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마술’

최근 <조선일보>에서 위탁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63.4%가 현재의 언론개혁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대답했고, 70.7%는 개혁은언론사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 마치 국민의 대다수가 개혁에 반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다른 기관에서 위탁한 조사에선 그 반대로 국민과 기자의 대다수가 거기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어찌 된 일일까? 마법이다. 이 놀라운 둔갑술의 예술가는 조선일보 홍아무개 기자다.

제대로 된 설문조사라면 이런 항목들을 포함해야 할 게다. (1)언론개혁에 찬성하는가? (2)찬성한다면 그 방법은 자율인가 타율인가? (3)자율개혁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약 “언론개혁에 찬성하는가”라고 물었다면 아마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다”고 대답했을 게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는 이 질문을 가볍게 생략한다. (2)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율개혁이 좋다”고 할 게다. 근데 문제는 우리의 언론사에서 그 동안 자율개혁을 하겠노라 26번이나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3)`자율개혁이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물을 일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 물음도 생략한다. 그 결과 (2)의 문항에 대한 답변, 즉 “자율개혁이 좋다”는 답변이 졸지에 (1)과 (3)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암시되면서, 마치 대다수가 지금 진행되는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 정권에서 추진하는 언론개혁에 정치적 동기가 있느냐”는 문항을 보자. 이것처럼 멍청한 질문도 없다. 세상에, 정치권에서 하는 짓 중에서 정치적 동기가 없는 일도 있는가? 되물어 보자. 그럼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태도는 당리당략을 초월한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숭고하고 거룩하기만 한 행위냐? 맹구 빼고는 다 “아니다”라고 대답할 게다. 따라서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정권에서 추진하는 언론개혁이 과연 공익에 부합하는가?”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런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져놓고, 그 질문만큼 뻔한 답변을 마치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의견인 양 제시하는 거다. 이 놀라운 둔갑술은 예술이다.

조선일보 기자 여러분.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입니까. 언론자유의 대명사 아닙니까?

설날 `천황’의 사진을 실어도 일부러 못생기게 나온 걸로 골라 실었던 그 민족애. 맛도 없는 포항 석유(?)를 입에 집어넣고, 대통령 앞에 무릎 꿇고 술을 올려야 했던 그 모진 굴욕과 수모. 그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 언론자유를 위해 와신상담해 오신 것,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죠. 그 전통 어디 갑니까? 아니죠. 어디 안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간악한 정권의 음모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사수하고 계신 거죠. 그런 여러분의 투쟁을 설마 국민이 몰라주겠습니까? 왜 몰라주겠습니까. 홍아무개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보세요. 온 국민이 바로 여러분 뒤에 서 있지 않습니까.

조선일보 기자 여러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습니다. 머리띠를 두르세요. 피켓을 드세요. 거리로 나와 구속된 조선일보 기자의 석방을 요구하세요. 해고된 조선일보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세요. 국정원에서 고문을 받는 동료 기자를 구출하세요.

조선일보를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지금 조선일보 광고란은 백지일 겁니다. 시민들에게 격려광고를 내달라고 호소하세요. 홍아무개 기자의 기사를 보세요. 온 국민이 여러분 뒤에 서 있지 않습니까? 국민의 힘을 믿고 당장 거리로 나오세요. 이 참에 시민들에게 돌 좀 맞아 보세요.

진중권/ <아웃사이터> 편집주간

시장 우상숭배자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시장은 “여러가지 상품을 사고 파는 일정한 장소”라고 돼 있다. 아스라한 향수로 가슴에 젖어오는 시골의 5일장터가 이런 풀이에 적합한 듯하다. 그러나 미국 시카고의 선물시장처럼 판매자와구매자가 직접 만나지도 않고, 매매물건도 현장에 없는 시장도 있다. 인터넷 시장은 아예 물리적인 공간조차 없다.

어떤 형태의 시장이건 그 시장에서는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룬다. 이 때의 균형가격과 공급·수요량은 자원이 ‘최적의 상태’에서 배분되는 것으로 경제학자들은본다. 자본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가격체제, 시장경제가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설명하는, 경제원론 앞머리에 나오는 얘기다.

시장논리와 ‘시장실패’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에서 멎어버린 미숙한 지식인들이 많다. 걸핏하면 시장논리에 맡겨야 한다며 정부의 정당한 역할과 기능마져도 규제와 간섭이라고 호되게 비판한다. 재벌개혁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하는 것도 시장논리다. 이들에게 시장경제는 만병통치약인 것같다. 그것은 분명 우상숭배다.

그러나 경제원론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그 우상은 곧 파괴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한계와 장애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것은 시장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최적의 자원배분’을 할 수 없는 상황, ‘시장이 실패’해버린 상황이다. ‘시장실패’의 고전적인 예는 공공재 공급이다. 국방, 고속도로, 공립교육, 공원등이 대표적인 공공재인데, 가격체제, 시장기능에 맡겨 놓았다가는 이런공공재의 공급은 불가능하다. 정부의 역할과 기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득분배, 거시경제의 불안정, 독과점 문제도 가격체제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장실패’의 경우다. 시장에만 맡겨 놓았다가는 소득의불균형도, 거시경제의 불안정도 해결될 수 없다. 독과점 문제도 마찬가지다. 독과점 업자가 시장을 지배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할 수가 없다.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공정한 시장’을 대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기에 ‘공정한 시장’을 제약하는 독과점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의 규제가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90년에 셔만 반독점법이 탄생했고, 1914년에는 한국의 공정거래위에 해당되는 연방교역위원회가 생겨 본격적인 독과점 규제에 들어갔다. 미국 연방정부가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거대왕국의 독점체제에 칼을 들이댄 법적 근거도 그 뿌리는 지금부터 111년 전에제정된 셔만 반독점법이다.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들

그동안 한국의 신문시장에는 대규모 무가지와 경품 공세, 강제투입 등온갖 약탈적인 불공정행위가 난무해왔다. 신문끊기가 담배끊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부수 확장을 위한 피투성이의 판매전쟁을 치르면서 살인까지 저질렀다. 무가지의 대량살포로 인한 자원낭비가 연 4천억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하는 시장이라면 정부의 과다한 규제는 잘못된 것이며, 당연히 시장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시장실패’ 정도가 아니라 시장이 황무지처럼 폐허가 돼버린 한국의 신문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할리 만무다.

신문고시 부활을 전후하여 조선·중앙·동아일보, 한나라당,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성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지식인 무리들이 공동전선을 편채 자율규제니, 시장경제 논리에 맡겨야 한다느니 하면서 연일총공세를 퍼붓고 있다. 대자본을 바탕으로 온갖 약탈적 방법을 통해 신문시장을 독과점한 족벌신문들이 여론의 흐름을 왜곡시켜온 언론상황을 개혁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의 측면은 젖혀 놓고, 단순히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논리는 어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에 대한기본이해조차 없는 무지에서 빚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미숙한 지식인들의 모습이 마치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들처럼 보인다.

논설주간 jung4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