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이후의 사건들은 이 ‘~일 것 같은 주체들'(subjects supposed to…)의 사례에 추가할 만하다.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 것 같은 주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우리는 모두, 공공질서의 붕괴, 흑인들의 폭력 분출, 강간과 약탈 등에 대한 보도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후의 조사로 입증된 일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런 폭력의 아수라장과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도 않았다. 미디어가 근거도 없는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보도했던 것이다. 실례로 9월 4일 <뉴욕타임스>에는 뉴올리언스 경찰국의 경찰서장의 말이 인용되었는데, 그는 컨벤션 센터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주변에 관광객들이 있는데, 관광객들은 이 지역 사람들의 눈에 띄기만 하면 먹잇감이 돼버립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백주대낮에 폭행과 강간을 자행하지요.” 그런데 2주 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발언 중 가장 충격적인 몇몇 부분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정한다. “살인이 일어났다는 공식 보고는 전혀 없습니다. 강간이나 성추행에 대한 공식 보고 역시 한 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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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짜 무질서와 폭력이 위기의식을 촉발시켰다는 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폭풍우가 뉴올리언스를 휩쓸고 지나가던 순간에는 정말로 약탈이 시작되긴 했다. 그 양상은 좀도둑질에서 생필품 조달을 위한 약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제한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다 해서 법과 질서가 완전히 붕괴했다는 ‘보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보도가 ‘과장된’ 것이라서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환자의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외도했다는 게 사실이라 해도 환자의 질투는 병리적인 것으로 다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령 1930년대 초 독일에 거주하던 부유한 유대인들이 ‘실제로’ 독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 딸들에게 추근대고, 대중 언론을 장악했다 해도,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한 ‘허위’이며, 병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왜냐고? 반유대주의가 병리적인 이유는 ‘부인된’ [억압된] 리비도를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투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도착된 애증의 대상이었고, 매혹과 혐오감이 뒤섞인 유령 같은 형상이었는데, 아무튼 모든 사회적 적대감의 원인은 ‘유대인’에게 투사되었다. 뉴올리언스의 약탈 사태도 이와 똑같다. 설사 폭력과 강간에 대한 ‘모든’ 보도가 실제 사실로 밝혀졌다 할지라도, 폭력에 대해 떠돌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병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발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편견이며, “그것 봐, 흑인들은 정말 그렇다니까. 문명이라는 얄팍한 껍질에 덮인 폭력적인 야만인들이라고!”라 말하는 이들이 느낀 만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우리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 부를 만한 현상과 마주친 셈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실제로 진실이라 해도,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가 거짓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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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는 부유한 이들과 빈민가 흑인들을 갈라놓는 미국 내의 내부적 장벽이 가장 두드러지게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환상을 품는다. 벽 너머는 점점 더 또 다른 세계가 되어가며, 우리의 공포와 불안과 은밀한 욕망이 투사될 수 있는 텅 빈 스크린이 되어간다.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주체들’은 이 장벽 건너편에 있다. 윌리엄 베넷이 그 혀를 잘못 놀릴 수 있었고, 자기검열이 작동하는 와중에조차 자신의 그 끔찍한 꿈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주체에 대해서다. 카트리나의 여파에 대한 온갖 소문과 거짓 보도들은 그 무엇보다 뚜렷하게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 분열을 증명해 준다.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 국경을 연다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날 것은 현지의 노동계급일 것이다. 그러므로 ‘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모두 들여보내라’는 유약한 자유주의 ‘급진 세력’의 손쉽고 공허한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 것 같은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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