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33평과 전세 105평/ 진중권 – 한겨레

주민등록 원본을 보면 웬 놈의 이사를 그렇게 다녔는지 칸이 모자랄 정도다. 그렇게 구천을 헤메다 드디어 우리 집을 갖게 된 게 일곱 살 때의 일. 기초공사만 끝낸 집터, 그 삐져 나온 철근들에 걸린 한가위 달을 바라보며 행복해 하던 기억. 하지만 행복의 대가는 썼다. 이제 빌려 쓴 융자금을 갚을 차례. 그후 오랫동안 갖고 싶은 것이 있어 징징댈 때마다 어머니는 빚 다 갚을 때까지 참으라 하셨다. 마지막 융자금을 갚는 시점은 1977년 4월. 그 날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디데이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다시 집을 내놓아야 했고, 그때 주위에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냥 갖고 계세요. 집 팔아서 다시 산 사람 없습디다.”
그 집 팔아 상가건물 안의 게딱지만한 사무실을 하나 사서 피아노 교습소를 차리고, 남은 돈으로는 전세를 얻었다. 그 와중에 사채도 얻은 모양이다. 빚은 늘어가고. 그후 20년 동안 돈 벌어 사채이자 갚으며 살았다. 나중엔 빚 갚느라 전세돈도 빼주고, 살림살이 들고 주거용도 아닌 교습소 안에 방을 내어 들어가 살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교습소마저 내놓았다.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저씨가 말한다. “그냥 갖고 계세요. 좋을 일 있을 겁니다.” 과연 좋은 일이 있어, 그 지역이 재개발이 되게 됐다. 값이 적당히 올랐을 때 동생 놈 장가 보내느라 팔았다. 그 녀석에게 좀 떼 주고 나머지로 허름한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들어갔다.

그러던 중 아이엠에프사태가 터지고 김포에 아파트가 급매로 나왔다. 좋은 기회. 그런데 그 집을 사려면 돈이 좀 모자랐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집을 못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유학 중 급거 귀국하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돈을 마련해 융자 3천만원을 끼고 집을 사버렸다. 그 아파트를 내놓은 사람은 조그만 중소기업의 사장. “마누라 놀래 주려고, 아파트 샀다는 얘기는 비밀로 해 두었는데….” 그도 평생 집 없이 살다가 이번에 처음 마련한 집이라 했다. “함께 갈 곳이 있다”고 데리고 나와, 아내의 손에 넘겨줘야 했을 그 열쇠를 사내는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솔직히, 미안했다. 아무리 돈 내고 돈 먹는 사회라 하지만, 이거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33평 아파트. 정말 넓다. 거실이 얼마나 큰지 두 돌 지난 아들놈과 길바닥에서 주운 고무공을 갖고 막 축구를 한다. 드리볼도 하고, 패스도 하고, 슛도 하고, 다 한다. 못 할 게 없다. 게다가 청소를 하려면 얼마나 힘드는지 아는가? 거실이 하나, 부엌이 하나, 베란다 하나, 화장실이 두 개, 방이 세 개다. 내가 이 집을 얻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는 오직 김규항만이 안다. 이 자가 집들이라고 기껏 찾아와서 우리 집 거실에 깔린 것이 고급목재가 아니라 무늬만 목재인 싸구려 플라스틱 장판이라는 진실을 내게 아프게 일깨워줬지만, 그래도 나는 꽃분홍 벽지로 장식된 이 촌스런 집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내가 뿌듯해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나는 집을 장만했지만, 이회창 총재는 아직 전세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전세값도 사돈이 대신 내 준 거란다. 이게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조선일보> 류근일 주필은 이 총재가 불쌍하다고 컬럼까지 썼다. 근데 그 셋방이 105평, 우리 집의 세 배다. 서민의 수학으로 따져보면 거실이 세 개, 부엌 세 개, 베란다 세 개, 화장실 여섯 개, 방이 아홉 개라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그런 빌라가 하나도 아니고 세 개. 그럼 다 합해 거실 아홉 개, 부엌 아홉 개, 베란다 아홉 개, 화장실 열 여덟 개, 방이 스물 일곱 개. 총재님, 먼저 전세 면한 인생의 선배로서 충고 드리지요. 세상에, 집 장만한 나도 검소하게 사는데, 집도 없는 분이 이렇게 사치를 부리면 안 되지요. 그런 정신으로 언제 집 장만하시려구요.

진중권/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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