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대 신문(94. 10. 20)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의 생애와 사상

안상헌(충북대 철학과 교수)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우리에게는 ‘열린 사회’라는 유행어를 가져다주었던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92세의 나이로 지난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포퍼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주요 저작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같은 제목의 소설이 등장하면서 ‘열린 사회’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철학계에서는 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저술 {탐구의 논리}(1934), {역사주의의 빈곤}(1945), {추측과 반박}(1963)과 {객관적 지식}(1972) 등을 중심으로 과학철학과 사회철학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포퍼가 평생을 바친 철학적 문제는 지식이론에 관한 것으로 ‘과학적 지식’이 ‘과학적인’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며, 사회철학에서는 이를 토대로 ‘비판적 합리주의’와 ‘부분적 사회공학’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1. 포퍼의 생애

포퍼는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유태교인이었으며 포퍼의 어린 시절 기독교로 개종했다. 70세 때 씌어진 철학적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상적으로 존 스튜어드 밀의 급진적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지식인이었다. 포퍼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기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면서도 명쾌하게 표현하는 아버지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포퍼는 상당히 조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네다섯 살 때 벌써 깊은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으며, 철학적 문제의식도 12살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차 대전 중에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학교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8년 학교를 떠나 비엔나대학의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22년 정식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을 두루 수강했으나, 수학과 이론물리학 강의를 제외하고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한 때 그는 철저한 육체 노동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육체 노동에도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육체의 허약함으로 인해 번번히 좌절되었다. 22년 대학을 졸업, 초등교사 자격증을 획득했으나 자리가 없어 졸업 후 2년 동안 캐비넷 제작 견습공 생활을 했으며, 후에는 고아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얼마간 종사했다. 그러다가 1925년에 교육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28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9년에는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자격증을 획득했다. 이 때 그는 동료 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30년에 결혼하였다.

1929년부터 쓰기 시작한 {인식론의 두 가지 문제}는 32년에 완성되어 비엔나 학파의 [과학적 세계관 총서]로 발간하기로 하였으나, 240쪽 분량으로 요약하라는 요청을 받아 요약본 형태로 34년 {탐구의 논리}로 출간되었다. {탐구의 논리}가 알려지자 영국의 캠브리지, 옥스포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초청하기 시작했으며, 런던 경제정치대학에서는 하이에크 교수의 세미나에서 [역사주의의 빈곤]을 강의했다. 그 후 캠브리지 대학과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의 철학교수로 동시에 초빙되었으나 뉴질랜드로 가기로 결정하고, 37년 3월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35살에 이르러서야 철학교수가 된 그는 인식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38년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다시 침공하자 뉴질랜드에 머물면서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출판했다. 46년 1월에 하이에크의 주선으로 런던 경제정치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49년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 정교수가 된 이래 정년퇴직 때까지 교수로 일했으며, 은퇴 후에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런던 근교에 살았다. 은퇴 후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1. 과학과 사이비과학

포퍼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들러 등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과학이론과 사이비과학의 구분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 당시 비트겐쉬타인과 카르납을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 학파에서는 이른바 ‘논리실증주의’라는 이름 아래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분 기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과학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정립되는 사실명제, 즉 유의미한 명제의 논리적 결합체이며, 형이상학은 경험과 관찰에 기초하지 않는 무의미한 명제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포퍼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이러한 구분 기준에 대해,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형이상학의 과학에 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부정한다는 점과, 의미기준을 둘러싼 비엔나학파의 논의는 새로운 스콜라주의로 경도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포퍼는 자신의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분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 하면 그에게 있어 과학적 지식이란 개별적 사실명제의 귀납적 일반화가 아니라 아직 반박되지 않은 가설적 이론체계로서, 반박되기 전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진리체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참이며 문제해결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하나의 가설적 추측에 불과하며, 이 명제는 반박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만 의미를 지닌다. 즉 과학적 이론을 제기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경우에 나의 이론이 유지될 수 없는지”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비과학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 ‘비판적 합리주의’와 ‘열린 사회’

‘반증가능성’ 혹은 ‘반박가능성’을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기준으로 제시한 그는, 사회과학자로 자처해 온 마르크스주의자나 정심분석학자들에 주목했다. 특히 그의 문제의식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집중되었다. 그는 청년시절 친구의 권유로 사회주의 학생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7살 때 비엔나 시위에서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던 공산주의자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발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 때부터 그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혁명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장이 과연 ‘과학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보다 나은 사회를 가져다준다는 공산주의적 교의의 지식근거가 되는 역사의 발전법칙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덜 폭력적이고 더 정의로운 세계를 원하는 것이 과연 지식에 근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대감에 불과한 것인지를 대해 생각하면서, 일단 복잡한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를 깨닫지 못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무지의 끝없음에 대한 자각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러한 비판에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법칙에 의하면, 역사의 발전과정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토대의 변화로부터 점차 상부구조의 변화로 이행한다는 것인데, 실제 역사과정의 변화를 보면 정치적 결사와 투쟁을 통한 위로부터의 변혁을 통해 점차 토대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통해 반박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반박된다고 주장큁며, 이러한 반박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론은 비판에 견디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비판적 방법의 절차를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불렀는데, 비판적 방법은 곧 사회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며 모든 실천이론은 비판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회적 실천이론이나 방안은 비판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며 신랄한 비판을 끝까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어떠한 이론도 완벽한 이론은 없으며 시행착오를 통해 오류를 제거함으로써 보다 나은 이론, 즉 해결책이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이념의 대전제는 모든 개인이나 집단은 합리성에 입각한 비판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충족시키는 사회를 그는 ‘열린 사회’라 불렀다.

‘열린 사회’는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민주적 절차를 가진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토론과 절차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개혁의 전망을 ‘부분적 사회공학’이라 부르며, 이를 이상주의적 원대한 목표나 꿈을 실현하려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과 구별한다.

그러나 포퍼의 이러한 사회철학은 몇 가지 반박을 견뎌내야 하는 난점이 있다. 첫째는 포퍼가 지향하는 ‘열린 사회’라는 이념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는 수많은 ‘닫힌 사회’가 엄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서도 점진적 ‘부분적 사회공학’이 과연 유효한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역사에 대한 모든 법칙적 설명의 시도를 ‘역사주의(historicism)’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역사이해를 실증주의적 과학관의 한계 안에 묶어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반박가능성’이라는 구분기준이 비엔나학파의 ‘검증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사실적 경험명제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죽은 사실’의 집적이 과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실’에 의한 반박도 과학에 대한 반박으로서는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과학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법칙적 연관을 발견해내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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