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논리 만에 지배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경웅

새로 등장한 어릿광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의 민병균원장의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은 이렇게 끝난다. “어찌하다가 우리가 좌경의 길로 들어섰는가. 지금이라도 국정 파탄을 규탄하는 국민 궐기가 필요하다.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치 못하게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익의 궐기를 비장한 투로 선언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박홍씨와 함께 `부퐁’이 떠올랐다. 부퐁(bouffon)은 중세 유럽에서 왕이나 귀족 밑에서 익살부리고 재롱떠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어릿광대를 가리키는 프랑스말이다. 실제로, 전경련의 기업가들과 신문 족벌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귀족들이니 휘하에 부퐁을 부리면서 즐길만도 하다. 다만 옛날 부퐁의 익살과 재롱에는 그래도 삶에 대한 연민과 해학이 담겨있었던 데 반해, 한국의 현대판 부퐁에겐 그런 면은 없고 섬기는 귀족들의 나팔수 노릇을 함으로써 귀염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자유기업원 원장은 한국 부퐁계 선배들이 즐겨 찾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신에 `시장 경제’를 내세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오래 써먹어 이젠 신선함이 없어진데다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씨가 증언해주듯이 그것은 주로 골프채에 의해 지켜져온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맞게 레퍼토리를 바꿨음직한데, 그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가 지금 한국 사회를 “참여연대, 전교조, 민노총 등과 합세하여…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적”으로 몰아가고 있단다. 이건 큰 일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결단’ 이상의 사건이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이 연정 중에 있는 프랑스에서도 볼 수 없는 `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이라니 한국 땅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무지에서 온 것일까, 그는 `시장 경제’와 `시장 사회’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경제 부문을 시장 논리에 따르는 게 `시장 경제’라면, `시장 사회’는 사회의 모든 부문을 시장 논리에 복속시키는 `시장 전체주의 사회’를 말한다. 그는 속내에 있는 `시장(전체주의) 사회’ 대신에 아무도 부정못할 `시장 경제’를 사용하는 속임수를 쓴 셈이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에선 오직 시장만 존재한다. 교육이 사립학교 법인의 돈벌이를 위한 장에 지나지 않듯이, 건강도, 문화예술도, 사회보장도, 심지어는 가족 관계도 시장 논리에 의거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또 하나의 신세계가 그려지는가.

비정규직이 60%에 이르는 땅에서 “민노총이 힘을 쓰고 있어서 어느 기업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공정 거래를 요구하면서 소액주주운동을 벌이는 “참여연대에겐 `민(民)에 의한 자본의 통제’라는 무시무시한 목표가 숨어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소프스사 분할을 명령한 미국은 자본주의에서 일탈한 것이 된다. 놀라운 경지의 재간이다.

과거에 박홍씨의 등장에 환호작약했던 족벌신문들은 물론 새로 등장한 부퐁을 쌍수로 환영한다. 특히 조선일보는 “국정 기조에 이념적 성향 문제를 최초로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계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면서 그 의미를 더 크게 부각시킨다. 새 부퐁의 등장은 “국민이 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니 개혁한다고 더 벌이지 말고 마무리나 잘하라”고 떠들고 있는 족벌신문들에게 한 줌의 소금과 같은 것이리라. 끝으로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기어이 꺼내야겠으니 진중권씨는 표절 운운하지 않기를. -한국의 우익님들, 부디 수준 좀 높이시라!

홍세화/<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을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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