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김규항 칼럼
프로라는 말과 관련한 한 가지 추억. 초등학교 5학년 사회시간, 선생이 우리에게 질문했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가 뭐지? 선생은 감정 조절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점이 있긴 했지만 이따금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놓곤 매우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정답을 향해 접근해가는 우리를 기다리는 특별한 인내가 있었다. 별의별 답안이 다 제출되었지만 기억나는 건 한 가지다. “프로는 쇼를 하는 거고 아마는 진짜 하는 겁니다.” 당대의 스포츠, 프로레슬링에 근거한 우리의 유력한 답안이었다. 종이 치도록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리를 지켜보던 선생이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뗐다. “프로는 돈을 벌러 하는 거고 아마추어는 돈과 상관없이 하는 거다.” 나(우리)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일 줄이야.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프로라는 말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당연한 뜻보다 전문적이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소수만이 대우받는 어떤 직업 영역에서 그 소수를 가리키는 말 따위로 말이다. 자본주의가 넘치기 시작한, 혹은 이미 넘치는 사회에서 프로는 전문적이라는 뜻을 넘어 어떤 강력한 찬미의 말로, 당대의 사회적 영웅에게 수여하는 작위의 말로 쓰여진다. 한국사회에서 프로라는 말이 그렇게 쓰인 첫 예는 90년대 초반 광고장이들(얕보려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렇게 즐겨 부르더라)에게다. 기억하는가, 카피라이터니 AE니 하는 광고장이들이 진정한 프로의 이름으로 찬미되던 시절을.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가 수여된 게 90년대 초반이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얼마나 고등한 생명체인가를 보여준다. 그 시점은 이른바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더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된,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 극복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집으로 돌아간, 자본주의에 투항한 운동만이 살아남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대거 패퇴한 직후다. 한국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꽃,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그 마지막 구간을 출발했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던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모든 생산이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판매를 위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본의 일방적인 이익보전을 위해 유지되는 그런 모순은 자연스레 과잉생산과 빈부의 격차를 낳는다. 광고는 그런 모순을 희석하고 포장하는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 광고의 목적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안내가 아니라 생산과 사용 사이의 모든 현혹이다. 그 현혹을 위해 당대의 문학예술적 성취 가운데 가장 감각적인 부분이 총동원된다. 잘 만들어진 광고는 예술작품인 듯 아름답지만 그 목적이 현혹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 아름다움만큼 추악하다. 그 추악함을 구원이라 믿으며 밤낮없이 뛰는 프로들, 그들이 바로 광고장이들이다. (그들에게 비난이 아닌 연민을. 청년기에 생명처럼 쌓은 문학예술적 재능과 정열을 고작 그런 일을 위해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그들을 사용하는 사악한 시스템이 던져주는 몇닢의 개평과 서푼짜리 자부에나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가련한 그들에게.)

짐짓 10년이 흘러, 한국자본주의의 열차가 구제금융이라는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의 마지막 터널마저 통과한 가장 최근 프로의 작위를 받은 건 그 이름도 노골적인 펀드매니저, 돈놀이 기술자들이다. 돈독 오른 사람들의 모사꾼 노릇이라는, 합법적인 직업 가운데 가장 천박한 직업이라 할, 빛나는 금테 안경에 와이셔츠 깃을 예리하게 세운 돈놀이 기술자들은 오늘 우리 앞에 거만하게 팔짱 낀 모습으로 나타났다.

돈놀이 기술자가 영웅인 세상이라니,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90년대 초반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그 마지막 구간을 출발한 한국자본주의의 열차는, 오늘 돈놀이 기술자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무사히 종착역에 도착했다. 자본주의가 무사히 도착했다.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

 

결혼피로연

감독 : 이안

출연 : 랑웅, Mitchell Lichtenstein, 조문선(Winston Chao), May Chin, 김소매

우리는 이 세상 위에 홀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보통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다. 생각보다 세상은 세밀하게 조직되어 있고 어떠한 출구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그 그물망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리도록 만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좌절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은 꽤나 동양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대답은 좌절도 저항도 아니고 그 가운데도 아니면서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체념도 아닌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결혼피로연은 내가 알기로는 이안 감독의 소위 ‘아버지 3부작’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미국으로 진출했던가. 아무튼 서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한 이유가 이 영화 안에는 긍정, 부정이 뒤섞인 채 스며들어 있다.

고위동은 동성애자이다. 그는 대만에서 살다가 좋은 아버지를 만난 덕에 미국으로 건너와 생각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대만에 있는 부모님은 도입부에 나오는 바벨의 짓누름과 같이 일반과 구별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한 강한 억압요소가 되고 있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부모의 존재는 기존 사회의 조밀한 그물망을 뜻한다. 그는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를 이어주길 바라는 부모의 바램은 그의 성향과 충돌하고 그는 그 바램을 부정해 내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위장결혼은 묘한 긴장감을 안겨다 준다. 위동의 부모는 위동의 실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마냥 흡족해 한다. 위동과 위위는 다정한 척 하지만 속앓이를 하고 있고 위동의 가시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애인 사이먼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다. 이 묘한 긴장감 속에서 치러지는 성대한 피로연은 일면 흥겨우면서도 나와 사회가 충돌하고 내가 사회에 의해 끌려다니는 피로한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성을 억압해 온 결과입니다.’ 시끌벅적 중국의 피로연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와도 같은 유쾌한 피로연 사이에 툭 던지는 한 하객의 이 한마디는 감독의 심중을 찌른다. 피로연은 유쾌하지만 그 유쾌함은 내가 남을 괴롭히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위동과 위위는 그 안에서 숨막혀 한다. 위위는 영주권 획득을 위해 이처럼 기만적인 일을 저지른 데 대해 마냥 넋나간 듯이 웃어 대기만 하고 위동은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타인들의, 사회의 요구에 억지 부응하느라 기력이 소진한 상태가 된다.

피로연을 치르고 심신이 피로해진 위동의 충격적인 고백 한마디는 위동의 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위동을 질책하고 경멸하지 않는다. 똑같이 위위에 대해서도 증오를 비치지 않는다. 일종의 정이라는 것이 그 화해될 수 없는 차이를 보듬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정에 의한 화해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그러나 소위 ‘아버지 3부작’ 중의 한 작품이라면 아버지에게로 관심을 돌릴 법도 하다. 과연 아버지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 영화의 아버지는 어떠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몸이 쇄약해진 아버지는 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내색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내색을 하면 대를 이어야 하는 자신의 어줍잖은 의무가 성취되지 않을 것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서먹해질 것이며 혼란만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유가 기회주의적이고 미운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 알면서도 눈감고,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하며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미묘한 지점에 서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위동에게 고백한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부모님이 억지로 장가를 보내려 한 것에 반항하려 가출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그가 위동에게 대를 잇는다는 책무를 본의 아니게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의무는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을 쉬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기존의 질서란 그렇게 쉽게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위해, 또는 국가를 위해 힘써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시달릴대로 시달려 왔고 이제는 병약해진 상태이지만 그제서야 당위와 당연의 차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그 지점에서 그는 기존의 것과 그 반대의 것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나왔는가? 그 해답이란 우리가 배워온 것처럼 명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머리로서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지혜이고 대개 그것은 깔끔한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상투적이고 적당히 볼거리를 제공하면서도 그 안에 삶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을 이안도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서 있는 지점에 함몰되지 않고 그 지점마저 관조할 수 있는 달관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은 적당히 마모된 인생 속에서 피로와 함께 다가오는 체득된 지혜에서 가능한 모습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인정과 조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공항 입구로 들어간다. 이제 다 드러난 진실, 그러나 덮어진 진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위동과 위위, 사이먼을 뒤로 하고 그는 몸 수색을 받는다. 탐지기를 들이미는 공항 직원 앞에서 서서히 손을 들어보이는 슬로우 모션의 마지막 장면은 – 그것이 일반적인 속도로 찍혔다면 경박한 복종의 모습이 될 것이다 – , 그래서 나에게는 이렇게 해석된다. ‘세상은 나에게 이처럼 강요하네. 이것 말고 저것도 있는데도. 나는 그것만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세상이 강요하는 그것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도 알고 있네. 그 건널 수 없는 강 한 가운데서 나는 다만 손을 들어줄 뿐, 체념도 저항도 아닌 인정의 의미로…’

말로써 다 풀어낼 수 없는 맛이 한문에 스며 있듯 이러한 동양적 인간관에 대해 서구 관객과 비평가들은 매혹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매혹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맛이 이 영화에도 숨어있는 듯 하다.

이안은 이 영화를 더 나은 조건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해외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를 빌어 본다면 그는 위동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한마디 툭 내뱉을 것만 같다. ‘그건…나도 모르겠네…’

고양이들(Les Chats) by 보들레르

열렬한 연인들과 엄격한 학자들은 중년에 접어들면 똑 같이 사랑한다.
집안의 자랑거리 힘세고 다정한 고양이들 그들처럼 추위타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고양이들을
학문과 쾌락의 친구인 고양이들은 어둠과 정적의 공포를 찾아다닌다.
‘암흑의 신’은 그들을 상여말로 기꺼이 부렸겠지 자존심을 죽이고 복종하여 준다면
공상에 잠길 때는 심오한 고독 속에 누워있는 우람한 스핑크스의 고상한 자태 닮아 가없는 꿈결 속에 잠들이 있는듯 풍만한 허리는 마술의 불꽃 가득하고 가는 모래알 같은 금가루는 별들인 양 어렴풋이신비로운 눈동자에서 반짝인다.

– 김인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