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대한 애증(愛憎)
추억담긴 정든 대구, ‘보수의 아성’ 이미지로 멀게만 느껴져

김동춘 기자 ohmynews@ohmynews.com  

이 글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모교인 대구 계성고 문학동인지 <계성문학>에 기고한 것으로, 계성고 64회 동기생 사이트(http://64.keisung.or.kr) ‘모교방문’ 코너에도 실려 있습니다. 진보적 사회학자로 평가되고 있는 김 교수는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향같은 대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답답하다는 김 교수의 글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김 교수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경상도, 그리고 대구만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사랑하지만 껴안을 수 없는 상대, 마음으로는 언제나 그리워하지만 선뜻 달려갈 수 없는 고향과 같다고나 할까.

대구를 생각하면 감정과 이성이 서로 충돌하고, 이성이 감정을 억누르는 고통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여 년 동안 대구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고, 나는 고향을 가지 못하는, 고향에서 따돌림받는 주변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 30년 동안 우리사회를 찢어놓은 지역주의라는 두터운 벽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역주의는 단순히 내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고장 출신 정치가들을 옹호하고 다른 지역출신자들을 배척하는 정치적 태도이다.

대구 경북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80년대에는 주로 내 지역사람을 감싸고 지지하는 태도로 표현되었지만, 이제 내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적 상징이 사라진 90년대 중반 이후에 와서는 다른 지역 출신 정치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변질하였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각해졌다. 서울에 살고 있어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대구 사람들을 가끔 만나거나 대구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문들이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실을 접하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은 거의 ‘악’의 원천이 되었고, 유화적인 대북정책, 언론사 세무조사, 의약분업 등 나름대로의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 정부의 실수나 문제점은 물론 시민단체의 낙선낙천 운동까지도 모두 김대중의 탓으로 돌려지는 것을 보았다.

‘전라도 음모론’은 대구 사람들의 모든 정치적 판단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미움’과 ‘증오’는 물론 현정부 들어선 이후 대구 경제의 침체, 대구 경북 출신자들의 각종 인사 과정에서의 상대적 소외라는 현실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해주기에 대구사람들의 김대중 증오는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증오의 공간을 누가 가장 잘 활용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 답은 명백하다.

김대중 정부가 대구 경북 지역사람뿐 아니라 전라도 사람들에게조차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현 정부가 인사정책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동안의 고위 공직자 발탁과정이나 각종 부패스캔들을 보면 해도 너무했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

옷로비 사건, 진승현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아태재단 비리, 최근의 김대중 두 아들 문제에 이르기까지 권력 장악 이후 발생한 썩은 냄새나는 돈 잔치에는 모두 김대중의 사람들이 개입되었다. 전라도에서는 민주당이 실제 여당이므로, 각종 부패한 인물들이 민주당 간판을 내걸고 공천을 받았으며 지역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오죽하면 광주의 시민단체가 민주당 공천과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겠는가?

그러나 돌이켜보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진 30년 동안의 ‘경상도 지배’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단지 그때는 무시무시한 군사통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비리와 부패가 있더라도 지금과 달리 그것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었고, 반대세력도 지금처럼 제대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며, 또 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부정과 비리의 규모도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었으며 그 방법도 훨씬 은밀하였다. 각종 고위직 인사에서의 경상도 독점은 청와대나 고급관료사회에서 30년 동안 경상도 말이 표준말이 될 정도로 심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난 30년의 ‘경상도 지배’는 서울의 부자동네인 강남지역 거주자들 중 다수를 경상도 사람으로 채울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권력이 부를 가져다주는 세상에서 권력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각종 이권과 특혜를 독점하게 되었고, 일단 확보된 이권은 흔들리지 않고 그들에게 안정적인 부를 보장해 주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경상도는 권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정부 들어서 전라도 사람들 중 고위직에 5사람 중 4사람이 진출해서 그들은 모두 출세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인재의 풀이 많기 때문에 10사람 중 반수인 5 사람이 진출해도 절대숫자에서는 전라도 사람들을 능가한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들이 이렇게 갑자기 권력을 차지하다 보니 옥석이 구분되지 않은 채 엉터리같은 인물들이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씨가 진정으로 지역주의를 철폐하는 정책을 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자신의 권력 기반이자 정치자금의 기반인 전라도 출신 후배 정치가나 지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김대중 정부의 덫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김대중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30년 동안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돈 정치, 즉 고비용 정치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돈 정치의 씨앗은 실제로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뿌린 것이라는 점이다. 박정희를 비판해온 김대중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는 박정희와 같은 방식을 쓸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결국 오늘의 김대중의 족쇄가 된 것이다.

즉 김대중의 실패는 개발독재 시절의 잔재인 셈이며, 김대중 정부의 부패사건들은 바로 개발독재의 유산이 마지막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라도건 경상도건 30년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문화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비리를 ‘전라도’ 정권의 문제로 볼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이 지적되어 온 것이지만 지역주의는 경상도나 전라도 양 쪽 모두에서 양심적이고 소신있는 인재의 등장을 가로막아왔다. 전라도에서는 민주당이라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되고, 경상도에서는 한나라당 아니, 김대중을 공격하면 고양이를 갖다 놓아도 당선된다는 이 자조적인 이야기들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분명하다. 막대기와 고양이는 결코 국회가 가서는 안될 존재들이다. 그런데 지역주의에 편승해서 난세에 광대가 영웅이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역주의에 편승해서 3공 시대의 낡은 인물이 2000년에도 버젓이 국민의 대표로 행세하고 있으며, 군사정권 하에서 학생과 양심적인 인사를 사찰하고 고문한 반민주적이고 반인권 인사들이 이 밝은 세상에서 변신하여 출세하고 있다. 지역주의의 사시(斜視)는 합리적 정치적 토론을 봉쇄하며, 건강한 여론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의료대란은 의사들의 집단적 반발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그 잘못은 모두 정부에게 돌려지며, 탈세의 주범인 언론사 사주들이 세무조사가 정치공세라고 반격하면서 면죄부를 받게 된다.

냉정하게 보면 대다수의 대구, 경북 사람들은 지난 ‘경상도 정권’ 시절에도 별로 혜택을 입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전라도 사람들은 ‘전라도 정권’ 하에서도 별로 이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군사정권이 대구의 서민들에게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각종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두환 정권이 끝날 무렵 노동자 평균 임금을 보면 광주가 94.7이었고, 대구는 76.5였다. 대구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저소득 계층이 많았다. 90년 당시 월 30만원 이하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서울이 전체의 18.2%였으나 대구는 28%로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90년 당시 대구의 주택 보급률은 48.9%로서 전국 최하위였고 자가 보유율도 전국 최하위인 36.35였다. 문화생활은 더욱 열악하다. 문화시설 및 행사를 보면 대구는 서울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경상도 정권’ 이 대구의 서민, 그리고 보통의 대구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경상도 정권, 전라도 정권이라는 용어 자체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라는 이야기다. 그것과 이해 관계가 밀접히 결부된 사람들이 만들어내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유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외국 농산물의 무차별인 도입, 중국과의 마늘 비밀 협상으로 인한 피해는 전라도 농민이나 경상도 농민이나 다를 바 없다. IMF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칼날은 광주의 기업이나 울산, 대구의 기업에 동시에 불어닥쳤다. 대형 할인점 진입으로 생계의 터전을 잃어버린 동네 슈퍼, 동네 서점, 구멍가게 주인들의 한숨소리는 전라도나 경상도는 물론 전국의 중소도시에서 예외 없이 들려온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하에서 정부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고통이 정부의 잘못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생각한다.

대구 섬유산업의 몰락은 현정부의 대구, 경북 차별정책의 산물이 아니라 섬유산업 자체의 사양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구, 경북지역의 고통을 현 정부의 탓으로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지역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입지를 찾으려 한다. 실제 핵심 권력권에 진출할 기회를 갖는 공직자, 정치가, 기업가들에게는 정권의 교체가 사활이 걸린 문제이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 엘리트층이 만들어낸 지역주의 선동에 경상도의 보통 사람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떤 보도를 보니 대구에서는 온 지역사회의 학교와 학부모가 서울대 몇 명 보내는가에 관심을 갖고서 전쟁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한다. 작년에 비해 대구지역에서 서울대 입학생 수가 몇 명이 줄었느니 하면서 학생들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을 다그친다고 한다. 도대체 대구 지역에서 서울대 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대구지역이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대구에서 서울대 간 사람들이 과연 대구를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했으며, 나라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했다는 말인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지역주의의 분위기 하에서 사학비리 등 각종의 학교의 비리는 그대로 은폐되고, 그냥 평범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도 있는 학생들을 열등의식으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입시교육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은 너무나 분명하기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좋은 일 하려고 몸부림치는 시민단체를 김대중 정부의 홍위병이라고 공격하면, 겉보기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처럼 들리고 지역사회의 공적이 되어버린 김대중씨를 공격함으로써 얻는 정신적 카타르시스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세력, 양심적인 목소리는 이제 설자리를 잃게 되고 지역사회는 더욱 더 황폐화되고 ‘인물’은 사라질 것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수도권 집중과 지방의 소외가 이러한 지역주의에 불을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지방의 소외는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주의 문제, 전주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가끔씩 경상도에 가보면 시장, 국회의원 등에 출마한 사람들의 면면을 듣게 되는데, 이렇게도 사람이 없는가 생각이 들어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정치가 지역주의에 좌우되니 참신하고 양심적인 인사가 힘 있는 자리에 올라설 길이 너무나 막연하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도중하차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비이성적인 지역주의, 증오의 논리에 대구, 경북 지역이 지배되면서 대구의 시민문화, 지역에 대한 진정한 자긍심과 자부심은 더욱 쇠퇴하였다고 본다면 나의 판단이 과장된 것일까? 오늘 대구에서 의병운동, 국채보상운동, 4.19의 전통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면서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사람이 있는가?

일찍이 대구 경북지역은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지역은 전국에서 독립지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적어도 해방 직후까지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 할 것 없이 경북지역과 대구는 민족의 양심, 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그 전통이 60년 4.19까지 연결된다. 멋있는 문인, 예술가, 사상가, 지사, 학자들이 대구에서 배출되었다. 그들은 결코 대구와 경북 지역만을 운운하며 자신의 정신 세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오늘 대구의 젊은이들 중 대구, 경북 출신의 걸출한 문인, 예술가, 사상가, 운동가들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대구와 경북은 보수적인 지역이지만 그 보수는 엄정한 원칙과 자존심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결코 증오와 배타의 논리에 지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시정의 아낙네에까지 침투되어 있는 이 지역주의라는 중병은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의 내용이 없는, 아무런 방향과 원칙이 없는 생각의 찌꺼기는 아닌가?

대구는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3년이라는 극히 중요한 시기를 보낸 고향과 다름없는 곳이다. 나는 청운의 꿈을 안고 대구에 와서 계성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산 기간은 어언 25년이 되었지만, 대구에서의 3년은 그 이후 서울에서 살았던 기간의 1/8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내 정신세계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10대말이라는 인생의 극히 중요하고 예민한 청소년 시기를 바로 대구에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대구에 올 일이 있어서 옛날 하숙하던 서현교회 근처 남산동, 밤늦게 학교에서 내려와 데친 오징어 먹던 서문시장 골목입구, 유도복 체육복 옆에 끼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들어가던 계성학교 정문, 아직도 변치 않은 중앙통 네거리, 한일극장 옆, 소풍갔던 화원 유원지 등을 차를 타고 지날 때면 자꾸 주변 거리를 살펴보면서 설레이는 가슴이 억누르고 한다.

그러나 이성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대구는 나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는 대구와 경상도를 잊어버렸다. 서울생활에 적응하기 바빠서 잊어버린 점도 있지만 이제 동년배의 대구, 경상도 사람들과 만나는 일보다는 타 지역 출신자들과 더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에 대해 정신적 거리감을 가진 더욱 중요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궤적이 ‘보수의 아성’으로 변해버린 대구의 그것과 점점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경상도 사람이다.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상도의 옛 문화를 나름대로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 동안 정착한 이 지역주의 정서와 문화는 싫어한다. 이 작은 나라에서 경상도, 전라도 가리는 것이 못마땅할 뿐더러 나라를 망칠 풍조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계성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계성학교 출신끼리 뭉쳐서 우리끼리 뭐 좀 해보자고 제의하면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학계의 계성학교 출신 선후배끼리 만나는 일이 가끔 있다. 나는 그러한 만남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즐긴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간의 사귐은 얼마나 인생을 훈훈하고 풍요롭게 해주는가?

시민단체와 학계에서 활동하다 보니 여러 모임, 강연자리, 회의 등에 참석할 일이 많은데 어떤 때는 모임이 끝난 이후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가 다가와 “선생님 계성 나오셨지요. 제가 계성 00회 졸업생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후배들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내가 계성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알지만, 내가 지역이나 출신학교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반가우면서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후배들을 만나면 정말 기분이 좋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자고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까지 25년간 서울에서 살면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이익과 불편함을 느낀 적도 있다. 내가 활동하는 범위 내에서 고등학교 선후배를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대구가 내 생활터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구를 그리워한다. 나이가 40줄에 들어온 이후 그리움은 점점 더해간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이 편협한 지역주의가 사라진 대구, 비리 사학재단 이사장, 부패한 시장, 악덕기업주가 더 이상 지역의 대표로 행세하지 않고, 양심적인 인사, 정의롭고 소신 있는 시민,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대구, 그런 건강한 대구를 그리워한다. 그런 대구와 대구사람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고 싶다.  

‘아줌마’, 개혁당 지구당위원장 되다
이지숙씨, 서울 서초을지구당에서 선출

임순혜 기자 smccc@hitel.net  

지난 12월 1일 오후 5시 개혁국민정당 서초을 지구당 창당대회에서 ‘평범한 아줌마’ 이지숙씨가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남성들의 주무대였던데다 이렇다할 사회활동이 그다지 많지 않은 ‘정치신인’ 이씨가 정당 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은 우리 정치사에 또하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창당대회 선언을 하던 사회자는 창당개회선언 발언이 미숙하여 세 번씩이나 “지금부터 개혁국민정당 서초 을지구당 창당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를 반복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개혁 국민정당’을 한번은 ‘국민 개혁정당’이라고 하여 참석자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세번째에서야 무사히 창당 개회선언을 마친 사회자는 “여러분 당황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또 한번 좌중들을 웃게 만들었다.

생전 처음 정당의 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기자는 그동안 TV에서 보아오던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아닌, 어린아이와 함께 나온 젊은 부부들과 여성, 20대와 30대 남성들의 화기애애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보고 우리의 정치풍토가 바뀌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또 한 번의 폭소를 자아내게 한 것은 국민의례 순서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치고 애국가를 부르는 순서였는데 사회자는 “애국가는 앉아서 부르나요? 서서 부르나요?”하고 좌중들에게 질문을 하여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였다.

이날 서초 을지구당 창당식에는 유시민 대표와 고은광순님, 손이덕수 여성위원장 등이 참석해 두번째로 개혁국민정당의 여성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지숙씨를 축하했다.

유시민 개혁당 대표는 “개혁국민정당의 창당대회를 보고 누가 정당이라고 하겠느냐?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동호회라고 할 것이나 정당의 참모습은 이런 것 아니겠느냐?”고 하여 새로운 정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하였다.

한 남성 당원이 “우리 여왕개미 서초을 지구당위원장을 앞으로 남성 일개미들이 잘 보필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어느 정당의 창당대회 못지 않게 믿음직스러웠고, 또 정겨운 창당대회 풍경이었다.

▲ 개혁당 서초을 지구당 창당대회.  

서초을 지구당 위원장 이지숙씨는 평범한 주부로 평소 시민운동에 별다른 경험이 없는 ‘아줌마’였다.

이씨는 재작년에 언론개혁 바람이 불 때 ‘조선일보 바로보기’ 강좌를 들은 후 ‘안티조선 운동’을 열심히 해왔으며, 또 민화련 지도위원을 지낸 정도다. 그 외 시인으로 활동한 것 이외에 특별히 눈에 띠는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은 없다.

노래패 ‘아줌마’의 축가에 이어 유시민 대표의 강연이 있은 후 창당대회는 참석한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름으로써 마감했다.

개혁국민정당은 낡은 정치, 구태 정치를 청산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바꾸자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정치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당비를 내는 개미들의 당을 표방하고 있다.

창당대회를 마친 이들이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둘러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의 정치실험이 따뜻하다는 느낌은 아마 나만의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발 발표된 개혁국민정당 서초을 지구당 창당선언문은 시인이기도 한 그녀가 직접 지은 시였다.

서초을 지구당 창당 선언문

오늘, 오랜 침묵의 얼음장을 가르고
거룩한 분노로 떨치고 일어선
서초을 개혁당 동지들은 선언하노라

우면산, 양재천,
산 좋고 물 좋은 서초의 옥토가
탐욕스럽고 게으른 지주와도 같은
딴나라당 무리들의 텃밭이 되어
황폐화됨을 더 이상 용납할 수는 없다.

법원, 검찰청, 예술의 전당,
안기부, 조달청, 학술원,
위풍당당한 외형 속에
굳을 대로 굳어진 관료들과
물질적 추구와 이기심에 병들어가는 시민들에게
신선한 정치문화 혁명의 세례를 퍼붓고자
우리는 결의하노라.

작금의 서초구는 묵정밭이다.
잡초투성이 굳은 땅을 갈아야 한다.
우리는 결연히 선언한다.
서초구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각자 서 있는 위치와
바삐 움직이는 자리에서
스스로 깃발이 되고
스스로 불꽃이 되어
아니,
묵정밭을 뒤 엎을 폭탄의 도화선이 되어
기필코, 서초의 땅을, 숨쉬는 비옥한 땅으로 가꿔
인간다운 삶,
평화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 것을
두발은 굳건히 땅에 딛고
드높은 정신, 하늘을 우러르며 선언하노라

모두를 살리는 살림의 정치,
모두가 함께하는 참여의 정당,
이 새롭고도 새로운
개혁당 서초을지구 창당을 선언하노라.

2002년 12월1일 개혁국민정당 서초을 지구당 당원 일동

나는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씨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나는 이번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를 우리나라 정치사의 일보전진으로 평가하면서 그 와중에 노풍(盧風)으로 대변되는 국민들이 보여준 변화와 개혁에의 염원의 출현에 가슴 깊이 고무 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노무현 씨 개인에게서 진실한 인간의 양심과 솔직한 용기를 수차례 목격한 바 있으며 결코 그를 가리켜 ‘좌파’니, ‘위험한 사람’이니하는 류의 수사(rhetoric)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썼던 글 중 ‘정태춘과의 만남들’이라는 졸문(拙文)에서도 잠깐 묘사한 대로 개인적으로 나는 노무현 씨와 눈물바람으로 껴안은 적도 있었고, 그가 87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정주영 씨를 몰아붙이는 장면을 중학교 2학년의 새가슴으로 쳐다보면서 콩딱댄 적도 있었으며, 3당야합하던 통일민주당사에서 끝끝내 반대를 주장하다가 입이 틀어막혀졌던 그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어느 국정조사장인지 명패를 집어던졌다가 눈물을 뚝뚝 털어트리면서 민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사과하던 그를 아마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 씨의 등장으로 정치에 환멸과 조소만을 보내던 젊은이들이 다시 일간지에서 정치면을 읽기 시작했고, 어느 지하철 가판대에서는 한겨레가 동이 나자 ‘조중동 같은 쓰레기를 어떻게 사 보겠냐’는 한 30대 직장인의 짜증을 우연히 목격하기도 했다. 비록 민주당이라는 지역정당에서 영남이라는 지방색을 토대로 ‘또 다른 의미의 지역주의’라고 맹공 당하는 그이지만, 나는 그가 지역주의의 균열에 일조할 것이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하기도 하고, 그가 선택한 유효정치력으로써의 양김 민주화세력의 ‘민주대연합론’에 대해 선거라는 제도정치 내적 변수을 감안할 때, 일정 정도 긍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노무현 씨를 지지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결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노무현 씨를 지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현 정세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이 함의하고 있는 ‘노풍’의 긍정적 의미를 존중한다. 그것의 본질은 온갖 매체들이 긍정을 하든, 반박을 펴든 간에 분명히 이 땅의 민중과 시민과 국민들이 한국정치에 보내는 일종의 희망과 변화에의 요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다시 보아 일면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노풍의 긍정적 해석은 유효하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들의 염원이라는 것은 현 집권당인 민주당에게 있어 ‘정권재창출의 발판’으로만 유효할 뿐이다. 다시 말해, 국민들의 변화를 주창하는 집단적 요구가 집권당에게는 절호의 찬스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발전노조가 민영화되는 걸 반대한다고 거리로 몰려나오니 명동성당 근처나 종묘공원 근처에는 김밥이며 생수를 파는 아줌마들이 저마다 다라이며 아이스박스를 이고지고 모여드는 격이다.

이것은 단지 이용과 변용, 활용에 불과하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적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외세의 침략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염원을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지배구조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활용한 것이라든가, 대통령 간선제로 대변되는 독재와 반민주의 지배구조를 거부하고 변화하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표면적인 직선제로 수용하고 일정한 타협으로 마무리했던 신군부 출신 지배블럭의 경우는, 늘 역사 속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민중의 요구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악함과 간교한 혜안을 두루 섬렵하고 있다.

노무현 씨를 지지하는 일은 결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일이다. 나는 전라남도 영광 태생의 호남본적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첫째는 지역주의라는 통치수단을 온몸으로 거부하고자, 둘째로는 지배질서가 구축하고 있는 기존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는 명백히 민주당에 반대한다. 내가 갖고 있는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감과 민주당이라는 집권세력의 일각에의 반대는 모순된다. 만일 노무현 개인에 대한 인기투표라면 나는 응당 노무현을 좋아한다는 쪽에 내 한 표를 행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민주당이 의도하고 있는 ‘집권의 연장’의 한 도구로 등장하는 투표라면 나는 노무현이라는 빈칸에 머무를 수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이회창을 지지하느냐고. 물론 천부당만부당한 질문이다. 노무현이 은근한, 혹은 불가피한 지배세력의 도구라면, 이회창은 노골적인, 그리고 뻔뻔해 마지않는 지배세력, 그 자체다. 당연히 나는 이회창의 당선을 꿈에도 그리지 않으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는 아직도 만연되어 있는 ‘인물 중심의 선택양상’이다. 이승만이가 박사니, 신익회가 양반출신이니,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이니, 김대중은 호남의 자존심이니, 김영삼은 인격자니, 이회창은 대쪽이고,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라는 등의 인물론은 저잣거리마다 모여서 곰방대나 놋쇠재떨이에 툭툭 털던 갓쓰고 도포차림의 할아버지들의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는 전쟁이다. 지배세력과 지배블럭 내에서 소외된, 또 다른 지배세력의 일각이 명시적인 헤게모니를 쟁탈하고자 벌이는 무혈의 전투다. 거기서 아이콘과 기호화되어 등장하는 일개 후보 자체는 제 나름대로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흡사 밤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타이타닉 호는 이 작고 허연 빙산 조각만을 봤다가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노무현이나 이회창이나 모두 어떤 group의 아이콘에 불과하다. 노무현이 당선되면 노무현만 당선되는 게 아니라 민주당 전체가 당선되는 것이고, 이회창이 당선되면 한나라당 자체가 집권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학교 3학년만 되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한 번 선거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하고 인물 개개인에 대한 온갖 평가와 반론, 역공이 난무해지고 나면 전국민은 이를 망각하고 만다.

문제는 어떤 집단을 집권하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게 관건이다. 정확히 말해 ‘노무현 집단’을 밀어줄 것인가, 아니면 ‘이회창 집단’을 밀어줄 것인가로 고쳐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핵심이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몰정치적인 인물 개인에 대한 호불호에 갇혀 횡행하고 있다. 그게 아직까지의 한국 정치의 수준인 것이다.

물론 홍세화 씨의 말씀 맞다나 노무현 씨가 당선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와 진보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노무현 씨가 신자유주의가 강제되고 아직도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남북의 소통을 추진해야 하며, 노동자와 자본가 중 어느 편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말하자면 지극히 제한된 객관식 앞에 서 있기에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퇴보와 반동을 최대한 막는 일이며 그가 소속된 집단의 속성상 근본적인 변혁은 꿈도 꿀 수 없다는 말에 일정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과 이회창은 다르다. 그것은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다른 만큼 다른 것 같다.

이런 말도 있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행된 과정도 결국에는 진전이 있었고,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간 것도 나름대로의 변화가 있었으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서 바뀐 것도 있었으니,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가는 것이 거시적으로 볼 때 단계적, 점진적으로 진보가 아니겠느냐고. 일리는 있다. 다만 십리나 백리, 천리, 만리는 없지만.

이쯤에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사항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현재의 남한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정말이지 무엇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분단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신자유주의의 맹공이라고 읽고 있다. 꼬뮌의 땅, 프랑스조차 극우 국민전선의 당수인 장마리르뺑이 결선투표에 진출할 정도로 유럽이 우경화되고 있고,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반쯤 미쳐돌아가고 있으며, 결국에는 중국공산당마저 자본주의의 경쟁과 효율을 도입하고 있는 이 마당에, 삼성과 현대, SK를 비롯한 사기업들의 대주주가 모두 외국자본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공기업뿐인 이 땅에서 철도와 발전소까지 다 팔리는 이 마당에, BMW는 예약이 하도 밀려 있어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무지랭이 민초들이야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은행강도니 부녀자연쇄살인이니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어야만 하는 이 나라에서 50년만에 만나 억장이 무너지는 이산가족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나는 노무현을 지지할 수 없다. 물론 나는 당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집권할 가망은 없겠지. 그리고 집권할 능력도 아직은 없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한 표를 민주당의 후보에게 행사할 수는 없다. 내가 이번 대선에서도, 다음 총선에서도, 계속해서 민노당을 지지할 때,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생존해 나갈 때, 나는 내 희망의 근거를 일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그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다 하여 내가 그 친구를 정말 우애한다고 나의 정치적 신념에 역행되는 선택을 할리 만무한 것처럼.

나는 우리 모두가 어서 빨리 과거의 인물론 만담에서 벗어날 것을 원한다. 핵심은 이렇다. 보이지 않는 배후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노무현은 빙산이 수면 위로 돌출시킨 일각에 불과하다. 설사 내 한 표가 노무현을 패배시키고 이회창을 당선시키는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할 지라도 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다. 내가 현재의 지배세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