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수술 쿠폰”이 백화점 경품에까지 등장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편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품의 목록에 성형수술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상품권이나 김치냉장고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성형수술권을 주는 행위는 모든 사람들이 성형수술의 잠재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자연적인 몸”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몸은 의학이라는 문명의 질서를 거쳐야 하는 미개한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가꾸지 않은 몸”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인 동시에 남의 미감을 해치는 시각적 테러 행위이다.

한국에서 “끈 나시”를 입을 수 있는 체형은 정해져 있다.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은 여성이 이것을 입는 행위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저런 몸매에 어딜 감히….” 한국사회에서 냉소의 눈길과 측은한 표정, 그리고 큰 소리로 “소근”거리는 입들을 무시하고 몸이 드러나는 패션을 감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는 면전에서 남의 몸을 평가하는 무례함이 허용된다. 언론매체에서조차 남의 배가 나왔네 들어갔네, 턱이 기네 짧네, 가슴이 크네 작네 하며 상대방을 조롱하는 가학행위가 “재치”로 통용된다. 피부는 화장으로 지우고, 골격은 깎거나 보형물을 삽입하여 다듬고, 몸의 지방은 굶거나 호스를 집어넣어 끄집어 낸다 하더라도 비난의 여지는 언제나 남는다. “어이 숏다리, 다리는 왜 그렇게 짧아?”

이영자가 처음 텔레비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녀의 다이어트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녀가 지금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살들”이 바로 애초에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자를 유명하게 해 준 것은 그녀의 몸매도 아니고 특유의 재치도 아니다. 그 정도 몸집을 가진 사람이야 이영자 말고도 많다. 그 정도 위트야 웃음으로 먹고 사는 다른 연예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성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로 그녀의 “대담함”이다. 뚱뚱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식”에 가까운 대범함. 그녀가 한국인들에게 제공한 즐거움은 < 전국 노래자랑> 무대에서 막춤을 추는 “촌놈”들로부터 발견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시청자들의 가학적인 즐거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영자는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성공은 “우리”를 닮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만 보장된 것이다. 결국 그녀의 인기란 우리가 지닌 치부의 한계 영역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이영자가 우리를 닮고 싶다고 말했고, 어느 정도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우리는 다소 배가 뒤틀렸지만, 다이어트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 싫은 내색을 최대한 감추고 환영했다. 그녀는 우리의 강박인 동시에 희망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그녀에게 금전적 성공을 눈 감아주는 대신에 우리의 열등감만을 먹고 살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영자의 “컴백”은 명백히 배신인 동시에 계약위반이었다.

뜻밖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영자의 다이어트가 가짜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미웠던 참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이다. 그녀는 우리 앞에 나와 울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사람 중에 “그 년이 쇼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수술이 별로 효력이 없었으며, 대부분 운동으로 살을 뺐노라고 변명했다.

우리는 성형수술이 보편화된 한국 사회에 살면서도 “다이어트”와 “수술”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수술이 다이어트보다 “의지”보다는 “돈”에 더 가까운 사치행위라는 윤리의식이 작동해서일까? 그러나 다이어트를 둘러 싼 수천억원의 시장을 생각해 보라. 돈 안들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다이어트라면 누가 그 많은 돈을 들이고 있겠는가? 아직 유교적 관습이 남아 “몸에 칼을 대는” 게 조상님께 죄송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쌍꺼풀 수술에 코 높이고 턱 깎는 게 드물지 않은 우리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고생은 사서도 하는 “의지의 한국인”이기 때문에 편하게 누워서 기계로 지방을 뽑는 게으르고 나약한 행태에 분개하는 것일까?

이영자는 가짜 다이어트로 도덕성에 (왜 우리나라의 도덕성은 연예인들에게만 요구되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었고, 비디오를 사서 헛땀을 뺀 우리들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신나는 건 언론이다. 언제는 이영자가 뚱뚱하다고 놀리면서 장사를 하더니, 또 얼마 전에는 살 빠진 이영자를 보여주며 돈주머니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제는 이영자의 사기극을 특집으로 내보내며 물건을 판다. 2조원씩이나 해 처먹은 천하의 뚱보들인 주제에 말이다. 정작 다이어트가 필요한 건 한국의 언론이다.

아…물론 레포트를 위해 쓴 글이지만…^^;(멀쓱)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에 가상의 정신적 활동인 유리알 유희와 유리알 유희의 명수였던 요제프 크네히트의 생애를 한 편의 전기와 같은 형식으로 고찰하고 있다. 굳이 시간적으로 먼 미래, 그리고 고도의 정신 활동을 수행하는 자치주로서의 카스탈리엔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유리알 유희라는 활동을 상정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이 소설에 쏟아부은 것은 아마도 헤르만 헤세가 그의 생존시에 자행된 히틀러 정권의 폭압 속에서 어떤 비인간성의 만연함을 보았고,1) 그러한 인간의 추악함으로부터 인간의 고결함을 분리하여 보여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인간 본성의 구분과 분리에 대한 필요성은 이 소설에서 여러 가지 이원적 대립의 양상을 이끌어 내는데, 종국에는 그 다양한 이원성이 하나의 종합으로 귀결되고 있다. 카스탈리엔과 비카스탈리엔으로서의 외부 세계, 정신과 물질, 역사와 비역사, 전체와 개인, 늙음과 젊음, 안정과 변화, 추상과 구체, 이상과 현실, 영원과 순간 등이 이 소설의 중심축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의 과정에 번갈아 투영되면서 그러한 양자들이 진정으로 타협 불가능한 인간 본성인가에 대해 궁구해 보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작가가 소설 전체를 한 인물의 전기로써 구성할 만큼 애착을 보인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고찰해 봐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이 카스탈리엔과 외부 세계의 화해 또는 종합이라는 점에 따라, 요제프 크네히트와 카스탈리엔은 이 소설의 중심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카스탈리엔은 정신의 영역이 추악한 탐욕의 영역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화국이다. 이 특수한 자치주는 언제나 평온하며 오로지 정신적 능력의 함양을 추구할 뿐이다. 이러한 카스탈리엔적 기질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유리알 유희이다. 유리알 유희는 추상적 사유의 힘을 극한까지 밀고 가서 다다르는 표현을 음악과 상형문자의 구조를 빌어 집행하는 가장 순수한 정신활동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추상 활동은, 그러나 이제는 애초의 본질을 잃어 버렸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 사람들이 그 고도의 정신 활동의 만신전이 무엇을 토대로 성립되었는지를 망각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언제부터인가 카스탈리엔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고 외부 세계에서는 그들의 유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이 너무 멀리 내질러 버린 수준의 것이라고 치부하게 된 것이다. 카스탈리엔 사람들도 탐욕과 쟁취와 경쟁만이 지배하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단념한 지 오래다. 카스탈리엔은 계속 자기만의 영역에 빠져든다. 정신을 위한 정신,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다. 소위 학문 애호가들의 자치주로 변질된 카스탈리엔은 자신의 존립 토대가 되는 외부 세계의 지원을, 또는 현실을 외면해 버렸다.
  크네히트는 폴리니오 데시뇨리와의 논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카스탈리엔을 옹호하지만 이미 그 때부터 카스탈리엔의 치부를 감지하였다. 또한 베네딕트 수도원의 야코부스 신부를 통해 그것은 더욱 구체화된다. 카스탈리엔도 역사라는 총체 안에서의 일부라는 신념은 더욱 공고해진다. 유리알 유희의 명수 직책에 취임하고도 그의 신념은 카스탈리엔에 대한 회의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현실 또는 역사에 기여하고 공생적 발전을 위한 일원이 되지 못한다면 카스탈리엔의 지속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그는 결국 외부 세계로 나가 단절된 두 세계의 융합을 꾀한다.



  크네히트는 두 세계의 융합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여긴다. 크네히트의 전기 첫 장에서부터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종의 운명을 감지한다. 크네히트는 외부 세계의 학교에서 카스탈리엔의 영재 학교로 ‘불려’ 왔고 다시 카스탈리엔에서 외부 세계로 재차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는 것이다. 외부에서 카스탈리엔, 그리고 다시 외부라는 구도는 카스탈리엔은 현실 세계를 위한 건강한 자양분임을 암시한다. 또한 그 자양분을 안고 뛰어든 외부 세계는 한차원 고양된 세계라는 점에서 크네히트의 종착지인 외부 세계는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루는 세계이다. 크네히트의 삶 전체는 그러한 양립적인 명제 사이의 대립과 그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을 향해 치닫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각성의 과정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변모해 간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지속적인 진보와 생성을 은유한다. 카스탈리엔의 안정·질서와 외부 세계의 불안·변화는 서로 상생적인 관계이다. 생성의 관점에 있어서 파멸이나 죽음 또는 종말은 새로운 시작과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탄생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2) 마찬가지로 카스탈리엔과 외부 세계도 완벽하게 분리된 양자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나인 것이며 자유와 구속도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면 그 경계와 차이를 알 수 없는 하나임이 암시된다.



  이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크네히트의 삶은 이 작품 전체를 통해 헤세가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되는 대립적 양자의 종합이라는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 따라서 크네히트의 전기는 그 자체가 헤세의 사상이며 그의 사상의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네히트의 죽음은 일면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었지만 종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나간다는 헤세의 주제의식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말이며, 나 역시 티토 데시뇨리를 가르치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했지만 이미 티토에게 가르침이 전수된 것이다 – 티토의 존경과 우정과 영혼의 공명을 받기 위해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조화와 종합이라는 그의 목표 전체로서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볼 때 크네히트의 곁에서 각성을 위한 동반자가 되었던 음악의 대가, 플리니오 데시뇨리, 야코부스 신부, 노형, 프리츠 테굴라리우스 등의 인물들은 정과 반을 통한 종합의 과정에 수반되는 대립적 양자의 반영 또는 종합을 위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조화의 노력이나 끊임없는 생성 속에서 카스탈리엔마저 무상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크네히트의 정신은 노형으로부터 중국의 역경이나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에서도 기인한다. 변증법적 종합이라는 유럽의 사상과 주역 및 도가라는 중국의 사상을 종합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면 이 작품에서 시도하는 헤세의 종합이 문화나 인식론적 근거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얼마나 구체적인 실체요, 인간형으로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는 독자의 판단에 달린 듯하다. 여전히 이 작품 속에서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의 정신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로 나가려고 한다. 이방인으로서 카스탈리엔을 접하고 그 정신을 외부 세계에서 실천하려 했던 데시뇨리는 부조화와 고통의 늪에 빠졌다. 속세는 그 고귀한 정신을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참담할지도 모른다. 크네히트가 종합의 사명을 간직하고 뛰어든 속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부분은 여전히 관념적 차원이었다. 만약 그가 계속 살아남아 그의 사명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계속했다 하여도 속세는 그에게 냉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음에도 크네히트의 노력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종합과 조화의 실마리는 그렇게 우리의 관념의 수준에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세는 냉담했을지라도 종래에는 변화의 잠재성, 화해와 진보의
가능성을 크네히트로 인해 담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틀을 고안하고 수정할 수 있는 실마리는 개별 인간들의 의지에 달린 것과 같이 구체는 추상의 기반을 통해, 현실은 관념의 견인을 통해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작품은 그것 이상으로, 즉 구체와 추상은 같은 것이고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는 없으니 추상의 발전은 구체의 발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양자들은 종합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자는 같은 것이고 하나인 인간 본성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토대가 되고 어느 것이 그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언쟁하는 것은 어쩌면 소모적인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
      헤세는 나치 정권 하의 현실을 먼 미래의 입장에서 ‘문예란’ 시대로 묘사한다.
      그것은 단절되고 도구로써만 사용되는 정신 활동만이 존재하던 시기이며
      추악한 탐욕 속에 매몰되어 버린 인간들에 의해 정신이 심히 훼손되었던
      시기로서, 그 처참함의 말단에서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 유토피아의 맹아가
      싹튼다.  



      2)
      음악의 대가의 죽음도 더더욱 명랑하고 활기에 찬 표정으로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윤회사상의 모습을 띄고
      나타난다.  



      3)
      ‘양자를 집으로 삼아 양자 사이를 오가며 양자에 다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홍신문화사 p232  

언젠가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측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의 개최를 축하하는 간략한 영상 메시지를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때 카메라 앞에서 농을 섞어 이런 얘기를 했다. “사실 제가요, 명색이 미학 전공자거든요. 그런데 미의 여왕을 뽑는다는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정작 미학 전공자들을 제쳐놓고 디자이너, 영화 감독 등 이상한 사람들만 부르더군요. 이래서 되겠습니까? 올해는 혹시 불러줄까 내심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네요. 그래서 이 참에 ‘안티 미스코리아’ 측에 붙기로 했습니다.”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세상에, 이 농담이 실현된 모양이다. 풍문에 따르면 미학과 모 교수가 미스 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나갔다는 게 아닌가. 농담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그 농담을 사는(生) 사람도 있다.

자기 과 교수가 연출한 이 해프닝에 발끈한 그 학교 학생들이 크게 항의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심사위원 나가느라고 수업을 빼먹었다면 모를까, 남이야 어떻게 살든 거기에 반대할 건 또 뭐 있을까. 그 반대의 변을 들어보았다. 직관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그 죄목(?)을 적시하려니 영 논리가 딸렸던 모양이다. “일반인들에게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오해를 심어줄 수 있다.” 여기에는 아마 미스 코리아와 같은 저급한(?) 문화 행사와 대비되는, 아니 대비되어야 할 고급한(?) 인문학적 자부심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대중문화의 현상이 저급해야 할 이유도 없고, 인문학이 고급해야 할 근거도 없고, 그리하여 미학과 교수가 대중문화적 성격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학생들의 직관은 옳은데, 논증은 틀렸다. 나 같으면 다른 식으로 논증했을 게다.

세 가지 종류의 비판적 논증이 가능하다. 먼저 미의 상대성에 바탕을 둔 비판.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직 여신들의 미를 판정할 객관적 기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절대적 미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은 고전주의 이후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사회마다 지배적인 미감이 있어, 특정한 외모가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미스 코리아 대회에 나온 여자들의 그 늘씬한 몸매를 바라보며 (적어도 그 예쁜 입에서 무식한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 역시 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것이고 탓할 것이 못 된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 절대적으로 특권화되어 다른 아름다움들을 배제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지배적인 대중적 미감에서 벗어난 외모는 종종 욕설과 비방과 같은 무례한 비평적 언급의 대상이 되곤 한다. 못 생긴 게 졸지에 죄가 되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미의 파시즘이다.

둘째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신체 자본’의 관점에 선 비판. 여성의 경우를 보자. 외모가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은 물론이고, 독립적인 사회활동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조건하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수술대에 누워 제 몸을 뜯어고치고 있다. 최근에는 남자들마저 면접 시험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외모가 경제적 자본으로 전화하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몸을 뜯어고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가령 어느 개그우먼은 살을 뺀 것만으로 8억의 수익을 올렸고, 그후 지방흡입술인가 뭔가를 사용했다고 구설수에 올랐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제 사회는 우리의 몸뚱이까지 관리한다. 오늘날 ‘미’라는 것은 사회가 우리의 몸을 가두어놓는 거대한 원형감옥의 감시자가 되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존재미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자. 한편으로는 특정한 미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다른 아름다움들을 배제하고 모욕하는 차별의 미학이 있다. 이 차별의 미학은 우리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뚱이에 열등의식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그것을 뜯어고치도록 강요하는 생체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배적인 대중적 미감에 따라 제 몸을 뜯어고치는 사람은 어쩌면 거기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나, 그 쾌감은 자기의 자연적 신체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이 차별의 미학은 이제 다양한 아름다움의 공존을 인정하는 차이의 미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제 몸을 지배적 미감에 맞춰 뜯어고치는 자기포기의 미학은 이제 자기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연출하는 배려의 미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미스 코리아 대회는 차별의 미학, 자기 포기의 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원시적인 미의 파시즘이다. 거기에 미학과 교수가 참여하는 것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권리일 게다. 하지만 그의 권리행사를 보고 “촌스럽다”고 논평하는 것은 양도할 수 없는 나의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