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붕어빵

도정일 칼럼

북미 원주민의 어떤 신화에 ‘실패하는 조물주’ 이야기가 있다. 이 조물주는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면서도 막상 인간을 만드는 대목에 가서는 서투른 견습공처럼 연거푸 실패한다. 그는 진흙으로 두 형상(남자와 여자)을 빚어 도자기 가마 같은 데 집어넣고 공을 들이는데 나흘 만에 거기서 나온 것은 그가 구상했던 ‘사람’이 아니라 암수 개 한쌍이다. 그는 다시 진흙을 빚어 가마에 넣고 이번에는 열사흘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다. 나흘의 세배나 되게 시간과 정성을 들였건만 가마에서는 암수 뱀 한쌍이 쉿쉿거리며 기어나온 것이다. “두번씩이나 실패했으니 사람을 어떻게 만들꼬?” 그는 고민에 잠긴다. 인간 만드는 일이 제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그는 자기 조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조교’의 결정적인 협력을 받고서야 조물주는 간신히 인간을 얻게 된다.

이 이야기를 여기 소개하는 것은 ‘조교 예찬’을 위해서가 (물론 조교는 예찬받을 만하지만) 아니라 사람 만드는 일 앞에서는 조물주도 쩔쩔맸다는 소식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처음 만든 것은 조물주겠지만, 이 창조 사업을 이어받은 것은 인간 그 자신이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사업의 일부이다. 그 인간 만들기가 붕어빵 찍어내기 정도의 작업이라면 사회는 교육이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은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로 밤잠 설치지 않아도 되고 어른들은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로 머리싸매지 않아도 된다. 붕어빵 잘 찍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교육의 가장 큰 고민은 붕어빵 인간을 어떻게 잘 만들어내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붕어빵을 만들지 않을까”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의 이 정당하고도 필요한 고민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붕어빵 만들기의 효율성 문제- 어떻게 하면 붕어빵을 잘 찍어낼까라는 문제로 더 노심초사하고 있다.

대학의 경우,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교수들은 한국 대학생들에게 두번 놀란다고 곧잘 피력한다. 학생들의 ‘게으름’에 놀라고 ‘놀고 보자’ 주의에 또 놀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게으름과 놀고 보자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신입생들에게서 거의 공통으로 발견되는 안쓰럽고 측은한 특징의 하나는 십리 파도를 간신히 헤엄쳐 나와 해안에 상륙한 난파선 생존자와도 같은 탈진상태이다. 젊은 육체는 이 탈진을 감추고 있지만 정신은 기진맥진해서 파김치가 되어 있다. 대학 들어오느라 기진하고 맥진한 이 정신들에 대학은 우선 쉬고 노는 곳 같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의 대학들은 유흥가로 완전 포위되어 있어 노는 데는 그만한 환경이 지구상에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 파김치가 된 정신들로부터는 지적 호기심, 상상력, 도전적 비판력이라는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점이나 잘 챙겨 ‘무사히’ 졸업장 받아 쥐고 나가자는 것이 이 탈진한 정신들의 일반적인 정신상태이다. 중·고교 6년 동안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는 다른 책이라곤 접해볼 겨를 없이 시킨 대로 입시과목에 매달리고 학력고사에 목매단 끝에 대학에 들어온 정신의 붕어빵들은 그렇게 해서 정신의 붕어빵 상태 그대로 대학을 나서고자 한다(붕어빵이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젊은 지성들에는 갈채를!).

현실론자들, 특히 학부모들은 대학 입시의 경쟁을 뚫는 데 다른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다. 학생들 자신도 이 고도 취업경쟁 시대에 무슨 다른 묘수가 있는가하고 질문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적 고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건 교육이 아니고 인간 만들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몸은 작은 자루에 불과하지만 그 정신은 작은 상자가 아니다. 그 정신은 마음놓고 춤출 수 있을 때에만 커지고 넓어져 무서운 탄력을 발휘한다. 정신을 작은 상자에 가두는 교육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교육의 문제는 이것이다. 체제에의 기술적 적응력 키우기만이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수동적 적응이 있다면 틀을 깨고 나가는 창조적 비판적 적응도 있다. 교육의 힘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이 후자이다.

교육제도와 방법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 교육이 자잘한 조무래기 감자 생산작업 이상의 것이 되자면, 대학교육을 포함한 교육의 전 영역에서 국가 및 사회의 투자규모는 최소한 지금의 다섯배는 되어야 한다. 지금의 교육투자로는 우리에게 작은 감자의 미래만 있을 뿐이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

 

군에서 내가 다니는 학교의 타과 선배 한 명(물론 고참)이 준 노트를 일기장 삼아 이것저것 긁적였었지…
가끔 이걸 읽으면 정말 조악하고 사소하지만 때로는 군생활의 지긋지긋함이 몸서리치듯 상기되고는 한다.
뭐 별로 볼 건 없지만 한 번 보시라…

1999. 2. 7. 일요일

한가로운 줄만 알았던 일요일이었다. 오후에는 수면도 보충할까 했는데 상황은 최악으로만 흘러갔다. 재수없는 작업…fuck!!
나는 어떻게 보면 상대적으로 ‘꼬인’ 군생활을 하는 듯하다. 군번도 위로 아래로 줄줄이 사탕인 암담한 군번에다가 하는 직책도 제대로 보직을 받은 게 아니고, 맡은 일도 상대적으로 억울하게 힘들고 그렇다고 무슨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니, 그것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이런 X같은 부대에 온 것 자체가 꼬인 군생활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어차피 군에 온 것부터가 군인이 가지는 일종의 피해의식의 원인이겠지만 거기에다가 상대적인 피해의식이 더해지니 그 불만을 쉽게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군인들이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피해의식과 그에 대한 보삼심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본다면 군 집단이 가지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가지는 피해의식을 떨칠 만한 충분한 보상과 대우가 필요할 것이다.

한겨레에서는 병역문제에 대한 토론 기사에서 병역 제도를 아예 모병제, 즉 직업군인제를 대안으로 제시하여 원치 않는 입대의 여지가 없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병에서 나아가 장교/하사관을 살펴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나는 현재 복무중인 장교/하사관의 90%는 군복무할 자격이 없는 작자들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합리적 사고력이 부족하고 문화적 소양도 부족하여 간부로서 병을 통솔하고 군사 업무를 책임질 능력이 되지 않는다. 장교/하사관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자격과 심사 기준을 더욱 엄격히 하고 설사 임관한다 해도 그들을 통제하고(그들에 병에게 하는 것처럼) 복무 상태를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

군대란, 가장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다. fucking Army.

….-_-….

그야말로 조악하고 일면 독선적이며 정확하지 않은 사실도 담고 있는 글이다. 거의 무의식 차원에서 튀어 나왔던 잡소리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보면 내 생각이 성글고 유치하기까지 하며 현상에 대한 판단 역시 서툴렀구나 싶지만(지금도 별다를 바 없지만)…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생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받아 오고 있는 외부로부터의 억압적 폐해의 요소들의 응결점이 바로 군대라는 것, 특히 한국사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경멸감과 증오를 군에서 고스란히 200~300% 느낄 수 있으리라는 것. 그 아물거리는, 내가 희망하는 세상의 상을 그려내는 것은 군생활의 기억을,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으로도(대립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지 모르므로) 가능할 것이다.

아마 지금 이렇게 세상을 비판적으로, 아니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아직 뚜렷하지 않은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것은 군이라는 공간이 던져준 악몽과 같은 기억들 때문이리라…

Fuckin Ar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