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산드라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정상’의 궤도로 도약할 수 있는 건강함과 투명함이다. 반면 미셸은 레오나드처럼 우울의 세계에 침잠한 자이며 결여 그 자체이고, 레오나드의 거울이다. 레오나드가 산드라의 끈을 놓지 못하면서도 미셸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산드라가 레오나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상대라면, 미셸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게 하는 존재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의 과거와 상처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를 정작 두려운 매혹에 빠뜨리고 뿌리칠 수 없게 하는 사랑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고 실패를 예견하는 자기파괴적인 것이다. 그에게 미셸이 병든 자신 자체라면, 산드라는 그런 병든 자신을 보게 하는 눈이다.

씨네21 940호 신전영객잔, <투 러버스>, 남다은

Inside Llewyn Davis한국 개봉 제목은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나는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가 더 좋다. 이 전체 제목에서 리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 중 르윈 데이비스의 앨범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에 원제 그대로 쓰는 게 더 좋았을텐데.
이 영화를 작년 부산영화제 때부터 기다려 왔는데 정식 개봉하고도 한참 지나 보게 됐다. 그 동안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 봤다. 짧은 글 안에서 무엇을 제대로 읽겠냐마는,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와 함께 하는 뉴욕의 어느 가난한 예술가의 지난한 고난에 대해 (팬시한 느낌을 실어) 동정을 표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들과 비슷한 심정으로 영화를 지켜 봤고, 쓸데없이 말을 보태는 일이 되겠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조금 써 본다. (쓰다 만다는 쪽에 가깝지만.)

르윈 데이비스는 100분 내내 고난에 시달린다. 소속사마저 음반을 창고에 쳐박아 둘 정도로 대중적으로 인기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동료 뮤지션의 소파를 전전하는 처량한 신세 속에서 무엇인들 잘 풀리겠는가.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이는 비관적 정서는 르윈 데이비스가 부르는 노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르윈 데이비스의 고난에는 자초한 형벌 같은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농담 같은 공상이지만 저주 받은 형벌 말이다. 가스등 카페 뒷골목에서 르윈이 어느 중년 남자에게 얻어 맞고 대학 시절 지도 교수였던 것으로 보이는 어느 교수의 집을 찾아 하룻밤을 신세 지고 일어나 집을 나서는 시퀀스는 몇 가지 변주만 가했을 뿐 거의 동일한 반복으로 보인다. 시작과 결말의 반복 사이에 르윈의 고난이 배치돼 있는 셈인데, 이 반복이 르윈 데이비스의 고난을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뉘앙스로 곱씹게 한다.
르윈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시카고로 가려 하고, 교통비도 부족해서 존 굿맨의 차를 얻어 타게 된다. 시카고로 향하는 동안 존 굿맨은 요지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수다 중에 흑마술로 르윈 너에게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는 황당한 얘기도 하는데, 르윈은 도로 가운데 시동도 걸 수 없는 차에서 존 굿맨과 (교수의 고양이 율리시스로 오인된) 고양이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간다. 이 때 나는 그 농담 같은 저주를 떠올렸다.
르윈의 처지는 자신마저 책임 지기 버거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매순간은 책임 져야 할 과제의 연속이다. 아빠가 누구인지 불확실한 진의 아기와 전 여자친구가 낳아 키우고 있는 자신의 아이, 고양이 율리시스와 율리시스로 오인된 고양이, 도로 가운데 홀로 남겨진 거동도 불편한 존 굿맨, 그리고 어느 중년 여성의 노래에 대한 모독에 대한 대가까지. 사실 고난이라는 것은 책임 지기 버거운 일을 떠맡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르윈 데이비스에게 내려진 저주는 가난과 무력, 피로, 그리고 이로 인한 자기 분노의 무작위적 표출이 감당할 수 없는 자기 책임 속에서 반복 순환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예술(과 예술가)에게 내려진 저주의 고리를 르윈 데이비스는 결코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그는 아버지에게 한 곡 불러 주면서 자신의 외면 받는 노래가 어떤 이에게는 고유한 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스치듯 음미해 볼 수 있을 뿐일 테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대신 가난에 대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가끔 찾아올 수 있을 뿐일 것이다.

llew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