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없는 사람들

“서른 살 전에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심장이 없다. 그러나 서른 살이 넘어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다.”

<중앙일보> 주필이 소개한 `유럽속담’이다. 반공주의자들이 제법 `교양’을 갖춰 내세우는 그 말이 언제부터 속담이 된 지는 알 길이 없다. 그가 `속담’을 부각한 이유는 예상 대로다. `평등주의가 대세’이고 `평등 포퓰리즘의 세상’이란다. 그는 그 근거로 사립학교법 개정과 언론개혁운동을 든다. 이어 사뭇 개탄한다. “우리 신문에 사주가 없으니 너희도 사주의 소유를 제한하라. 그것을 법으로 만들자. 이런 평등주의가 언론개혁이란 이름으로 성화를 부려대니 사회전체가 흔들리고 지금 내가 어느 사회에 살고있나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도대체 무슨 깜냥인가. 누가 `우리신문에 사주가 없으니 너희도 사주의 소유를 제한하라’는 논리로 언론개혁을 주장했는가. 상대의 논리를 이렇게 왜곡하고 과장해도 주필 자리에 오르는 구조가 바로 한국 언론의 현주소다.

기실 민주·통일운동을 천박하게 왜곡한 뒤 이를 원색적으로 지분거려 온 언구럭은 <조선일보> 논객들의 문법이었다. 김대중칼럼·류근일칼럼·홍사중문화마당을 보라. 최근에도 앞다퉈 군사독재의 망령을 직·간접으로 불러오고 있다. 그들 자칭 `비판적 언론인’들의 글들이, 기득권을 조금도 나누지 않으려는 세력들에겐 감칠맛 나게 다가섬을 깨달아서일까. `젊은 신문’을 자처하는 중앙일보의 주필까지 막차를 타는 풍경은 새퉁스럽다. 그래서다. 한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들인 주필·논설주간에게 신문사주가 황제처럼 군림하는 언론구조를 개혁해야 할 까닭은. 기개있고 현명한 언론인들이 편집국장과 주필이 되는 언론을 이 땅의 독자들도 가질 권리가 있다.

권영빈 주필은 부르댄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보자. 머리는 없고 심장만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설치지 않는가.” `머리 없는 사람’들을 질타하는 무례한 주필에게 정중하게 권한다. 마음을 열고 둘러 보라. 혹 심장 없는 사람들이 머리만 믿고 곰비임비 설치지 않는가. 서른 전에 단 한번도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수재들, 명문대 출신으로 군사정권에 부닐며 용춤춘 저 수많은 윤똑똑이들에게 심장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없다.

심장이 없어서일까. 스스로 자부한 `이성적 머리’는 상식조차 모른다. 지독히 불평등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일러 평등의 세상이란다. 조금이라도 평등을 강조하면 여지없이 사상공세다. 같은 겨레가 대량으로 굶어 죽어가도 눈 한번 꿈적 않을 만큼 야만적이다. 사회복지가 거의 없는 한국사회에서 뉘연히 복지병 타령이다. 창백한 흡혈귀처럼 상대를 붉게 칠해 사상검증의 먹이로 삼는다. 자신들과 다른 의견이 여론화할 조짐을 보이면 “설치지 말라”고 가리튼다. 과거가 추악한 지식인들에게 “내전이 일어났다”고 외치며 궐기를 선동한다.

명확히 짚어두자. 김대중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언론의 의무다. 어떤 개혁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김 정권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비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비판의 근거다. 민주주의·통일의 논리 위에 선 비판과 군사독재·냉전의 논리 위에 선 비난이 뒤섞여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앞의 비판은 바람직하나 은폐되고, 뒤의 비난은 퇴행적이되 넘쳐난다. 바로 언론권력 때문이다.

심장이 없는 냉혈한들의 사회, 그 체제는 요즘 들어 그들이 부쩍 그리워하는 군부독재의 파시즘이다. 그들에겐 그 사회가 질서 있고 안정된 체제였을 터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민중들에겐 악몽이다. 그래서였다. 민중들은 피 흘리며 이미 군부를 몰아냈고, 심장 없는 사람들이 여론을 농락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지금도 핏빛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심장과 머리를 대칭으로 보는 `교양인’들과 파스칼의 사색을 나누고 싶다. 비록 `쇠 귀’일망정 경청하기 바란다.

“심장은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성을 지닌다.”

손석춘/ 여론매체부장songil@hani.co.kr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

순애보

감독 : 이재용
출연 : 이정재, 다치바나 미사토
(영화음악 : 조성우)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에 서울과 일본이라는 두 공간에서 우인과 아야가 살고 있다. 그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과연 어떤 관계일까? 이 물음을 애써 처음부터 지고 감상이라는 달음질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지루하고 답답하거나 그 어느 것 하나 애정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들의 여름날의 장면들을 차근차근 묘사하는 대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된다.

우인은 부모의 살림이 그런대로 넉넉해서 떡하니 자기 집이 하나 있지만 그런 안정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다. 무감각이라는 그의 병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신경이 마비돼 있다는 설정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다. 그는 즐거움도 슬픔도 느낄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놓쳐 버렸거나, 아니면 일부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찌는 듯한 더위 아래 눌려 탈진해 버린, 수분이 다 빠져 축 늘어진 고목과도 흡사하다. 한편 무기력한 그는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이또한 스스로 의사소통이라는 선물을 던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잃어버린 매형이 혼자만의 집 안에 들어오는 것도 탐탁치 않아 하며 심지어 중국 화교들의 모임에서는 한국 땅에서 중국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노골적인 주정을 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화의 통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대화하는 통로를 버린 대신 판타지의 영역에서 그 통로를 찾으려 한다. 그는 미아를 훔쳐보며 애를 태우면서도 정작 그녀 앞에서는 떳떳치 못하고 실제 섹스에서는 발기도 되지 않으면서도 그 결핍된 욕구를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위무하려 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결핍을 판타지에서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판타지의 통로는 일방적이다. 이는 우인의 소심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만 확대해석하면 인간성이 현실 속에서는 박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더 확대해석하면 현대인의 표상으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애처롭고도 답답한 일상은 일종의 자기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아야는 죽고 싶어 한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듯 하나, 사거리 한 가운데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아야 가족의 아침은 피상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시사한다. 아야 또한 대화가 끊겨 버린 가족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듯하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그녀는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사거리에서의 흩어짐이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상실은 그 상태를 제시해 주는 표식일 수는 있으나 자살 충동에 대한 서사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 어쨌든 그녀는 죽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숨을 참아 죽을 수 있기를, 특히 자신이 태어난 날, 아니 그것이 자신의 생일인지 그 전날인지 구분하기 힘들 날짜 변경선이라는 공간 – 시간의 영역을 혼란케 하는 공간 – 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알레스카행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숨을 참고 죽기로 계획하고 경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는 작은 회사를 찾는다.
이전의 일자리에서 알게 된 리에라는 여자는 아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야에게서 사라진 삶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야에 삶의 전환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지만 애써 그 연결점은 생략되고 죽음행 비행기에 그녀를 태워 버린다.

이 두 인물은 엇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춘다. 다른 두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결핍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타자와의 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원자화되고 심지어 고립되어 버린 삶, 나 자신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져 버린 건조한 자아. 그러한 이유로 이 두 인물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엮을 명목은 어느 정도 마련된다.

명목은 만들어졌다. 그 명목을 발판으로 그들을 엮어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을 엮어가는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인은 단지 미아와 닮은 그녀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관음적으로 훔쳐보았을 뿐이고 아야는 98년 수학여행 때 경복궁에서 우인과 같이 사진 찍었던, 인연도 아닌 우연만이 있을 뿐인데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선가 본 듯한 서로를 본 순간의 그 ‘필’로 그 둘은 비약적으로 엮여 버린다. 그 필이라는 것이 실제에서도 간혹 일어나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필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풀어내려면 사전 준비가 탄탄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소통과 애정,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표방하는 것이라면 그 자기 극복을 가능케 하는 동기가 충분히 개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이 두 인물의 개별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는 일단 성공을 했던 이 영화는 – 적어도 나는 그들 일상의인 단면들을 가지고서도 충분히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었다 – 마지막 결정타에서 진을 다 빼 버린다. 무더운 여름의 시간에 지쳐 버린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향해 떠 버린 이 영화는 본 지 약 30분이 지난 지금에 허탈함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톤은 강하게 각인된다. 우인과 아야를 장식하기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소홀했던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징후로서 기능하는 선에서는 훌륭했던 장면들 – 예컨대 우인의 마비된 손가락을 비추는 몇몇 장면이나 텅 빈 수영장을 부유하는 아야의 장면, 모니터 속의 아야를 바라보는 우인과 촬영 세트에 갖혀 있다 창 밖으로 뛰어 내리는 아야의 꿈 같은 것들 – 과 대사들, 그리고 조성우의 음악은 잡히지는 않지만 어른거리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들을 통해 나는 최근에 본 멜로영화, ‘나는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보다는 이 영화를 한 수 위로 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