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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물질을 질료로 하여 구성된다. 그러나 예술은 물질을 넘어서려는 정신이 배태되어 있다. 물질의 제약적 운명과 정신의 초월적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예술은 또한 사회적 욕구와 규칙, 개인의 자유의지와 내면적 창조욕에 의해 다시금 긴장한다. 예술이 예배를 위한 물신적 도구의 질곡에서 떨어져 나와 점차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그 자율성을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율성은 여전히 사회와의 긴장 사이에서만 유지되고 또 가능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자율성이 더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의 욕망이 예술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자신의 자유를 수립하려고 발버둥치는 한에서만 예술의 자율성은 본연적인 것이며 예술은 예술적인 것이다.
문화산업이 주도하는 현대의 문화는 대중의 욕망을 투사하여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한에서 예술을 모욕하고 대중을 기만하려 한다. 예술은 이러한 속박에서 한시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감상자가 작품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또는 주관적인 투사를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 자신이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을 예술에 끊임없이 동일시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나는 승화의 과정에 의해서이다.
문화산업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은 현대의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근대의 계몽적·자본주의적 인간은 자연을 자신에게 속한 것, 개발해서 활용해야 하는 것, 즉 도구로서 인식한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의 방식으로써 자신에 동화시킨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동화될 수 없고 자연은 영원히 대립하는 타자로 남게 된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또는 감상자와 예술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지점은 타자를 타자로서 그 자리에 두고 자아가 그를 향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는 체험의 순간이다. 나를 부정하는 순간, 그 순간에만 나는 나일 수 있으며 타자는 타자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과 근대 독점 자본주의의 파멸적 폭력에 직면하여 고뇌하던 아도르노는 음악에서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꿈꾸었다. 그의 변증법적인 부정의 노력은 변증법적 체계에 혹여 얼마간의 부정되어야 할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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