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말고사 후부터 나를 옥죄던
레포트를 다 해결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레포트는 영 쓰레기다.
아니, 내가 쓴 글들이 다 쓰레기지.
하지만 요즘은 특히나 글을 더 못 쓰겠다.
글이 안 써지는 것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란 걸 이제사 좀 알겠군…
그런데 왜 올리냐고?
여긴 난지도라니까…

야생의 사고에 대한 편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적 전통은 근대 서구 문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명제 하나만으로 근대 서구 문명 전체를 총괄할 수는 없겠으나 자기의식적 이성에 기반한 객관성과 합리성이 근대 서구 문화를 특징짓는 핵심 단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탐구와 논의 속에서 굳건하게 다져진 이 이성적인 문명은 어느 정도 자기 우월감에 도취될 만했다. 세계를 명확하고 분명한 언어로 구축하는 데에 있어 다른 문명권보다 더 빛나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이 우월감 안에서 가장 무시되던 문명이 바로 원시사회였다. 원시라는 단어 자체가 사고의 발전 단계에 있어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모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근대 서구인들은 원시인 또는 야만인이라 불리는 이들 사회의 인간들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란 찾아볼 수 없으며 사고가 무질서한 체계에 함몰되어 있고 단순하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구분이 없거나 양자의 관계를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관념 안에 묶어버리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편견은 과학과 신화적·토템적 사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후자를 비과학 또는 전과학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처럼 양자를 구분하는 도식을 회의한다. 그가 볼 때 후자, 즉 그의 표현대로 야생의 사고를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사고 방식과 엄격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부당한 대우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편견의 안경을 벗고 야생의 사고를 좀더 공정한 시각에서 이해해 보기를 시도한다.

인식의 기본적인 특징 1)

야생의 사고는 단순하고 무질서하며 체계적이지 못하다라는 근대 서구인들의 편견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웅변한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원시사회에서 사물들을 분류하는 체계들은 그 기준이 모호하며 자연계와 인간을 동일시함으로써 비과학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도 나름의 논리적 체계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밝혀진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체계와 다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일관된 체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체계적으로 사물들을 분류하고 사고하는 것은 인간 사유 행위의 본질적 측면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을 지나는 빛을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가지 색으로 분류하여 인식한다. 거기서 갈라져 나온 빛은 경계가 모호하고 다만 다양한 색상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 그대로는 색상을 분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색을 띤 빛의 그 연속적인 꾸러미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그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 경계를 그을 것인가.

이에 대해 엄격하게 참으로 미리 주어진 공준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문화권에서 이루어져 온 분류의 관습에 의해, 만일 선례에서 그 대상을 분류하는 데에 참고할 만한 방법이 없다면 기존의 분류에 대한 법칙 안에서 적절히 합당한 색의 분류를 위한 경계선을 고안할 것이다. – ‘어떠한 분류도 혼돈보다는 낫기 때문이다’2) –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무한한 색의 연속체를 경계들 사이의 여백에 있었던 다른 색들은 생략하고 다만 위의 일곱가지 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실용적인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지적 관심이 인도하는 필요성에 의해 수행된다.

원시사회의 분류체계

원시사회에서의 사물에 대한 분류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미국 동북부 인디언이나 시베리아 여러 부족, 오이로트족 등 세계 각지의 여러 원시 부족들에서 나타나는 각종 동식물에 대한 치밀한 분류와 그것의 사용의 예를 레비-스트로스는 동식물의 유용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지식이 있고 거기서 유용성을 창출해 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다시말해 인간의 필요 이전에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그들은 동식물들을 분류하는 것이다.3) 또한 그러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분류의 체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인간을 성에 따라 구분하고 방위를 구분하며 심지어 구체적인 장소들마저 분절화시켜 개체화시킨다. 그들과 우리의 사유가 지니는 교차점은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사물의 질서있는 분류에 대한 욕구.
야생의 사고도, 과학적 사고도 분절화에 입각한 분류를 통해 인식을 성립시킴으로써 무질서한 외부 세계를 질서있는 체계로서 구성하려는 기본적인 관심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관심은 특정한 사고의 구조적 형태를 구축하면서 향후의 분류에 대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원시사회도 사물을 분류하는 체계는 생각보다 엄밀하며 정확한 관찰력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원시인들도 대상과 대상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안다. 때로는 대상에 따라 우리보다도 더 세밀한 부분에서의 차이점까지 파악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통해 양자를 대립시킴으로써 분류를 시작한다. 이렇게 이원 체계에서 시작하는 분류는 대립을 만들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며 그것은 일차원적이기보다는 다층적인 이원 체계의 결합에 의해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예컨대 볼리비아의 고원에 사는 아이마라 인디언은 농식물을 단순히 익혀서 먹는 것과 각각 얼리거나 발효시켜 먹는 것으로 구분하고 동시에 평평한 것, 두꺼운 것, 나선형인 것 등의 형태를 기준으로 이항 대립을 적용하여 약 250종 정도의 변종들을 분류해 낸다.4) 이처럼 그들의 분류 방식도 이원 체계의 결합에 있어 엄밀함을 유지하고 있고 다층적인 결합도 치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의 분류도 나름의 체계 안에서 논리적임을 밝힌다.

사물들에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엄밀하다 함은 그러한 분류 방식의 체계에 그 구체적 사물들의 명칭들이 부합되는 정도가 엄밀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레비-스트로스의 표현대로 범주와 개체라는 분류 형식의 양극이 엄밀하게 상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신화적·토템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자연계와 인간의 동일시는 이같이 분류 형식의 양극이 엄밀하게 상응하는 과정에서 그 양자 사이에 상호 침투가 일어나면서 형성된다.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의 중요한 차이점은 여기서 나타난다. 전자는 개별 사물,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에 의하면 우연이나 사건과 구조 사이의 구분을 애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의 대립의 초월 또는 통합을 시도한다. 반면에 과학적 사고는 ‘우연과 필연의 구분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또한 사건과 구조를 구별짓는 것이다.’5) 야생의 사고가 지니는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브리콜뢰르, 즉 손재주꾼의 예이다. 손재주꾼은 주변에 주어져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엄밀한 작업 절차를 숙지하지 않고서도 무의식적인 구조의 질서에 이끌려 필요로 하는 물건을 능히 만들어 낸다. 특정 공정과 도구나 시설이 구축되어 있어야 생산을 할 수 있는 엔지니어와는 달리 그는 주어진 여건 안에서 거뜬히 자신의 필요를 해결한다. 새로운 개념 수준의 체계를 생성하고 그 기반에서만 세계를 구성하는 과학과는 달리, 야생의 사고는 손재주꾼과 같이 주어진 질료들로서의 자연 사물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화와 세계에 대한 인식 체계를 멋지게 수립해 낸다.

야생의 사고는 사물을 개별 속성의 차이에 따라 분류한다. 이 속성은 어느정도 균일하게 범주화되어 있는데 이 범주에는 자연계의 동식물이나 인간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대응된다. 일대다대응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범주와 개체들 사이의 상응 방식으로 인해 동식물들이 때로는 개념 수준의 이차적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이 이차적 의미는 인간의 문화 속에서 하나의 ‘부호’로서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인간의 행위나 의례, 복식, 작명 등에 직접적인 표상이 된다. 다시말해 주어진 자연계의 사물들을 질료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문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동식물의 이차적 의미는 본래의 일차적 의미와 융화되면서 토템적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낸다. 성과 속, 또는 숭배되는 것과 금기시되는 것들의 체계가 자연물에 투영된다. 즉 한 개별 사물들의 의미의 체계가 다른 영역의 체계에 이전 또는 변환된다. 여기서 구체와 추상 사이에 일종의 초월적인 종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고는 사물들을 구체화시키면서 동시에 추상화라는 또하나의 극단으로 치닫는 분류의 지속이다.

야생의 사고와 과학의 최종적 교차점

이러한 분류 체계는 근대 사회에서도 예술이나 기타 통속적인 관념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성적·과학적 사고는 자연의 분류와 인간의 분류 사이에서 의미들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고 그 둘은 서로 다른 분류 방식을 따른다. 자연 사물들 간의 구분도 명확하고 마찬가지로 분류 방식도 각기 다르다. 분류의 방식이나 체계는 각 부분들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만 완전하다. 이처럼 철저히 사물들을 분절된 각각의 체계 안에서만 파악하는 것, 또는 자연계와 인간 사이에 엄밀한 구분선을 상정하는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양적 방식으로 파악하고 사물들을 동일하거나 유사한 체계 내에서 종합적·동시적으로 파악하거나 자연에 인간을 귀속 또는 동일시하는 야생의 사고를 질적 방식으로 파악한다. 양자는 상이한 방법으로 사고를 구체화해 나간다. 전자는 세계를 끊임없이 객관화해 나가고 후자는 세계를 주관화해 나간다. 전자는 분리된 체계 안에서만 끊임없이 분석해 들어가지만 후자는 분석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이고자 하며 또 양 방향의 극한까지 진행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그 양극 간의 조종 능력을 보유하려고 한다.6)

전자는 분석을 개별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지만 그 작업이 한계에 이르면 종합의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신화적 사고가 수행하는 분석과 종합의 동시적 수행이 일정 단계에서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수반된다.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확보되었다면 그것을 인간적 의미 체계 안에서 융화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 지점은 양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상의, 또는 구조상의 차이점으로 인해 애둘러 왔던 길이 다시한번 엇갈리며 만나는 교차점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양자의 상이한 사고 유형은 다른 구조라는 입지적 여건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며 결국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나름의 형태들일 뿐 신화적 사고가 사고 발달 단계에서 뒤쳐진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러한 신화적 사고, 야생의 사고는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사고 유형이며 과학적 사고와 상호침투하면서 우리의 사고 저변에서 활동적으로 움직히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사고 사이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형성된 편견에 의해 화석화된 야생의 사고는 이렇게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회복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사고 저변에서 역동적으로 제한하는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사고의 원형질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준 것이다.

보편성을 통한 타자의 인정

레비-스트로스가 관심을 지니는 부분은 상이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그는 구조를 빌어 지극히 상이한 원시사회와 과학적 사고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 사고가 인간의 인식 구조의 본질적 특성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이한 두 문화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적 도식은 문화는 개별적인 현상이며 그 이면에는 하나의 본질로서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기본적인 관심은 무질서한 현상 이면의 질서정연한 본질을 밝힘으로써 진리를 찾아내려는 기존의 서구 사상사의 주요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사고 이면의 구조에 대한 그의 발견은 다양성 사이에서 보편성을 밝혀내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레비-스트로스는 근대 서구인의 관점에서 타자로 분류되는 원시사회에 대한 인정을 보편성의 차원에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의 구조주의 인류학의 체계 안에서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을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보편적 범주가 존재함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르트르를 맹공격하면서 근대 서구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였지만 종국에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그가 교집합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타자는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만약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보이는 광인, 즉 완벽한 타자의 경우에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확연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참여적인 관찰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나 대화 자체가 – 적어도 지금까지는 – 불가능한 광인은 실로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일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석은 의문은 이 정도 수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타자는 우리의 인지 영역 바깥의 문제이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중요한 것은 면밀한 접근을 통해 얼마든지 이해 가능한 영역 안에서의 타자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타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1)이 부분은 전공 수업인 지식사회학 강의 중에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여 레비-스트로스가 보는 인식의 기본적인 특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2)’야생의 사고'(한길사) p68.

3)같은 책 p60∼61.

4)같은 책 p104.

5)같은 책 p76.

6)같은 책 p318.

[정동칼럼]‘자기 부정’없는 개혁은 없다

< 강준만·전북대 교수>

최근 국세청의 세무조사 및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 결과 발표와 그 파장에 대해 말이 많다. 나는 여러 의견 가운데 정부가 모든 걸 법대로 한다는 데 대해 원칙적인 찬성을 하면서도 그로 인해 언론 자유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의견에 주목한다. 전반적인 여론의 큰 흐름도 이 의견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견은 분명히 타당한 면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 우리 사회의 개혁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변화를 촉구할 때에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을 즐겨 쓴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 걸까? 뼈대를 바꿔 끼고 태(胎)를 빼앗는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엄청난 고통과 시련 없이 큰 변화가 가능한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은 개혁으로 인한 고통과 시련의 감내가 강압적인 방식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라고 하는 ‘시장 논리’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최소한의 부작용과 역기능조차 없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부작용과 역기능을 소화해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조차 돼 있지 않다. ‘개혁’이라는 구호는 정권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부정’이 아닐까? 그러나 자기 부정을 감행하는 집단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모두 다 ‘자기 긍정’을 하면서 개혁을 하자고 외쳐댄다. 그러니까 “나는 옳지만 너희들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간 신문들은 그런 위선에 앞장섰다. 신문들이 한국 사회에 기여한 공은 매우 크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不信)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다른 장점들을 죽일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점일 게다. 신문들은 그 어떤 사회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집단으로서 한국 사회에 ‘불신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주범이거나 공범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 신문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스스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건 이미 지난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물론 법의 개입은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또 그로 인한 신문사의 경제적 타격이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참된 언론상은 기업으로서의 규모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신뢰다. 신문은 특권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신문들만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야당의 행태를 보자. 나는 정치 집단에 정략은 필요악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본말의 전도가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그러나 야당엔 오직 정략뿐인 것 같다. 야당은 김대중 정권의 실정과 김정권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는 걸 아예 정강정책으로 삼은 듯이 보인다. 대안과 비전 제시엔 별 뜻이 없거니와 모든 게 구태의연하다. 야당엔 스스로 부정하고 결별해야 할 구태는 없는 건가?

김정권도 다르지 않다. 김정권은 자기 긍정을 하면서 정권 재창출도 해보겠다는 터무니없이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거야 정권의 문제이겠지만, 그로 인해 양산될 정치권의 소음(騷音)을 생각하면 그걸 견뎌내야 할 국민들의 귀가 안쓰럽다. 도대체 정권이란 게 무언가? 정권은 ‘책임’ 빼놓으면 쓰러지는 것이다. 설사 억울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바로 정권이다.

국민은 여야의 정쟁 구도에 별 관심이 없다. 국민이 원하는 건 새로운 변화다. 기존 질서와 관행을 긍정하면서 어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내로라하는 힘 있는 집단들이 앞다투어 ‘자기 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해외에 살고 있는 지인 한명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 가면서 남긴 말이 여전히 필자의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그이는 “웬만하면 이제, 한국을 다니러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너무나 숨이 막혔다고 그는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너무나 ‘막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금의 품위라곤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생존에만 급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이 다시 이땅에 돌아 올 수 있을까를 염려했다고 한다. 국내의 또 다른 친구 한명도 그 엇비슷한 얘기를 필자에게 전했다.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조카 두명이 우리나라에를 왔는데, 시내를 다닐 때마다 아이들은 ‘도무지 즐길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황량하고 이상한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하루 빨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외국으로 돌아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풍요로운 외국의 삶과 비교해서 우리의 처지를 지나치게 비루한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그같은 외부의 시선은 반대로, 우리가 그만큼의 가혹한 생존 조건을 나름대로 잘 버텨 온 얘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들이 지적했던 것이 단순히 물질적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 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얘기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에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김창완씨와 두개의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한다. 하나는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인데 둘이서 같이 진행하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매일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한번씩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그는 요즘 방송계에서 알게 모르게 엄청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앞서 얘기한 두개의 프로그램말고도 또 다른 공중파 방송의 주간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진행하고 있고 심지어 일일 어린이 드라마에도 출연중이다. 간간히 뮤지컬도 하고, 얼마 전에는 동요집이긴 하지만 새 음반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또, 그 와중에 개인 콘서트까지 열기도 했다. 더 열거할 것이 남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가히 슈퍼 맨 수준이다. 도데체 이 많은 일들을 그는 어떻게 다 해내고 있는 것일까?

콘서트장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번개 머리’ 스타일로 꾸몄는데, 콘서트 제목이 아무리 ‘록 글라디에이터’라고 한들, 그래서 자신을 검투사로 변신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들, 이건 좀 ‘심하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에고, 머리가 워낙 흉해서..”를 연발해 좌중을 웃겼다. 머리 모양이 어떻든, 그는 이날 콘서트 무대에서 매력적인 멘트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후배들하고 이런 얘기를 종종 해요. 내가 이젠 록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잖니? 그건 나도 잘 아는데, 그렇다고 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잖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그러니까 죽기에 아까워서라도 록을 해야 돼,라고 말이죠”. 또 이런 말도 있다. “콘서트 제목에 왜 글라디에이터란 말을 넣은 줄 아세요. 공연을 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건데요, 무대밖에서 공연이 시작될 때를 기다릴 때면 꼭 콜로세움에 끌려 들어가기 전의 검투사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 안에는 무시무시한 사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참 무섭고, 외롭고 그렇지요.” 등등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 말의 성찬을 즐길 줄 아는 사람같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필자는 세상사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맞는 말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지나 온 과정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 특히,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혹은 그런 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급 영화보다 < 오! 그레이스>같은 ‘작은’ 영국 영화들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요즘의 영국 영화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피곤함과 또 이를 이겨낼 줄 아는 공동선의 지혜가 담겨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이라곤, 엄청난 빚밖에 없는 여주인공 그레이스의 한심한 현실은 지금의 우리 현실을 닮아 있다. 정치는 저자 거리의 아우성과 다를 바가 없고 꽤나 잘난 체 해온 일부 언론은 알고 보니 그동안 세금 떼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주노총의 위원장은 5공때나 6공때나, 문민정부 시절이나 지금의 국민의 정부 시절이나 쫓겨 다니기는 매한가지다. 비가 안오면 안 와서 난리다가 조금만 비가 내려도 이번엔 너무 많이 와서 힘겹다고 한다. 그 와중에 우리들 호주머니에는 찬바람만 쌩쌩 분다. 영화속 그레이스마냥, 남들 몰래 대마초라도 재배해 돈도 벌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위선투성이의 구겨진 세상을 통렬하게 꾸짖고 싶지만 그건 그냥 영화로만 만족해 할 얘기다. 우리들 주변에서는 그레이스마냥 그녀를 이해해 줄 착한 청년 매튜나 그의 애인, 혹은 그녀의 비리를 모르는 척 눈감아 줄 마을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희망과 삶의 끈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아침 7시부터 나와 일을 찾아 나서는 후배들이 있고, 방학이 되도 학교에 나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특강을 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비록 세상의 비루한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살아가고 있다 한들,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다음 세대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라고.

2001.06.25 / 오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