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동기 명호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녀석이 긁적인 글조각 하나

제목 : 크리스마스의 변증법…슬기둥을 들으며

타리크 알리가 쓴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을 덮으며 마음속에 무언가 답답한 것이 만져졌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뭉클한 무엇인가를 느끼기도 하고 그 시대 그 시절 그 희망들에 감격하기도 했었지만 책을 덮는 그 순간에는 답답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공동체주의, 국제주의, 인간애, 문화혁명…1968년 전세계를 달구었던  이념 혹은 행동들이 지금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실패한 혁명에 기인한 현재적 상황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냉혹한 지적들 때문일 것이다.

더이상 우리는 변혁하려고도 연대하려고도 하지 않는 오직 ‘차이의 문화’만을 강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관심, 수동성, 신중함, 보수적인 경향들이 ‘개인주의’의 외피를 쓰고 앉아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해 등돌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타리크 알리의 “젊은이들에게 자기 자신의 관심 영역 너머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이것이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반민주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은 진정한 정보를 수소의 엘리트들만이 독점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은 무척 아프게 다가온다. 지금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문화, 다양성의 문화는 현실의 가능성, 실현가능한 정치를 ‘이미 끝난 것’으로 치부하고 일상적인 삶의 고통을 끊임없이 감추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이런 생각은 그냥 그런 체념에 불과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고 지금도 그랬듯이…드라마 같이 다가온 잘 쓰여진 책 한권이 주는 금방 사라질 ‘생각 한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체념과 한줄기의 비판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그것은 철저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그냥 그렇게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 순간에, 나의 갑갑한 역사, 숨쉴 수 없이 꽉짜여진 삶의 공간이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서는 근거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다른 식으로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 실린 의미있는 글 한편 ‘크리스마스 변증법’을 옮기면서 다시 곱씹어 본다.

크리스마스는 즐겁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위해 우린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왜 다른 날들은 ‘크리스마스처럼’ 즐거울 수 없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전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선물, 칠면조 고기, 푸딩, 장식, 눈, 축제 분위기 그리고 술 등.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친숙하고 매년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것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향락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망각해 버릴 때는 과연 무엇이 정상적인 미덕인가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이 매우 병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중요성 때문에 크리스마스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공동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기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후기 자본주의의 축제들을 부족 사회와 봉건 사회의 축제 못지않게 사회의 결속과 통합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제공한다. 억압적인 세계에서도 풍요의 계기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억압을 무시한 축제와 억압의 축제가 공존한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변증법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서양의 가장 위대한 음악과 미술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크리스마스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깊디 깊은 염원, 즉 평화와 행복과 좋은 음식과 사회적 평등과 상품의 자유로운 향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매년 한겨울, 그리고 연말에 이러한 에너지들이 모두 분출된다. 그러나 선사 시대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해방된 감정의 표현은 사회적 儀式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한 의식의 기능은 기존의 사회 구조를 파괴하지 않은 채 인간의 감정을 용해할 수 있는 통제된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들을 제도화함으로써 크리스마스의 해방은 통제된다. 정신없이 기뻐하며 소리치고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사랑을 나눌 때 사람들은 선택해야만 했다.그러나 크리스마스는 그것들을 정돈시키고 의례화한다. 일 년 중 단 하루만 이러한 것을 축하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날에는 표현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의 표현이다. 크리스마스의 행복은 사회의 불행을 감추고 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변증법적 의미가 있다. 행복에 대한 욕망은 고통의 도구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가지런해진다. 그리고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상징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지닌 비판과 해방의 내용을 망각하게 만들기 위해 세심하게 이용된다. 제도화된 행복을 격파하는 일은 인간을 신화에서 구출하고 구원을 신이나 자비에 밭길 필요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희망을 의식적인 역사적 행동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분명히 독이 없는 크리스마스의 외피 속에는 억압과 함께 해방과 혁명에 대한 갈망도 발견된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금지했고 쿠바 사람들은 그것을 뒤로 미루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후기 자본주의의 형태로 정돈되어 버린 혁명적 잠재력의 해방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물론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

프레드 할리데이 ‘블랙 드워프’ 1968년 연말호
타리크 알리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