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클럽>

소마이 신지의 <이사>에서 렌은 쉼 없이 달린다. 렌의 멈추지 않는 질주에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건에 저항하고 부모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간절함, 부모에 대한 사랑과 원망 같은 것이 뒤섞여 응축되어 있다. 아빠가 올라탄 트럭을 쫓아 기필코 따라잡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긴 내리막의 위태로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달리기의 격렬함으로부터 렌의 마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의 에너지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다는 맥락으로 렌의 달리기를 이해해 보려는 것은 충분히 사려 깊지 않은 시도이겠지만, 렌의 지치지 않는 격렬한 몸짓을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데에는 그 나이의 에너지가 지닌 특별함이 근거가 될 것이다.

소마이 신지는 청년과 아이들이 지닌 에너지의 과잉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인물의 에너지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전략으로 보인다. 달리 말해 소마이 신지는 인물의 에너지가 얼마나 지치지 않고 분출되는지 보여 주기 위해 분절되지 않은 롱테이크를 불가결하게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커트 없는 한 쇼트의 시간 속에서 카메라와 인물이 에너지의 우열을 두고 대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풍 클럽>에서 가출한 리에가 도쿄 어느 낯선 남자의 2층 집에 들어가 대화하는 3분 가량의 롱테이크 장면에서 카메라는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공간 이동을 구사한다. 남자와 리에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2층 높이로 이동한 카메라가 집 내부의 인물을 천천히 응시하는 이 장면은 카메라와 리에 중 누가 누구를 규율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의 긴장과 격랑을 느끼게 만든다. 가출 이후 다음 단계의 충동적 상황. 리에 스스로 한 발 더 들이고 있는 것인지 카메라가 리에를 추동하는 것인지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태풍 클럽>에는 이 같이 카메라와 인물의 통합적 운동 롱테이크의 예를 들 만한 장면이 풍부하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이 영화에서 다른 예를 언급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특히 폐쇄된 학교에서 켄이 미치코를 추격하는 폭력적 시퀀스는 더욱 그렇다. 이 롱테이크 시퀀스를 장면 자체의 영화적 에너지만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해서 위험한 접근이다. 이 장면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면과의 관계로 확장하고 영화 형식 바깥의 준거로 빠져 나와야 한다.

이 시퀀스는 영화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윤리의 상징적 질서가 소거된 순수한 충동의 재현’이 모순적 기획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단지 그 장면이 성폭력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거나 켄의 미치코에 대한 욕망이 폭력적 충동으로 전도되어 표현되는 것에 대한 허용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켄의 폭력 충동을 폭발시키고 난 후 이 영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화시키는 태도의 문제를 이 시퀀스에 대입하여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영화는 이 폭력을 단순히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미치코와 가해자인 켄 두 인물의 기억을 지운 채 서로 어울리게 만든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묻는 미카미에게 피해자 미치코가 사건을 부인하게 만든다. 영화가 미치코에게 개입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 주장 강한 미치코의 부인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까. 이 때문에 미치코는 영화 내적 원리로 소모되는 희생자가 아니라 영화로부터도 폭력적 피해를 입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태풍 클럽>이 재현하는 것을 태풍의 격렬함 속에서 발현되는 광기, 순수한 충동이라고만 의미화하면 안 된다. — 그것을 영화적 형식과 그것이 야기하는 감각의 효과 안에서만 의미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의미화에는 책임이 따른다. — 여기에는 반드시 재현에 성적 불균형이 자리하고 있음을 단서로라도 명시하고 질문을 남겨야 한다. 왜 켄은 윤리적 선을 넘고 리에는 그 앞에서 멈추는가. 또는 왜 미치코는 켄에 대항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광기의 춤으로 휩쓸려 들어가는가. 태풍의 광적 정동이 불평등하게 작동하는 이 모순적 징후를 영화는 어떻게 책임지고 있는가.

나는 <태풍 클럽>이 내적 모순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드러내는 인물들의 충동적 에너지가 잉여적이라고 느낀다. 미카미의 화두 ‘개(個)는 종(種)을 초월할 수 있는가’가 그의 자살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허망한 과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충동적 에너지는 윤리에 도전하기는커녕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구속에 대한 신경증을 피상적으로 표출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한 1985년 당시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지금의 맥락에서 이 영화는 비판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나 현재적으로 체험되는 영화는 언제나 현재를 당대성으로 삼아 현전하기 때문이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지닌 에너지를 경험하고 싶다면 나는 차라리 <이사>가 더 나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렌의 에너지는 일그러져 분출될 때조차 구체성을 잃지 않는다. 영화적 비약도 허용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사>는 자신이 일으킨 사태를 감당하고 책임진다.

지난 주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읽은 감흥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도넛의 구멍이 아니라 도넛을 보라던 데이빗 린치의 말이 새삼 내 어리석음을 성찰하게 만든다. 어쩌면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간명한 지혜의 말이다.

<서브스턴스>

나는 <서브스턴스>를 두 번 보기가 두렵다. 어떤 영화는 재현하는 이미지가 관객인 나의 시선에 침투해 들어오고, 욕망을 지배하고, 상처 입히기도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쪽에 가깝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이 영화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대상화의 폭력을 반어적으로 풍자하거나 성찰하게 만든다는 해석에도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반대로 그 폭력적 시선이 엘리자베스와 수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대상화의 폭력에 길들여진 안타까운 희생자라기보다, 대상화된 여성의 외설적 향락 그 자체를 체현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는 신체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파편화한다. 이는 단지 수의 젊고 아름다운 몸에 한정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피부의 주름을, 등 피부의 찢어진 틈을, 주사를 꽂는 팔뚝을 극도로 클로즈업한다. 몬스트로 엘리자 수의 놀랍도록 혼재된 신체 기관도 그렇게 확대된다. 나는 영화의 이런 여성 신체에 대한 태도가 페티시즘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육체의 물질성 수준으로 끌어내려 고찰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은 여성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을 극대화하는 방식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영화가 단 하나의 동력으로 삼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욕망에 관객인 우리가 연루되면서 페티시즘적 시선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페티시즘, 물신주의적 숭배,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것을 갈구하는 주체이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엘리자베스와 수, 그리고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느끼고 있을 것 같은 수치심이나 허영심에 우리가 연루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극도로 확대된 수의 엉덩이에 돌기 뭉치가 튀어나올 때, 또는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무대에 올라 피의 향연을 벌일 때 이것은 단지 외모주의와 페티시즘의 내적 균열 또는 외적 응징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 장면은 끔찍한 충격을 창출할 의도를 지니고 있고, 실제로 외모주의와 페티시즘에서 연유할 극도의 수치심과 불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의 괴물성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감정에 전이되지 않고 그 장면의 공포를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공포는 여성 혐오 세계 내부의 작동 원리에 가깝고, 그 에너지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몬스트로 엘리자 수를 관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자기 파괴가 안타깝다는 마음을 쉽게 놓쳐 버린다. 그것은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던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신체 기관이 해체되고 한 줌의 덩어리만 남아 소멸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상찬받는 환상에 빠져 있는 인물을 동정하기는 쉽지 않다. 오로지 그는 괴물이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이것은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효과를 인용한다면) 끔찍한 풍자이며 실패한 미러링이 아닐까. 그리고 이 때문에 반대로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공고함 앞에서 벌이는 피지배자의 무력한 자학의 징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징후적 독해가 이 영화에 대해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이해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상상은 차라리 구태의연한 버전이 아닐까.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원귀로 구천을 떠돌며 누군가를 해하는 것. 물질 이상의 환상을 투사해 온 대상-주체를 한낱 물질로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괴물의 자기 소멸 이후에도 이 세계에 반드시 돌아오는 치러야 할 대가가 존재함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