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기호의 체계로 파악한다. 인간의 인식이 성립하는 것은 대상이 하나의 기호로서 판독되는 순간부터이다. 그런 면에서 언어는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도구이다.

말이 사물이나 현상들이 이루는 기호체계를 소리로서 드러내 준다면 문자는 형상으로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세계의 모습들이 언어의 의미체계를 통해 고정된다는 의미에서 문자는 사물을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위태롭기만 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임의적인가. 언어는 사물들을 인간의 지각 체계로 마름질하는 데 더없이 유용하지만 그만큼 사물의 진면목을 생략시키는 데에 충실하다. 언어로 구획지워진 사물들의 자리매김 속에서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가 대상과 일치하리라는 기본적인 가정은 다만 인간만의 착각일 뿐이다. 언어가 사물을 온전히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즉 인간 인식의 한계성을 깨닫게 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상황에서 언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물들을 현현해 주지 않으며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리 가 닿으려 해도 닿을 수 없는 원본으로서의 사물에 대해 언어는 부질없는 대리인의 노릇을 회의할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이 원본과 동일해지려는가 하면, 때로는 고정된 의미망이 주는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언어들만의 놀이가 일어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기의에 가 닿을 수 없는 기표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인간의 헛된 인력으로부터 벗어나 벌어지는 기표들간의 유희.

현재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이포 그라피 전시회’에서는 이러한 기표로서의 문자에 대한 다양한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서 문자들은 애초에 지칭해야만 했던 대상들에서 느끼는 부담을 떨쳐낸다 – 또는 극대화한다. 언어의 가시적 표현 도구로서 인간에게 기능하던 문자들은 인간의 인식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 또는 그늘 안에서 – 각자 나름의 의미들을 생성해 낸다. 작품들에서는 이렇게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 경향들이 보인다.

언어가 세계를 고스란히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언어 없이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그 상이 굴절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는 언어 바깥의 세계를 알 수 없으며 우리에게 세계는 언어 안의 세계이다. 그런데 문자들이 언어 안의 극단과 언어 바깥의 극단에서, 동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타자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 하는 것이다. 몇몇은 자신이 지칭해야 하는 대상의 모습과 거의 닮아져 버린 원시 상형 문자의 형태를 띄거나(신타로 아지오카의 ‘Cloud’/’Mother·s Day’) 아예 그 대상 자체가 되어 버리고(조선 민화 도과도원도, Viktor Kaltala의 작품), 몇몇은 지칭하는 사물을 닮은 새로운 문자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Sato Koich), 몇몇은 그 의미 틀을 벗고 자신의 외양이 지니는 조형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기하학적인 도형을 만들며(FontShop Freedom Fuse 연작) 몇몇은 문자라는 이름의 본성 자체가 사라진 채 책에서 바람과 같이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서기흔의 ‘행간풍경’ 연작). 또 몇몇은 선으로 이루어지는 구성 원리에서 벗어나 사물의 단편들을 자신의 외피로 삼기도 한다(김두섭의 광주 비엔날레 출품 작품, 키보드나 모니터 버튼 등으로 처리된 폰트체 등). 한편으로는 문자가 원래 지칭해야 할 사물을 그대로 닮으려는 시도가 있고 한편으로는 대상성을 잃어버린 독립적 개체로서의 문자들이 독립적인 사물 자체가 되려는 시도가 있는 것이다. 이는 문자 자체의 사물화, 즉 기의 자체 또는 기호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경향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통된 테마로 묶을 수도 있다.

‘문자가 자신의 지시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

문자와 그 지시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이의 관계망 속에서 양자가 지니는 우열의 시소 게임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쉽게 자명하다 여겨 버리는 문자의 본성과, 현대 예술의 탈근대적 정신에 대해 숙고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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