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性)

시몬느 드 보봐르

여자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더구나 여자이면서,
자기가 그 한 사람임을
진실로 모름은 한 층
나쁜 불행이다.

“키에르케고르”

늙은 여성이 보통 평온을 발견하기는, 그 여자의 일생의 끝무렵, 깨끗이 포기했을 때, 죽음의 접근이 그 여자로부터 미래의 고민들은 없애 버릴 때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대개 그 여자보다 손위이며, 그 여자는 남자가 늙어 가는 모양을 입밖에 내지 않는 기쁨을 느끼면서ㅡ 옆에서 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 여자의 복수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 여자는 그 죽음을 즐겁게 참아 간다. 말년에 홀아비가 되는 편이, 과부되기보다 더 불행하다는 점은, 자주 주목되고 있다. 남자는 여자보다도 훨씬 결혼에 이익을 얻고 있으며, 그리고 특히 말년에 있어서 그렇다. 그 이유는, 그 시기가 되면 세계는 가정의 범위 안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의 현재의 나날은, 이미 미래를 향해 넘쳐 흐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나날에 단조로운 리듬을 확보하여 주며, 그를 지배하는 것은 아내이다. 공직을 잃으면 남자는 완전히 쓸모 없게 된다. 여성에게는 적어도 살림의 지휘라는 것이 있다. 남편에게 있어서 그 여자는 팰요한 존재이지만 남편 편은 오직 성가신 존재이다.

늙은 여자들은 자기들의 독립에서 자존심을 끌어낸다. 드디어 이 시기에 그 여자는, 세계를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자로서 일평생, 속고 배반 당해 왔던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의심이 많게 되고 가끔은 인생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특히 <살아온> 여자는, 어떤 남자보다도 남자를 더욱 잘 샅샅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남자의 공적인 모습이 아니라, 남자가 동료가 없을 때 무십코 보이는 우연적인 개인을 옆에서 잘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또  그 여자가 여자끼리만 보이는 숨김없는 모습도 알고 있다. 무대의 뒤를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경험은 속임수와 거짓을 폭로시키기는 해도, 진리를 발견하기에는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미있건, 쓴맛이 있는 것이건, 늙은 여성의 지혜는 한갖 완전히 소극적이다. 그것은 이의이며, 항의이며, 거부이다. 생산하지 않는 지혜이다. 그 행동에 있어서도, 그 사고에 있어서도, 기생적인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최고도의 자유는 극기적인 도전이나 또는 회의적인 비꼼이다. 일생의 어느 나이 시절에도, 효과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로서 여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반 가량은 희생
반 가량은 공포,

전체인 자(者)인 것처럼

“J,P,샤르뜨르”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로 만들어질 뿐이다. 인간의 암컷이 사회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꼴은 결코 어떤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 숙명이 이를 정하고 있지도 않다. 문명의 전체가 수컷의 거세된 것과의 얼치기를 만들어, 그것에 여성이란 이름을 주고 있을 따름이다.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을 동안, 어린 여자아이는 자기를 성적 차별이 있는 것으로서 생각하지 못한다. 계집아이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육체는 주체성의 발현이며 바깥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구다. 어린애들은, 세계를 생식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눈과 손을 통해서 이해한다. 출생의 연극도 젓 떼는 연극도 갓난애에게 있어서는 남녀가 모두 똑 같다. 젖 빨기가 우선 맨처음에 그들의 가장 큰 쾌감의 근원이된다. 어어서 항문기에 넘어가서도 남녀에 공통인 배설작용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끌어낸다. 그들은 같은 호기심과 같은 무관심한 태도로 제 몸을 살피고, 음핵과 남성기에서 똑같이 막연한 쾌감을 끌어낸다. 그 감각이,벌써 명확한 범위에서 어머니 쪽으로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드럽고 매끄럽고도 포동포동한 여성의 살은 성적 욕망을 자극하며, 성적 욕망은 그 무엇을 잡으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우간다 구호재단인 UWESO로부터 한 장의 팩스가 날라온다. 한동안의 시민전쟁으로 남편과 젊은 남성 부양자들을 잃고 적게는 대여섯명에서 많게는 스물 남짓의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성들, 에이즈에 감염돼 열명 넘짓의 가족이 모두 죽는 등의 자국 현실을 영화로 찍어 세계에 알려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이에 키아로스타미는 비행기를 타고 우간다로 가 2000년 4월부터 1년동안 머물면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

이 영화는 지금의 우간다를 이루는 두 면들을 보여준다. 근대화의 여파와 전통문화의 잔재, 카톨릭 신앙과 세속적 인간, 영어와 토속어, 비참과 행복 등으로 구성되는 우간다의 두 얼굴이 균형있게 다루어지면서 그들의 존재성을 일갈한다. 키아로스타미는 단지 구호 차원의 동정심 유발만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구호재단의 의도보다 한발 더 나아가 현대인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라는 보편성까지 성취해낸 것 같다.
어느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에는 우간다의 그늘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문명의 이기를 마냥 신기해하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과 순박함까지 담겨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우간다의 그들은 극빈과 질병 속에서 저주에 휩싸인 존재들, 그래서 우리가 보살피고 구조해야 할 연약한 존재라는 식의 일방적 우월감을 일찌감치 배제해 내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아로스타미는 어린 아이들의 –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 매우 중대한 고민과 사건들을 너무도 충실하게 담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진실된 의미에서의 이방인이자 관조자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는 그가 존재를 어떤 값싼 몰입 없이 자신의 체험 속에 참여시켜 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 점에서 우간다의 그들에게 절망과 파멸의 무거운 짐만 채색해 버리는 우를 1년동안이나 경계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첫 번째로 각인되는 중요한 몇몇 장면들은 키아로스타미가 방문한 에이즈 환자 센터와 한 촌락에서 벌어지는 집단 가무들이다. 치유 불가능한 현대 최악의 병을 간직한 어린 남녀 학생들, 한 방에서 수십 명의 자녀들과 생활해야 하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쉽게 감내하기 힘든 고통들은 그들의 흥겨울 수밖에 없는 – 집단적 가무는 어떠하든 흥을 돋운다 –  노래와 율동들 뒤에 말없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암묵적인 비극을 감지하면서도 이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한 그들의 행위들과 그들 속에 파묻혀 같이 손뼉을 치는 감독의 몸짓 속에서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밖에 없다. 침울한 표정으로 이 이방인을 경계해야 할 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쉬운데 그들은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행복하다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구조해야 할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있다. 그들에게 번진 에이즈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첫 번째 얼굴이었던 가톨릭의 교리 때문이다. 콘돔을 쓰는 것은 자연과 신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민속 음악으로 유대하고 고통을 승화하며 이방인을 반기는 것과 이렇게 대비된다. 이것 뿐만 아니다. 시민전쟁 또한 자세히는 모르나 서구 국가들의 이해 관계 안에서 조장된 비극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얼룩진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든 보듬으려 애쓴다.

영화 도중 키아로스타미는 화면을 약 5분 남짓 꺼 버린다. 우리에게 암흑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만하냐고, 영화 볼 만하냐고 짐짓 묻는다. 그러고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강한 적응력, 전기 없이도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한참 동안의 암흑으로 가득찬 스크린은 어느새 번개의 번쩍임으로 뒤바뀌면서 시각을 자극하여 그 진공상태와 채워짐 안에서 근대화가 야기한 인간의 물질화 – 물질의 제약을 극복하려던 인간이 외려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된 상황 – 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현대적 문제성의 근원을 우간다의 참상과 포개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우간다의 두 얼굴들 속에서 자연히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획득한다.

다큐멘터리가 극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인 것 같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형식이 지니는 사실성에 의해 강화된 극적 페이소스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위의 장면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해 낼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호주의 부부가 입양해 가는 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빛과 1년간의 촬영을 마치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눈에 비치는 구름 속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더 강력한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엔딩으로 장식되는 구름과 아이들의 오버랩은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장면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얼굴은 구름만큼 선명해지지는 않고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현재 바라보고 있는 시각의 강렬함을 뒤흔들 정도로 선명한 정신의 잔상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표현한다면 딱 그 장면만큼일 것 같다. 그리고 1년간의 체험과 기억이 강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우간다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란의 한 감독이 그들과 함께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존재론적인 연결의 끈을 몸으로 각인함을 뜻한다. 정신과 몸이 중첩되는 이미지는 그렇게 달성되는 것이며 존재들의 상호 연쇄, ‘아멜리에’가 말하고 ‘레드’가 말하기도 한 숭고한 성찰이 키아로스타미로부터 나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명동형 홈페이지에서 펌

포드는 자기 종업원들의 사생활을 감독하고 규제하는 일단의 감독관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음식, 침대, 방의 용적, 휴식 시간, 그리고 더 은밀한 문제들까지도 감독합니다. 따르지 않는 이는 누구든 해고당하고 하루 6달러라는 자기의 최저 급여를 잃게 됩니다. 포드는 이 최저 임금을 지불하지만 일할 줄 알고 일에 언제나 적합한 사람들, 달리 말해 자신의 일을 자신의 생활방식과 맞출 줄 아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여전히 너무나 보헤미안적입니다. 우리는 보헤미안식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당연히 기계화는 우리를 억누릅니다. 나는 기계화를 정신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을 정도로 낭만적이며, 부르주아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실상 부르주아적 행태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인 보헤미안 기질에 빠져듭니다. 내가 벌써 당신에게 강의를 하고 있군요.

1930년 10월 20일  투리에서 친애하는 안토니오

예를들어, 최근에 내가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역사입니다. 나는 이탈리아 국민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이념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작업의 범위를 제한한다 해도 이 과제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최초로 <코스모폴리탄적>-즉 <제국적>-지식인들의 집결지를 만들어냈던 로마 제국에서 출발해서 교황 아래서의 성직자들의 조직화가 제국적 지식인의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유럽적 카스트 제도의 형태를 부여한 기독교 시대로 옮겨가야 합니다. 오직 이 방법만으로만 18세기 이후-즉 국가와 교회 간의 최초의 관할권 분쟁이 시작된 이후-에 어떻게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국민적>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18세기까지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었고, 그들의 기능은 교회화 제국 모두의 문화에 보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무(無)국민적이었던 그들은 기술자로서 전문가로서 다른 나라들의 조직화를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단일한 국민의 틀 안에서 하나의 범주를 형성하거나 국민적 계급들의 이익을 해석하는 전문화된 집단이 되지 않고 그 대신 유럽의 지도자들을 위한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1931년 7월 3일 투리에서 안토니오

교회와 종교의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모든 사람 안에서 위로의 큰 원천이자 도덕적 삶의 흔들릴 수 없는 기반을 구성해야만 하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힘이나 그러한 위로의 결속력에 대한 자신감을 거의 갖고 있지 않소. 왜냐하면 교회는 충실한 신도들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구제하는 인위적인 제도들을 만들어내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철회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교회는 신이 상호 이익을 위해 조직하된 인간들 전체를 표상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소. 그러나 정신적 유기체로 상정되는 교회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면, 속인들의 유기체들이 자신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들에 의지하지 않을 때 현실주의적 조직체라고 상정되는 이것이 실제의 사정이라오. 그런 유기체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흔히 그렇듯이,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제도들의 일원일 때조차도 자신들에게 규정된 의무들을 방기해 버린다오.

1931년 12월 7일 투리에서 안토니오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은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