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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젝이 항상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생각을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몇 년을 떠나 보내 있어서인지도.
아니, 생각하는 데 게을렀던 시간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레비나스라는 양반은 진중권의 디빠 비판은, 똘레랑스와 비평의 합리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는 진짜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말인 거 맞겠지?
그리고 그 문제 중 하나는 디빠를 의식화된 다중으로 제대로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다중이 되기 위해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대중이 다중이 되기 위해, 다시말해 주체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고맙게도 링크로 찾은 캐즘님의 블로그 글은, 관용-똘레랑스라는 가치가 타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동일자의 질서 유지 기능을 한다는 내용은 정말 생각해 보게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타자가 주체의 (환상으로 유지되는) 일관성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그럼으로써 타자를 규율하고 지배적 질서를 유지한다.
그 규율의 한계를 넘어서는 타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똘레랑스는 보수적이라는 거다.
타자의 주체에 대한 파괴적 본성은 똘레랑스가 넘어설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두운 타자’, 즉 주체를 붕괴시키는 진정한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7-80년대 학출 노동자처럼 타자 속으로 뛰어 들어서 자신의 주체를 ‘죽이고’ 난 후 만들어지는 주체의 가치를 얘기한다. 이게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지만 아직끼지도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나를 괴롭히는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인가?)
팔레스타인 저항단체의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한 푸코의 발언이나 프랑스에서 벌어진 폭동 사례를 똘레랑스가 실패하는 예로 들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주변부 국가들의) 테러에 대한 (중심부 국가들의) 세계적인 반대 연합도 세계 공존이라는 똘레랑스를 얘기하면서-동시에 타자들의 치명적인 반항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중심부 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는 전략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도 똘레랑스를 어떤 도덕적 선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소수 의견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똘레랑스는 내가 의도한 문제의 근원을 끄집어 내지 못하도록 봉합해 버리는 것 같은 찝찝함을 남기고는 했었다.
그런데, 책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ㅡ.ㅡ;

재영은 자신을 바수밀다로 불러달라고 한다. 매춘으로 남자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는 바수밀다처럼 그녀도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떤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롤리타 컴플렉스에 빠진 남자들의 죄의식을 달래 주는 종교적 실천. 재영은 그래서 남자들에게 진짜 웃음과 사랑을 준다.
하지만 늙은 아비들은 이중적이다. 욕망은 밑에서 흐르고 있지만 위에서는 없는 채 한다. 누구에게나 그 욕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든 없어야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영의 종교적 실천은 이 남자들에게 몇 시간의 안식은 될지언정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있어야 한다. 재영과 잔 남자들은 그 순간만큼은 안식을 찾고 그녀를 위해 기도하겠다 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순간 재영이 찾은 그 오빠, 음악하는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볼 생각이 전혀 없다. 재영의 자발적, 종교적 실천은 몇 시간의 기적을 보인 후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남자들이 보기에 재영의 웃음은 젤 소미나의 그것이고 재영이 한 일은 매춘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사마리아인, 타자는 아버지의 욕망을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은 재영을 (존재론적으로) 모방하게 된 여진이 만난 한 남자는 그녀의 웃음에 화를 낸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진이 그 남자를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다음 숏은 건너편 여관의 어느 방 침대에 있는 한 여자의 시체다. 이 남자가 여진에게 ‘들켜버린 것’에 대한 상징적 응징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바로 다음 이어지는 여진이 아버지의 사적인 복수에 대한 표지이기도 하다. 여진의 아버지는 이 혐오스러운 욕망으로 자신의 딸이 이렇게 해꼬지 당했다고 생각하고, 고스란히 그것을 되갚는다.)
재영과 친구 이상의 끈으로 연결돼 있는 것 같은 여진은 재영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여진은 재영이 남자를 만나고 나면 항상 목욕탕에서 씻겨준다. 여진이 이 아름다운 몸을 더러운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한다. 재영은 웃음을 지으며 여진에게 입을 맞춘다. 재영의 섹스는 구속되지 않는다.) 재영이 섹스를 나눈 남자들을 찾아가 같이 자고 돈을 돌려준다. 여진은 성적 희열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댓가, 돈에 새겨진 죄의식 때문에 남자들이 재영을 지우려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들이 건내 준 죄의식의 물적 증거마저도 돌려주고, 여진은 재영의 행위를 온전히 돌려놓고자 한다. (어차피 남자들은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지젝은 이것을 (유일한) 윤리적인 행위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의 행위를 가로막는다.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이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됐지만 사실은 진짜로 알지는 못한다.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이 젤 소미나처럼, 아니 여진이 하고 있는 일을 처음 목격하게 된 여관방의 여자 시체처럼 더러운 남자들에게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 처벌을 철저하게 진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형사다) 그는 사적 처벌을 감행한다. 남자들이 여진과 자는 것을 매번 훼방 놓던 아버지는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다.
김기덕은 매춘과 롤리타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난 다음 반대편에서 그것에 대한 혐오를 또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한쪽은 아버지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 용인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 다른 한쪽은 아버지의 질서가 숨기고 있는 것을 꺼내놓기 위한 (법이 용인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 여진의 아버지는 법의 처벌을 받기 위해 범인으로서 경찰차에 올라탔고 여진은 처음 운전대를 잡고 애타게 아버지를 쫓아가 본다. 여진의 소나타는 얼마 못 가 멈춰야 했지만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멈춰 선 소나타를 지켜본다. 끝까지 남은 것은 여진의 소나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