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닝 스톤

감독 : 켄 로치

출연 : 브루스 존스, 줄리 브라운

간만에 세진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장예모의 영화를 부르던 그 녀석에게 떫더름한 반응을 보이자 불쑥 켄 로치의 영화를 들고 나선다. 빌리 앨리엇을 보고 켄 로치로 넘어가 보자고 생각하던 나는 환영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하숙방에 보기 싫게 자리하고 있는 중고 TV의 14인치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의미로 가득찬 이미지로 장식되지도 않는 영화가 가끔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그 동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와 교감 가능한 사실성,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픽션 속에 현실성이 담겨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이다. 아마도 레이닝 스톤은 그러한 경로로 나에게 감동을 안겨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적이라는 말, 특히 영화 속에서 그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영화 속의 사실성이란 결국 어떤 꾸밈 – 조명이나 미장센, 배우의 연기 등등 작위적 장치 모든 것 – 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사실성이란 달음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벼랑 앞에 서게 된다. 아무리 피사체를 꾸밈 없이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다 하여도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담기는 순간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의미를 지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프레임 안의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편집이 작위적이라는 의미에서 영화가 시작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컷 하나 없이 이어놓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무편집으로 편집되어 버린다. 결국은 형식에 있어서의 사실성이란 내용에 있어서의 사실성이 없이는 그 본연의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곳을 재인식시켜줄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영화의 사실성을 결정짓는 열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를 절망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까발린다. 실직 노동자 토미와 밥이 소수를 택하고 다수를 버린 자본주의에 대해 궐기하듯 이리뛰고 저리뛰며 보여준다. 아직 빵과 포도주가 왜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성찬식 드레스조차 사 주기 힘들어 노심초사하는 밥, 그에게 종교적 신념은 돈 앞에서 너무나도 철없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빚진 밥의 집에 쳐들어와 그의 아내와 어여쁜 딸을 위협하며 횡패를 부리는 고리대금업자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중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이곳을 그대로 체감하게 된다. 노동자의 일주일은, 더구나 실직한 그들의 일주일은 쉬지 않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적인 삶일 뿐이다.
고리대금업자 탠지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짓밟힌 밥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범죄자의 대열에 끼어든다. 한계선상에 와 있는 인생 앞에서 밥 뿐만 아니라 토미의 딸도 이웃 사람들도 점점 범죄, 술, 마약으로 망가져만 간다. 누가 범죄자이고 누가 선한 시민인가.
왜 현실이 이러한가. 왜 우리는 이같은 땅 위에서 비루하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혀야 하는 척박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가. 캔 로치가 보여주는 이 비루고 팍팍한 주인공의 몇 일간은 끊임없이 그 질문만을 되뇌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밥의 장인어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제도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돈 앞에서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음을 여실히 확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있을 때 이 말을 듣노라면 아직도 소심하고 싱거운 나까지도 기꺼이 그의 진영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의 몸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나눠 준 예수의 삶은, 그 숭고한 정신은 과연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없단 말인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을 나눠주는 신부와 엄숙하고도 처연하게 그것을 받는 밥의 마지막 장면은 그 말을 수없이 되뇌이게 한다.

켄 로치는 신부가 되어 밥의 삶을 쓰다듬고 있었다…

감독 : 오시이 마모루
제작 : 반다이 비쥬얼, 미디어 팩토리, 미디어 팩토리, 덴츠, 일본 헤럴드 영화
각본 : 이토 가즈노리
촬영 : 구제고시 겐젤스키
음악 : 카와이 켄지
주연 :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디스와후 코르스키, 이에지 그데이코

오시이 마모루라는 이름을 잡지나 TV에서나 보아 왔던 나로서는 이 ‘아바론’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사실 작가로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나는 박제화된 지식만 가지고 있고 게으르며 빈 깡통이 요란한 그런 놈이다.

아바론은 아더왕의 전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어릴 적 극장에서 보았고 그 이미지의 잔상만을 간직한 채 최근에 다시 보게 된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저주받은 아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죽음에 이른 아더왕이 호수의 여신들이 호위하는 배에 태워져 유유히 사라져 간 그 곳, 아더왕이 최후의 순간 다다른 섬의 이름이 아바론이라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영웅의 공간, 그곳을 아바론이라 부르며(실은 아발론이 정확한 발음이리라. Avalon이니까.) 가상 게임의 세계에서 영웅들이 잠드는 곳, 그곳을 아바론, 그리하여 이 영화가 다루는 가상의 세계를 아바론이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설정한 것이다.

몇몇 잡지 기사나  TV 프로에서 소개하며 밝혔듯이 그 현란한 디지털 화면에 현혹되어 스팩터클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보겠다면 큰 오산이리라. 현대 테크놀로지의 총아인 디지털의 스팩터클이 대부분 그 자체로 관객을 압도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데에 충실하다면 아바론의 그것은 현실보다 현실적인 가상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며 – 아니 오히려 가상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매우 다분한 화면이었다 – 눈요깃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그 화면 질감이 비현실적인 관계로 오히려 눈을 불편하게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만큼 영화 속 공간의 국적도 매우 모호하다. 말은 폴란드 말인데 아더왕의 전설과 9 여신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위하 찾은 도서관에서 내놓는 책들은 다 일본어로 되어 있다. 헷갈린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규정하고 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미래. 어느 지역. 인간 문명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일반인들의 끼니는 알 수 없는 개죽같은 것으로 충당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잊으려는 듯 가상 게임에 몰입한다. 아바론이라는 게임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장악하는 게임 같으며 게임 안에서의 레벨과 스코어 등은 실제 화폐와 같이 유통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게임이 일상생활이자 생계 수단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 중 애슈라는 이름의 여자는 우리나라 게임계에서 흔히들 ‘길드’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인 파티를 이루어 게임을 진행해 가는 이들과 달리 개인 행동을 하는 ‘파이터’로서 대단한 고수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 있었던 위저드 파티가 어느 순간 해체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중 한 멤버였던 머피의 로스트(게임에서 길을 잃고 영혼이 귀환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듯함)를 일종의 짐이자 의문으로 안고 있다.
그 의문을 풀고자 애슈는 아바론의 최고 경지인 클래스 SA(Special A)에 도전하고 그곳의 관문인 고스트를 잡아내고 만다. 그리고 다다른 클래스 SA, 일명 리얼 클래스. 여기서 화면은 이전의 조작된 화질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실제같은 질감의 공간이 나타난다. 무슨 의미일까. 리얼 클래스에서 그리는 가상 공간을 더욱 현실감 있게 그리려 했던 의도는. 우선 영화 속 인물들이 바라는 세계가 리얼 클래스라는 가상 공간의 세계와 닮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현실과 가상의 느낌을 뒤바꿔 놓음으로써 이 영화 속에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지으려 들지 말라는 마모루의 당부도 숨어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발견한 머피의 말과 같이 황폐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더럽게 살기보다 현실에서는 식물인간일지언정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 던져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현실이라 추정되는 세계의 모습은 황폐하고 비루하게 묘사된다. 그 먹기조차 거북하게 보이는 음식들은 물론이며 애슈에게 접근한 옛 위저드 파티의 동료가 간만에 먹는 ‘진짜’ 계란 후라이, 햄 등을 우걱우걱 먹어대는 것이나…심지어 마모루는 개를 중간중간 등장시켜 인간의 삶을 개와 병치시키고는 한다. 개에게 ‘진짜’ 음식을 먹이면서까지. 이런!

애슈는 자신의 짐이었던 머피의 무사귀환을 목적으로,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사명을 짊어지고 리얼 클래스에 도전했겠지만 리얼 클래스 속의 머피와 맞닥뜨리는 순간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렵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현실인가 가상인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듯도 하다. 이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가지지도 그리 흥미로운 사건을 준비하지도 않은 이 영화를 현란한 스팩터클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려든 이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후덥지근했으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 역시 현란한 스팩터클에 일정 정도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모 영화 잡지에 실린 정성일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것과 같이 요즘 주목받는 아시아 영화의 일종의 연대된 듯한 주제의식이 ‘그래도 살아라’라는 전언은 이 영화에도 정확하게 꽂히는 것이었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추악한 현실이든 간에 그대는 그 속에서 ‘존재’하라. 그 공간을 벗어던지고 부재하기보다는 존재하라. 그 땅 위에 발딛고 서라. 버티고 극복하라. 뭐 그런 말이 이 영화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참아내며 보았을까 하는 일종의 경이감마저 든다. 나같이 깃털처럼 가벼운 놈이…

감독 : 박흥식
출연 : 전도연, 설경구, 진희경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그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질문이 너무 거창한가? 누구는 그 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게 삶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이다라고도 말 할지도 모른다. 그 알지 못할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제각기 해답을 찾으려 하고 예술도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의 열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멜로 영화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목적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이성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이루고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세상 존재의 모든 의미는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두 인물의 포커스 주변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멜로 영화는 사랑이라는 애매하고 광범위한 말의 유효지대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축소해 놓고 이 두 남녀가 어떤 고난과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여 골인하는지에 모든 관심이 곤두서 있다. 이 안에서 모든 것은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기 위해, 또는 저주하기 위해 기능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잊어버리는 일상의 세세한 묘사로 그 일상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해 낸 것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더라.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진정 일상으로 보였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 신날 일도 없고 매일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설경구의 그 무기력해진 표정은 일정 정도 아…그게 일상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질 정도의 공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학교도 아니고 보습학원에서 말썽꾸러기 철없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있는 전도연이 그렇게 매일 웃는 모습으로 즐거워 하고 작은 일들에서 환희를 느끼는 것 같은 그 낭만적으로 낙천적인 표정은 ‘자, 봐라. 일상은 전도연의 저 환한 표정처럼 지겨운 것이면서도 일면 경이로운 것들이다’라는 것을 과장광고하기 위한 오버액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일매일 모아두었던 동전을 예금하기 위해 한 움큼 들고 온 전도연이 동전을 은행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뜨릴 때 벌어지는 해프닝이나 나뭇잎이나 꽃잎을 하나씩 뜯으면서 ‘기다, 아니다’를 점치는 것이나 요구르트를 입을 따서 먹는 게 아니라 꽁무니를 뜯어 구멍을 내서 먹는,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생수를 사서 마시다가 남은 물을 꼭 화분에다 붓는 전도연의 습관에 대한 묘사 등은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의 단면이라기 보다는 지루한 일상 속에 일어나는 작은 사건의 소묘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영화의 컨셉은 ‘일상의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새로운 관찰’이 아닐까. 일상의 지루함에 활기를 주는 것은 이러한 작은 비일상적 행위와 사건들이고 결국 이 영화가 노리는 것도 지루한 일상의 거듭을 보여주는 화면에 따분해 할 관객들에게 적재 적소에 비일상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무딘 일상의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게 하고 –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완벽히 ‘저건 나도 그런데’라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사건들로 – 동시에 전도연과 설경구의 사랑이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따분한 여정이 실제로는 이렇게 작은 재미와 활력으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아닐까.
설경구가 CATV로 녹화된 테입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돈을 찾거나 입금하기 위해 찾는 은행,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그 공간에서 유독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만 스크린에 담아주는 것 말이다. 또한 설경구가 마술을 배워 쇼를 보여주고 장래에 나타날 자신의 아내에게 미리 보내는 영상 편지를 찍어 두는 것도 그렇게 일상의 지루함에서 비일상의 특별한 느낌을 보상받기 위한 강한 욕구 아닌가.
어릴 적 아버지를 잃어버린 전도연이나 어머니를 여읜 설경구라는 인물 설정도 무언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어 일상의 세밀한 포착이라는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일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의 결핍과 비슷한 속성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면야…쩝)

어쨌든 이렇게 일상이라 하지만 실은 전혀 비일상적인 것들로 아름드리 채워진 이 영화의 곳곳은 과연 전도연과 설경구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 사실 이제 전도연이라는 배우 자체의 인지도나 미모(?)만으로도 그녀는 평범한 학원 강사 여성으로 볼 수가 없다. 아무리 안경을 씌운다 해도 –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사랑 이야기도 특별한 인물들의 판타스틱한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보여주기 위해 부던히 애를 쓴다.
진희경의 느닷없는 등장과 소멸(?) 역시 이 둘의 사랑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이루기 위한 소도구이다.(개연성 없이 나타나 개연성 없이 사라지는 진희경의 설정은 일면 당황스럽다)

장마진 여름날 한 시내 보도를 지나가는 우산들의 행렬 속의 초라한 한 남자 설경구의 우산을 수직 각도에서 내리 찍은 장면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두 사람이 오봇하고 다정스레 붙어 있을 단 하나의 우산을 찍은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이 개똥 철학 같은 내 영화 감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 두 장면의 연관성을 내 나름의 억지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우선 비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행인들을 찍는 카메라의 각도.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서의 각도가 절대 아니다. 일상적 시선이 아니라 비일상적 시선이다. 우리의 눈의 위치에서 그 우산 쓴 행인들의 행렬들은 다분히 어지럽고 방만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수직 각도라는 비일상적 시선에서 그것은 가지각색의 – 노란 색 등 원색 계통의 우산을 주로 사용한 것 같다 –  원들이 스크린 한 쪽 끝에서 한 쪽 끝으로 이동하는 예쁜 모양이 된다. 여기서 이 영화 속의 미화되고 가공된 일상의 단면을 낚아챌 수 있다. 또 하나, 첫 장면은 무수히 많은 행인들의 어지러운 발걸음들, 우산의 어지러운 움직임, 그 안의 한 남자 설경구.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그 어지러운 움직임의 우산들은 사라지고 비로소 평화로이 움직이는 하나의 원, 우산. 그 안에 있을 설경구와 전도연. 무수히 많은 일상적 사람들 사이에서 낚아 챈 한 남자의 특별한 사랑. 그리고 사랑할 여자를 찾던 외로운 솔로 남자가 드디어 제 짝을 찾았다는 선언! 설경구의 빈자리를 메워 준 전도연.(여성 관객들…좀 씁쓸하지 않은가…)

결국 남는 생각은 이 영화가 일상을 충실히 담았다는 것은 광고를 위한 거짓말이며, 대중 상업 영화에서 지리한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너무 악담만 한다고? 사실 그렇게 일상 속의 비일상을 낚아챈 표현들은 징그럽지 않다. 귀엽고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영원한 멜로의 테마를 로맨틱 코메디처럼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 미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의 특별함에 대한 세세한 묘사…라고 하는 것은 교묘한 오버의 판타지에 너무 몰입한 건 아닌가 하는 나만의 허황된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일상이 그렇게 지루하고 변화 없이 하품 나오고 자살하고 싶을 만큼이나 따분하지만은 않을 만큼 적당하게 비일상의 요소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것이 어떻냐,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게 비일상의 요소와 같은 특별한 경험,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다…는 말…그냥 그렇다. 씨네21에서 오은하 아줌마의,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일상이라는 푸념처럼 말이다. 쓰다 보니 헷갈리는군.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그럼 그건 일상의 묘사가 되나 비일상의 묘사가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