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화>

일요일, 다른 식구들은 쇼핑 나들이를 나가고 홀로 집에서 쉬고 있는 히라야마의 집에 유키코라는 여인이 찾아온다. 교토에서 어머니와 함께 료칸을 운영하는 유키코는 히라야마에게 종종 어머니에게 털어 놓을 수 없는 고민을 나누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언을 구하고는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결혼시키기 위해 갖은 잔꾀를 부리며 남자를 만나게 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유키코는 갑자기 날씨가 좋다며 창밖을 지긋이 내다 본다. 곧이어 카메라는 도쿄의 어느 건물을 비추며 유키코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나는 히라야마와 유키코의 대화가 끝나는 방식에 눈이 갔다. 유키코의 날씨 좋다는 말은 풍경 인서트 숏만큼이나 히라야마와의 대화 장면에서 비어 있는 말이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인장 같이 등장하는 풍경 인서트 숏, 소위 필로 숏이 플롯과 플롯 사이에 여백을 배치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지 공백을 지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님을 유키코의 마지막 말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대화에서 물러나는 적극성을 지닌다. 유키코는 히라야마에게 할 말을 모두 마쳤으므로 대화를 끝내려는 것이다. 유키코의 말은 필로 숏의 공백을 의지적으로 호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충분히 비판적으로 독해할 요소들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비판의 날이 무뎌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물러서서 공백을 만드는 효과 때문이 아닐까. 전후 일본에서 가사도우미를 두고 회사 중역으로 지내는 히라야마 가족의 안온함 속에서 자녀의 결혼에 대한 가부장의 감정적 변화가 사건의 중심인 이 영화의 계급적, 성정치학적 층위의 허위의식을 지적하는 것은 얼마간 타당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니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그 한가함 위에서도 다른 감흥을 일으키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이 영화 <피안화>를 보며 떠오르는 것은 욕망의 삼각형이다. 딸 세츠코에 대해 화가 난 히라야마는 유키코라는 매개자를 통해 다른 감정으로 인도된다. 유키코는 자신에게 해 주는 조언을 역으로 이용해 히라야마가 세츠코의 결혼을 승낙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유키코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히라야마를 세츠코의 신혼집에 찾아가도록 상황을 강제해 버린다. 히라야마는 마지못해 응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마지못한 호응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관객은 생각할 것이다. 허용과 화해 또한 히라야마에게 내재한 감정의 가능성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키코는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가능성 중 하나를 끄집어 내 현실화하는 인물이고, 이것은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욕망의 삼각형 구조에 대한 한 가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세계의 이면까지 고찰하도록 이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히라야마는 가부장적 성격 안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집 나간 친구 딸을 대신 보살피고 유키코에게 조언을 하는 것, 딸 세츠코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불화하거나 끝내 화해하기 위해 히로시마로 떠나는 것, 딸들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히라야마의 행위는 모두 가부장적 역할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인물들의 욕망은 문제를 일으키지만 그렇다고 영화는 불안을 내비치지 않는다. 문제가 파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봉합하기 위해 인간이 할 일이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감정의 변화는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특별하지 않은 인물과 대단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적절한 거리감, 이를테면 상상된 동일시의 시선을 만들지 않는 반듯한 정면 인물 쇼트 같은 것들이 이 영화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고 관계와 감정을 응시할 여유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적 세계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적 양상을 관찰하는 인류학자의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것처럼 느껴진다.

2025년을 돌아보면, 나는 영화가 보여 주는 기호가 영화 그 자체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고 문제적으로 느끼는 중이다. 특히 영화에 사회적으로 관심 받는 의제의 기호가 기입되어 있으면 더욱 그렇다. 의제적 기호만으로 지지 받는 영화들은 문제적이다. 순수한 영화적 경험을 상찬하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기호적 권위를 상찬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나는 그게 맹목적 열정이 아닐까 하는 경계심이 든다. 영화가 기호를 어떤 맥락과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관객에게는 필요하다. <피안화>는 의제적 기호 영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유독 기호적 독해를 멈추고 그것이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표면일 뿐이리라 너그러워지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올파의 딸들>

<올파의 딸들>은 가상과 현실의 흥미로운 교차 위에서 시작한다. 올파와 그의 첫째, 둘째 딸 고프란과 라흐마를 대역할 배우가 올파 본인과 셋째, 넷째 딸 에야, 타이시르와 대면한다. 고프란과 라흐마는 국제 테러 조직 IS에 가담하며 집을 떠났다. 대역 배우가 참여하면서 이 가족의 빈 자리는 ‘상징적으로’ 채워진다. 이 상징적 보충은 올파 가족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당사자의 현실과 영화의 가상이 직접적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대역 배우들은 끊임없이 올파와 에야, 타이시르에게 질문한다.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재연할지, 그 때 당신의 감정과 생각은 어땠는지. 영화가 이렇게 올파 가족의 빈 틈에 개입함으로써, 올파와 두 딸은 자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할 도전에 직면한다.

현실은 환상을 통해 구성된다. 이 영화는 환상 장치를 통해 올파 가족이 자기 현실에 대한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가족 당사자 중에서 문제적인 것은 올파이다. 자기 자신의 대역과 대면해야 하는 유일한 인물인 그는 이 영화가 자기 역사의 재구성 가능성을 가장 크게 기대하는 인물이다. 올파는 아마도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모순에 대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얻는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던 올파는 전통적 성역할에 저항적인 여성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의 구획 내에서만 그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올파의 저항은 성역할 구조에서 필요한 국면에 따라 단지 자리 바꿈을 할 뿐인 듯한 한계를 지닌 것 같고, 자신의 딸들에 대해 지나치게 통제적인 면은 올파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수행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런 양육 방식이 고프란과 라흐마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되게 만드는 일상의 씨앗이었음을 이 영화는 당사자의 자기 진술과 대역 배우의 질문을 통해 드러낸다.

인간은 입체적이어서, 모순되는 태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조건이며 자각하기도 쉽지 않다. 그야말로 인간 주체는 다양한 층위에서 상충적인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가 닿는 장소다. 호명되는 주체라는 말이 주체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호명에 응답하는 인간은 저마다의 대가를 치르며, 거기에 우리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책임은 주체의 선택을 초과하고, 이 간극이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고프란과 라흐마가 IS에 뛰어든 데에는 어머니의 책임만 있지 않다. 그것은 부패한 튀니지 세속 정권의 오랜 독재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억압적 이슬람 체제, 가족의 경제적 조건 안에서 조성된 취약한 돌봄 환경 같은 것이 고프란과 라흐마의 경험과 뒤섞여 빚은 결과일 것이다. 고프란과 라흐마, 또는 어머니 올파의 모순은 자신의 모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외부 세계의 모순이 중층 결정된 하나의 양상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염려하게 되는 것은 올파가 끊임 없이 책임의 자기 귀결로 빠질 위험이다. 가족 당사자의 자기 반영적 재현에 집중하는 이 영화가 일으킬 최악의 효과는 아마도 올파의 내적 파국,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책의 지옥일 것이다. 잘못된 신념으로 행한 일에 대한 자기 기각의 수준보다 올파가 감당해야 할 자책은 외상적인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올파는 외상적 자책을 이미 여러 번 반복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올파에게 필요한 것이 자책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는 것, 자신이 호명되는 장소를 전면 수정하는 것, 그러기 위해 그 자리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가 올파의 삶에 개입할 이유가 있다면 이를 돕는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올파에게 할애하는 응시의 지평, 그 폭과 깊이를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가늠하게 된다. 마지막에 올파의 대역 배우는 에야와 타이시르가 억압의 대물림을 끊는 세대가 될 것이라 말하고, 에야는 이 가족이 자신을 망치게 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동안 어머니 올파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다. 환영적 보충물로 완성된 가족의 무대에서 올파의 침묵이 자책과 응시 중 어느 장소의 것인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작은 빛>

예술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청중과 관객 앞에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일회적 순간을 딛고 예술은 오직 현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서 관객과 만나는 현재적 순간이 아니라면 영화를 이루는 다른 것은 그저 셀룰로이드 필름과 그 밖의 것처럼 사물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 영화가 사물 이상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환상도 기억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작은 빛>에서 진무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를 뇌수술을 앞두고 훗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든다. 카메라에 담길 영상은 진무가 잃어버릴 기억의 보충물이다. 진무는 자신이 일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 과정을 제외하고는 흩어진 가족을 만나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카메라 중 영화의 카메라는 진무와 그의 가족에게 벌어지는 변화를, 진무의 카메라는 흩어진 가족에게 한 데 모여 산 과거를, 그리고 말미에 등장하는 진무 아버지의 카메라는 이 가족에게 공통으로 새겨진 기억의 환상적 층위를 현재화한다.

진무는 기억의 누수를 막을 제방인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는 진무의 가족을 다시 모으기 위해 움직인다. 진무가 자신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결핍의 장소가 가족에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운동이다. 어머니 숙녀는 정선에, 누나 현은 시흥에, 그리고 형 정도는 부천에, 뿔뿔이 흩어져 한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 온 것 같은 이들을 진무가 방문하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오랜 폭력이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일견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외상적 기억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충격적으로 제시되는 무덤 속 아버지의 부패한 주검은 이 가족의 상처를 체현하는 끔찍한 물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이 장면을 향해 달려 왔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유일하게 스펙터클한 이 장면은 아버지에 대한 진무 가족의 원망과 증오라는 오랫동안 억압된 감정을 응축하고 있다. 영화는 가족들로 하여금 서로 함께 지낼 수 없도록 만드는 실체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것은 아버지의 주검 뿐만 아니라 가족 각자를 고립시키는 상처에 대한 침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주검을 직접 손에 쥐는 행위를 통해 진무의 가족은 과거 아버지가 자행한 폭력이 입힌 상처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진무의 가족이 직시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가족의 삶을 상처로 지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유령에 대해 아버지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줘야만 한다. 이것이 진무 가족의 현재적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제의이다. 영화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아버지의 관에 나무 뿌리를 박아 둔다. 이장을 포기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주검을 가족이 직접 손에 쥐게 하기 위해. 이는 진무의 뇌수술을 앞두고 흩어진 가족이 재회하는 것이 너무 뻔한 서사이기 때문에, 또는 그것으로는 너무나도 미진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죽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가족을 회복한다는 목적지에 완벽하게 도착하기 위해 이뤄지는 신적 개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암시하는 가족 회복 여정의 이면은 매우 미묘하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복원을 위해 아버지를 벌하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아버지를 희구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검 장면을 이어서, 주검을 담은 상자를 든 진무와 그 뒤를 따르는 가족이 어둠에 갇힌 선산으로부터 빛이 내린 들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빛과 구도가 의미하는 태도를 따른다면 이 영화는 죽은 아버지를 제 손으로 모셔 오면서 비로소 가족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주검의 모습이라 해도 아버지의 자리가 채워짐으로써 다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 상태는 진무의 엄마 숙녀의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무야, 어제 엄마가 얘기 잘못 한 것 같다. 네가 아빠 양복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니까, 네 아빠한테 좀 고맙더라.”

누나 현은 어머니의 피를, 형 정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의붓 남매다. 정도가 숙녀, 현과 왕래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 가족이 흩어진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혼한 현과 함께 사는 조카 호선을 포함해, 아버지의 자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정도를 어머니, 누나와 잇는 가교가 되고, 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증오를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전치시키기 위해 진무가 존재한다. 진무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유일하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모두 물려 받은 진무만이 이 가족을 복구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진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다른 태도를 제공한다. 서로가 혈육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완성시켜 주는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아버지를 진무 자신을 통해 다시금 유추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진무의 뇌수술 예후가 어떠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바로 선산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맞이하는 마지막 시퀀스로 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퀀스가 기억을 잃어버린 진무의 환상인지 실제 벌어진 일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환상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칭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가족을 복원하고 싶다는 것. 어떤 위험이란 이를테면 아버지를 달리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선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에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은 이 같은 분열적 환상을 드러낸다. 진무가 어머니 집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카메라와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참 살펴 보는 이 장면은 그 시점도 알 수 없이 시퀀스 안에서 부유하는데, 이는 가족을 지배하는 외상적 기억의 실체처럼 등장한 나무 뿌리가 파고 든 아버지의 끔찍한 해골의 충격을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여느 가족처럼 평온해 보이는 사진 속 허위적 환상으로라도 덮을 수만 있다면 남은 우리 가족의 결속을 지킬 수 있을 텐데.

과묵한 적자이자 내내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적 없는 진무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어쩌면 소위 정상 가족을 욕망하는 자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빛을 향해 걸어가는 가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진무의 손에 들린 상자 속 부패한 주검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부패한 주검은 진무 가족의 무궁한 결속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