내밀한 갈망의잃어버린 대상을 발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퀀스는 모호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이 숏 바로 직전에 우주 정거장의살아남은 동료 가운데 하나가 켈빈에게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물속의 수초를 보여주는 타르코프스키 스타일의 숏이두어컷 지나가고 나면, 다차 안에서 켈빈과 그의 아버지는 화해한 채 서 있다. 그리고는 점차 우리가 본 그 다차가 실제의 고향집이 아니라, 여전히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비전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다차와 다차를 둘러싼 풀밭은 혼돈스러운 솔라리스의 표면한가운데 홀로 외딴섬으로 나타난다. 즉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물질화된 비전인 것이다.

이와 동일한 환상적인 숏이 <노스탤지아>에도 들어 있다. 폐허가 된 성단의 잔해 속에 둘러싸인 이탈리아 시골 풍경한가운데, 주인공이 헤매다니는 바로 그곳에 난데없이 주인공의 꿈에 나타났던 러시아식 다차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숏은 다차앞에서 가로 누워 있는 주인공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시작하는데, 이때 주인공은 실제 고향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가천천히 뒤로 빠져나오면 이탈리아 시골 한가운데 다차가 있는 세팅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수영장을 가로질러 초를 나르는자기희생적이며 강박적인 제스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혹은 그렇게 믿게 되는) 이후에 이 신이 이어지기 때문에<노스탤지아>의 마지막 숏을 주인공의 꿈이 아니라, 주인공의 죽음을 상징하는 언캐니한 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주인공이 떠도는 이탈리아 시골과 그가 갈망했던 대상이 한데 합쳐지는 불가능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이 불가능한 통합은유지니아가 주인공의 러시아에 두고 온 모성적인 부인을 껴안고서 나타나는 꿈 시퀀스에서 나타나 있다).

접속 불가능한 중핵과의 교신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현상이며 장면이고, 꿈 체험이다. 즉 주체화될 수 없는 비주체적 현상이며, 그누구의 꿈도 아닌 꿈이고, 그 주체가 존재를 그만두고 나서야 나타나는 꿈인 것이다. 이러한 결말적인 판타지는 대립하고, 양립할수 없는 시점들이 인공적으로 압축된 것이다(마치 한쪽 눈으로는 새장만을 보게 하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앵무새만 보게 하고나서, 두눈의 각도를 잘 조절하고 나서 두눈을 다 뜨면 새장에 갇혀 있는 앵무새를 보게 되는 실험같이 말이다. 난 최근에 이테스트에서 실패했는데, 그때 간호사에게 내 동기가 더 강했다면 아마도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앵무새와 새장 대신발기한 페니스와 벌려진 질이 실험의 이미지여서, 두눈을 뜨면 페니스가 질 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실험이었더라면 말이다. 그가엾은 간호사는 날 몰아냈다. 그리하여 한마디만 더 하자면 라캉은 모든 (하나의 요소가 결국에는 다른 요소와 완벽히 들어맞는)환상적이며 조화로운 조정은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열린 ‘열쇠를 자물쇠의 구멍에 넣는 것처럼’ 들어맞는) 성공적인성관계의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의 겸손했던 제안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마지막 신뿐만 아니라 새로운 오프닝 또한 추가했다. 소설에서는 켈빈이 솔라리스로 떠나며시작하는 반면, 영화의 초반 30분은 다차가 있는 타르코프스키적인 러시아 시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골에서 켈빈은 산책을하고, 비에 흠뻑 젖고, 축축한 대지에 몸을 뉜다. 앞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영화가 환상적인 결말을 내리고 있는 것과 달리소설은 그 어떤 접촉도 불가능한 타자성과 접했음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알고 있는 켈빈이 솔라리스의 표면을 홀로 바라보고 있는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행성 솔라리스는 엄격히 칸트식으로 말해 물자체, 실체적 대상으로서의 사유(사유하는 본질)가불가능한 출현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솔라리스에서 중요한 것은 과도하고 절대적인 근접성이 완벽한 타자성과 일치한다는것이다. 솔라리스는 우리 존재의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환상적 중핵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곧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타자성이기 때문에,우리 자신의 접속 불가능한 중핵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라리스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하는 것은 솔라리스가 우리의제한된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서는, 우리가 영원히 이해 못할 심술궂은 게임을 하는 지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질적이어서가 아니라,솔라리스는 상징세계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두어야만 할 존재로 우리를 지나치게 가깝게 이끌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타자성으로 솔라리스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변덕에 따르는 유령과도 같은 현상을 만들어낸다. 만일솔라리스의 표면을 조종하는 무대감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우리 내부의 사유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교훈은 대타자(상징적 질서)와 실제적 사물로서의 타자 사이의 대립과 반대 관계이다. 대타자는 가로막혀 있다. 그것은커뮤니케이션의 틀을 마련해주는 상징적 규칙이라는 가상적 질서일 뿐이다. 반면 솔라리스에서 대타자란 더이상 가로막혀 있지 않으며,전적으로 가상적이다. 거기에서 상징계는 실제계로 무너져내리고, 언어는 실제적 사물로 존재하기에 이른다.

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 씨네21”에 대한 한 개의 댓글

  1. 행잉록에서의 소풍을 참 흥미롭게 해석했군..
    아트시네마에서 이거 보는데 사방에서 코를 골던데.
    피터 위어의 초기작이라는데 의의를 두고 봤건만, 여튼 눈꺼풀을 짓누르는데 있어선 엄청난 포스를 발휘하더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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