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1998)

감독 : 스텐리 큐브릭

1. 문명의 여명

황량한 지구에 유인원이 있다. 아직 네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어색할 정도인, 털복숭이의 유인원.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안전한 잠자리를 찾기 위해 원초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의 ‘행운’이 찾아 온다. 어느날 아침, 잠을 설치며 나와 보니 이상한 광석 하나가 그들의 영토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석의 이름을 모노리스라 하자. 그 모노리스는 이상한 음파를 보내고, 유인원들은 모노리스 주변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들에게 하나의 작지만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죽은 동물의 뼈를 만지작거리던 유인원은 유심히 뼈 하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 뼈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동물의 유해를 그 뼈로 ‘내리쳤다.’ 일종의 희열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 파괴의 작업을 계속한다. 그러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웅장하게 흐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비로소 Homo Faber가 된 것이다. 무언가를 잡고 그것을 도구 삼아 자신의 목적에 맞는 행위를 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구는 그들이 ‘정복’을 ‘생각’하게도 해 주었다. 부족 대 부족의 싸움에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부족이 승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사고하는 능력과 정복하려는 본능의 상관관계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전쟁에서의 승리. 그 승리감에 도취된 유인원이 하늘을 향해 전쟁 도구가 된 뼈를 공중을 향해 힘차게 던진다. 축복과 환희의 음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미래의 예언

그렇게 시작한 인간의 도구는, 허공으로 치솟은 뼈는 단 한 컷의 전환과 함께 당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위대한 도구, 우주선이 된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는 처음에서 현재까지를 뛰어넘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큐브릭은 예언을 한다. 유인 탐사 우주선에 의한 타행성의 정복이라는 거대한 테마부터 우주인용 음식까지. 그가 묘사하는 우주 공간과 인간의 모험의 과정, 그리고 세세한 복장과 장치들까지 68년(인간이 달에 발을 딛는 것은 69년)에 완성된 영화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예언적이다. 그는 인간의 사유능력이 지금까지의 극한을 넘어설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우주선 안에서 조깅을 하거나(이 장면을 찍은 카메라의 위치는 섬뜩하다) 무중력 상태의 표현, 그리고 그 무중력 상태에서 중력 상태와 같이 걸을 수 있도록 고안된 스튜어디스의 신발, 화상 전화 등…그의 상상력은 우리의 현재를 앞질러 간다.

플로이드 박사는(플로이드는 프로이드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의 아버지이자 인간 사유와 심리의, 다시 말해 의식과 무의식의 체계를 설파하면서 외부 세계가 아닌 인간 내부의 본질을 문제삼았던.) 목성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물론 우주선을 타고…그 우주선은 정거장도 있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까페 같은 곳도 있는 품격있는 공간이다.) 그 기이한 일이란 바로 방사능을 내뿜는 지역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석, 모노리스의 출현이었다. 그는 그렇게 모노리스의 탐구를 위해, 인간 문명의 시원을 탐구하기 위해 목성으로 향한다. ‘푸른 다뉴브 강’이라는 유유한 음악과 함께 무한한 공간, 우주를 유영하면서.

3. 도구의 결정

플로이드 박사 역시 모노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모노리스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음파에 질식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지구에서 세 명의 탐사 요원과 두 명의 우주선 관리 요원, 그리고 인공지능 컴퓨터 HAL 9000(내가 알기로는 이 HAL의 바로 다음 알파벳을 따서 훗날에 IBM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 승선한 ‘디스커버리’ 호(이 역시 훗날 NASA가 쏘아 올린 우주 탐사선의 이름이 된다)가 목성으로 향한다.

그런데 HAL(이하 할)은 하나의 의문을 던진다. 이 디스커버리 호는 무슨 목적으로 목성으로 향하는가. 세 명의 탐사요원은 왜 동면에 들면서까지 에너지를 비축해 두려 하는가. 철저한 보안 프로그램에 의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차단되어 있었고 관리 요원마저 이제 답하지 않자, 할은 의도된 오류를 일으키면서 반항한다. 그러면서 할은 사유하는 주체로서 ‘홀로 일어선다.’ 한편 관리 요원인 보우먼과 풀은 할의 무오류성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면서 할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나눈 이 대화의 내용조차 할은 그 입술 모양으로 간파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할은 동면한 탐사요원과 풀을 ‘정복’ 내지는 ‘처단’한다. 홀로 살아남은 보우먼은 다시금 ‘살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와 투쟁하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할은 인간의 손에 서서히 죽어 간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할은 담담하고 냉정한 어조를 지킨다. 절대 감정적으로 격앙되는 일이 없다. 심지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탄생하는 순간 창조주에게 배웠던 ‘데이지’라는 노래를 무덤덤히 부르기까지 한다. 영국의 신사 같음. 인간보다 더 이성적인. 불완전한 인간의 대변자로서의 완벽한 이성적 존재.

여기서 도구를 가진 인간, Homo Faber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도구는 인간이 ‘생존'(사실 이것은 절박함의 의미이기보다는 단지 인간 자신의 편리함을 위함의 의미가 강하다)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복'(이것 때문에 생존은 절박한 문제가 된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도구는 영광이며 축복이자 동시에 일종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4. 신은 죽었다

홀로 남은 보우먼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목성에 도착한다. 목성 언저리에서 보우먼은 자신을 바라보는 듯 허공에 떠 있는 모노리스를 발견한다. 모노리스는 보우먼에게 무한의 우주 여행을 선사한다. 차원을 알 수 없는 섬광의 줄기를 거쳐 우주 태초의 빅뱅의 순간을 보여주고 마치 세포분열처럼, 양수 속의 태아처럼, 오로라처럼, 물 속에 떨어뜨린 잉크의 퍼짐처럼 서서히 무가 유의 공간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지구에서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후 모노리스와 함께 태반 속의 태아가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간다.

이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을 본 내 두 눈은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한참 후 나는 이런 식으로 이 이미지들을 나의 개념 속으로 정리한다. 큐브릭은 이렇게 이 영화를 구상한 것이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도입부에 웅장하게 울리던 이 음악에 이미 포석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신은 죽었다. 도구라는 절대적 신은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모노리스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짐작되는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어 번식과 중흥을 위한 축복이었다. 도구를 쥐고 가지고 놀 줄 아는 능력은 인간이 다른 것들을 정복할 수 있게 하고 먹고 입고 자면서 생존하는 데 있어 편리를 제공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 나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를 정복하고 죽이는 행위를 수반한다. 유인원의 전쟁이 그러했고 할과 인간의 싸움, 도구와 주인의 싸움이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구의 사용은 축복인 동시에 일종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이 정복하기 위해 만든 도구(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 중 최상급이라 볼 수 있는, 완벽한 이성적 사유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도구, 할)가 오히려 인간을 정복하는 재앙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푸른 다뉴브 강’이 유유히 흐르며 우주를 한가로이 유영하는 뒤에 도사린 위기의 암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리는 장엄함의 순간(유인원의 획기적 발전의 순간) 뒤에 숨어있는 음습한 어둠의 반어적 암시로 극대화된다.

그런 것일까. 결국 우리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지난한 여정을 온 것일까. 우리는 정복해 오면서 동시에 오히려 정복당해 왔던 것일까. 이제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일까.

큐브릭은 이 순간, 죽음의 순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선언한다. 타자를 죽이면서 살아왔던 인간에게 거대한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예시한다. 죽음의 순간에 시원으로의 돌아감. 다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로.

139분 동안 거의 대사 없이 장엄한 이미지와 음악, 음향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루하지 않다. 그것이 던져주는 의미에 대해, 그넘들을 가지고 놀면서 내 머릿속에 앉혀야 하는데 지루할 여가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세계를 내 머릿속이라는 놀이터에 데리고 와 이리저리 주므르면서 포섭시켜 버리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P.S : 68년에 故큐브릭 감독은 이렇게 선언했다. 물론 수많은 철학자들이 68년 훨씬 이전부터 이와 같은 선언을 했다. 그 수많은 이들이 철학적 고민 끝에 내린 선언과 달리 우리는 아직도 이 죽음의 문턱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우리는 정복하면서 정복당하는 아이러니를 반복하면서 그 신화를 맹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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