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GE

감독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 이렌느 야곱
음악 : 반덴 부덴마이어(즈비그뉴 프라이즈너)

 1. 붉은 색은 박애이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규정하고 시작하는 의미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키에슬로프스키에 의해 창조된 세계이며 그 세계 안에서 이 영화의 의미는 완전해진다. 그야말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극적이지 못한 영화가 그의 세계 안에서 의미심장한 생명을 지니게 된다.

 2. 블루에서도, 화이트에서도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각 영화의 색조는 필터를 통해서든 조명이나 섬광을 통해서든 의도적으로 어느 순간 화면을 장악한다. 문득문득 내던져지는 그 빛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아니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이미지에서 의미를 구하려 한다. 그 의미는, 대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 안에서는 온전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의 세계를 벗어나면 아무런 의미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의미를 원래 지니는 것일 수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에다 진실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일 수도 있고 진실을 거짓으로 판단해 버릴 수도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의미로 가득하다. 각 시퀀스, 컷, 쇼트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서 동시에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영화를 보는 동안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실을 던져주지만 동시에 거짓이기도 하다. 유의미하면서 또한 무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세계는 현실이자 환상이며 참이자 거짓이다. 그는 진실을 탐구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회의하는 것이다.

 3. 레드에서는, 물론 붉은 색이 문득문득 화면을 뒤엎는다. 그것은 때로는 자연광(햇빛)이 되고 실내등이 되면서 우리 눈을 자극한다. 동시에 발렌틴이 모델인 거대한 현수막 광고를 통해서도 강한 색상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것은 일면 붉은 색, Red가 박애라는 의미로 침잠할 때,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럼 박애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도적인 색상의 이미지이며 나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려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점잖은 부추김이고 동시에 극에 대한 몰입을 거스르는 각성제이다. 화면에 던져지는 색조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세계와도 다른 공간이며, 영화를 보고 있는 나와도 다른 공간이다. 그것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공간이며 그러한 방식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영화와 나의 대화 과정에 참여한다.

 4. 그럼 박애란 무엇인가.
 발렌틴은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아니, 사랑의 존재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다치게 된 주인 모를 개를 걱정하고, 타인에 의해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익명의 타자들을 보호하려 하며 그러한 넘쳐나는 사랑의 힘으로 늙은 퇴직 판사에게 생의 의미를 되찾아 준다.

 늙은 퇴직 판사는 사랑을 잃어버렸었다. 그는 사랑했던,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었고 그때부터 여성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판사였으되 사심에 의해 판사의 권력으로 복수를 했고 그 일로 조기 퇴직을 해 버렸다. 그는 그 때쯤부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행위에 대해 회의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려 했던 자신에 대해 경멸하는 데 이르렀던 그는 동시에 타인, 아니 타자에 대한 애정도 상실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잠재해 있었다.

 이 영화는 우연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연은 필연이며 운명이다. 어떤 사건이 아무런 개연성 없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영화 전체의 흐름에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또는 존재들도 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발렌틴은 그러한 우연을 부여잡는다. 그녀는 매순간의 우연적일 것같은 일도 그 자체로 사랑한다. 그녀는 매일 아침 슬롯 머신을 튕기며 하루의 운명을 점쳐 본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을 우연 그 자체로, 무의미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우연을 부여잡는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논리에 의해 타자를 부여잡는다는 말과 상응한다. 그녀는 항상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타자들에 대해 관심을 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발렌틴의 표정이라 할 수 있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는 때묻지 않은 진지함의 눈길은 타자에 대한 애정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우연에서 운명을 찾는 것은 자신의 존재 사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바깥에 대한 관심어린 애정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필연성이나 운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선 사랑이란 그 울타리 안을 사랑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동일한 의미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박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거의 근접해 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자아와 타자는 분리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개체는 전체와 필연적 얼개 속에서 상관되는 것이며 하나의 주체는 또다른 그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결국 박애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요건이 된다.

 자유와 평등은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유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자아라는 울타리가 타자와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애란 하나의 주체가 지니는 가치를 이끌어내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은 레드를 통해 진정으로 통합된 결을 지니게 된다.

5. 병을 쓰레기통에다 집어넣으려 애쓰는 가련한 노파는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이전의 ‘블루’, ‘화이트’에서는 주인공은 그 노파를 지긋이 바라보며 웃음 지을 뿐이다. 그런 관조를 통해 주인공은 문득 하나의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고는 했다. 이 영화에서 발렌틴은 그 가련한 노파를 그냥 두고 지켜보지 않는다. 그녀는 노파에게 다가가 그 힘겨운 작업을 도와준다. 그렇게 그 연결 고리는 레드에서 한차원 고양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6. 앞에서 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의 기반이라는 요지의 말은 마지막 장면에서 증명된다. 세 영화의 각 인물들은 배 조난 사고를 통해 한 화면에 잡힌다. 그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하지만 그렇게 필연적인 고리를 형성하며 진정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7. 발렌틴의 옆집에 사는 판사 지망생 청년은 극중극처럼 간간이 제시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 청년은 퇴직 판사의 젊은 시절이다. 발렌틴과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퇴직 판사의 또다른 모습은 – 시간과 공간이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 한 존재를 두 겹으로 만들면서 발렌틴에게로 겹쳐 놓으면서 앞에서 말한 존재를 가능케 하는 가치로서의 박애, 우연과 필연의 통합성이라는 말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말해 준다.

 퇴직 판사와 예비 판사는 발렌틴에 의해 사랑을 재발견하고 진정한 존재감을 맛볼 것이다. (예비 판사는 조난 사고의 구조 작업에서 발렌틴과 함께 구조됨으로써 그러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8. 발렌틴은 천사이며 동시에 구원이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행위 뿐이다.

시장 논리 만에 지배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경웅

새로 등장한 어릿광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의 민병균원장의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은 이렇게 끝난다. “어찌하다가 우리가 좌경의 길로 들어섰는가. 지금이라도 국정 파탄을 규탄하는 국민 궐기가 필요하다.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치 못하게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익의 궐기를 비장한 투로 선언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박홍씨와 함께 `부퐁’이 떠올랐다. 부퐁(bouffon)은 중세 유럽에서 왕이나 귀족 밑에서 익살부리고 재롱떠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어릿광대를 가리키는 프랑스말이다. 실제로, 전경련의 기업가들과 신문 족벌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귀족들이니 휘하에 부퐁을 부리면서 즐길만도 하다. 다만 옛날 부퐁의 익살과 재롱에는 그래도 삶에 대한 연민과 해학이 담겨있었던 데 반해, 한국의 현대판 부퐁에겐 그런 면은 없고 섬기는 귀족들의 나팔수 노릇을 함으로써 귀염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자유기업원 원장은 한국 부퐁계 선배들이 즐겨 찾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신에 `시장 경제’를 내세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오래 써먹어 이젠 신선함이 없어진데다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씨가 증언해주듯이 그것은 주로 골프채에 의해 지켜져온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맞게 레퍼토리를 바꿨음직한데, 그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가 지금 한국 사회를 “참여연대, 전교조, 민노총 등과 합세하여…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적”으로 몰아가고 있단다. 이건 큰 일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결단’ 이상의 사건이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이 연정 중에 있는 프랑스에서도 볼 수 없는 `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이라니 한국 땅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무지에서 온 것일까, 그는 `시장 경제’와 `시장 사회’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경제 부문을 시장 논리에 따르는 게 `시장 경제’라면, `시장 사회’는 사회의 모든 부문을 시장 논리에 복속시키는 `시장 전체주의 사회’를 말한다. 그는 속내에 있는 `시장(전체주의) 사회’ 대신에 아무도 부정못할 `시장 경제’를 사용하는 속임수를 쓴 셈이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에선 오직 시장만 존재한다. 교육이 사립학교 법인의 돈벌이를 위한 장에 지나지 않듯이, 건강도, 문화예술도, 사회보장도, 심지어는 가족 관계도 시장 논리에 의거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또 하나의 신세계가 그려지는가.

비정규직이 60%에 이르는 땅에서 “민노총이 힘을 쓰고 있어서 어느 기업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공정 거래를 요구하면서 소액주주운동을 벌이는 “참여연대에겐 `민(民)에 의한 자본의 통제’라는 무시무시한 목표가 숨어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소프스사 분할을 명령한 미국은 자본주의에서 일탈한 것이 된다. 놀라운 경지의 재간이다.

과거에 박홍씨의 등장에 환호작약했던 족벌신문들은 물론 새로 등장한 부퐁을 쌍수로 환영한다. 특히 조선일보는 “국정 기조에 이념적 성향 문제를 최초로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계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면서 그 의미를 더 크게 부각시킨다. 새 부퐁의 등장은 “국민이 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니 개혁한다고 더 벌이지 말고 마무리나 잘하라”고 떠들고 있는 족벌신문들에게 한 줌의 소금과 같은 것이리라. 끝으로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기어이 꺼내야겠으니 진중권씨는 표절 운운하지 않기를. -한국의 우익님들, 부디 수준 좀 높이시라!

홍세화/<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을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혁명이냐 개혁이냐’를 아직까지 붙들고 있으면서 드는 잡생각

개혁은 혁명을 위한 발판이다. 개혁의 의미가 단지 그것 뿐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변화’의 근본적 의미를 혁명이 좀더 온전하게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진정한 변화란 산 정상을 두고 급전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꺾이는’ 지점이 변화일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근본적 모순을 안고 인간의 비인간화를 향해 가열차게 달음질하는 행태의 중단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단절’이 아닐까. 포퍼의 논의는 이러한 현사태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유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는 개혁은 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한 성벽을 철저히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인간들에 의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모순이 있으며 낭만성이 베어 있다.
포퍼가 말하는 개혁은 급전환이라는 정상을 오르기 위한 등정의 과정으로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열린 사회란…일면 긍정적이고 이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본질적 요건으로 보이지만 모순의 중심을 논하기에는 정치적 배려가 다분히 포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