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많은 게 뒤늦게 발견된다. ‘제국으로서 미국’이 그렇다. 1980년 5월 24일,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 거리에 대자보가 붙는다. “미 항공모함 코럴씨 호가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이 신군부에 압력을 넣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사흘 후 광주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한국인들은 ‘미 제국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독재 투쟁에서 진보적 변혁 운동으로 급격히 전화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의 9할을 가져다 준 80년대는 그렇게, 시작했다.

미국주도 신자유주의의 총본산이라 설명되는 건물과 미 제국주의의 물리적 폭력의 집행처라 설명되는 건물이 공격당했다. 이른바 보복작전이 시작되고도, 누구에 의한 공격인지 분명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그런 공격을 가할 만한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다. 말하자면 미국은 진작부터 그런 공격을 부르고도 남을 만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은 테러로 시작하여 테러로 점철한, 인류 최대의 테러국가다.

미국은 일단의 유럽 무뢰배들이 수천년 이상 자연과 조화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생겨났다. 그 너른 땅을 일구기 위해 그들은 수세기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부렸다. 미국이 수백년의 싸움 끝에 막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게 된 베트남을 침범한 일은 그저 거대한 테러였다. 그 일로 미국과 베트남, 애꿎은 한국 청년 120만명이 죽었다. 한국에서 50여년 동안 극단적인 반공 파시즘을 지속케 한 것도 미국이었고, 제3세계의 수많은 민주 정권들은 단지 미국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러운 전쟁'(반군 지원, 암살, 납치 등)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체 게바라를 죽인 것도, ‘반공주의자’ 김구를 죽인 것도 미국이었다. 오늘 인류의 정신을 의심케 하는 잔혹극,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테러의 배후 역시 미국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의 한 사내가 말한다. “우리에겐 일자리가 없다. 수많은 검문소를 통과해 이스라엘 지역까지 출근하려면 네시간이 걸린다. 여덟시까지 가려면 네시엔 나서야 한다. 일을 마치고 다시 그 검문소들을 통과해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넘는다. 그러고도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당신네들은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돌진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을 이슬람 광신도니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니 욕하지만, 우리로선 이렇게 평생을 사느니 그렇게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오늘 미국처럼 거대한 제국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미국처럼 어떤 이상도 일관성도 없이 오로지 ‘제 잇속’을 위해 무차별한 폭력을 휘두르는 제국은 없었다.(이를테면 알렉산더는 전인류를 그리스인으로,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하여 이상사회를 이루겠다는 나름의 꿈이 있었다.) 객기에 찬 카우보이의 얼굴로 부시는 말한다. “자유가 침범 당했다. 선이 악을 이길 것이다.” 그 자유는 고작 백인 중산층의 자유일 테지만, 그런 유치한 선동이 온나라에 통하는 저능한 제국, 그것이 미국이다. 미국은 몹시 크고 몹시 강하지만 그런 크기와 강함을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뇌를 가진 공룡과 같다. 특히 90년대 이후 현실사회주의라는 견제가 사라지면서 미국은 인류의 순수한 재앙이다.

희한한 일은 오늘 상황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다. 고작 식민지 출신인 그들은 (마치 제국주의 출신이라도 되는 양)  오늘 상황을 철저하게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의 집합인) 서방의 시각으로 본다. 요컨대 한국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테러도 나쁘지만 보복도 나쁘다”는 지당한 말들이나 주고받는다. 너무나 지당해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런 말들은 적어도 오늘 미국 사건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쌓인 처절한 슬픔을  배제한 몹쓸 것이다. 80년 5월 광주를 겪고 나서 그랬듯, 우리가 다시 ‘미 제국주의’를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8)

뻔한 말이지만, 세상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서점에는 처세술 책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는 살지 마라, 저렇게도 살지 마라, 등등의 충고들로 행간은 빽빽하다. <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처럼 노골적으로 돈 많이 벌자고 부추기는 책들도 있지만 역으로 돈 많이 벌어봐야  헛거고 열심히 살아봐야 자본가들 배만 불리니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고 느리게, 그리고 다르게 살자고 속삭이는 책들도 있다. 후자도 넓게 보자면 처세술 책이다. 결국 ‘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세술이라는 장르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찰떡궁합이다. 봉건시대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처세가 필요치 않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농사를, 장인의 자식으로 나면 장인으로, 뭐 그런 식이다. 마을의 대장장이는 처세술보다는 철과 불의 성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귀족이나 정치계급은 처세나 사교, 혹은 넓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겠으나 그런 사람들이 어디 그걸 책 사보고 배우겠는가.

그렇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선 다르다. 정말이지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다. 돌잔치 상에서부터 우리는 선택을 강요당하며 그 의무는 대체로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일생에 작게 혹은 크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는 피곤하다. 도대체 어떤 놈을 사귀고 어떤 놈은 잘라야 되는지, 주식은 사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돈을 모아야 되는 건지, 땅을 끼고 있어야 되는 건지, 저 자식이 나한테 개기는데 저걸 밟아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꾹 참고 살면서 성불을 노려봐야 되는 건지, 여하튼 우리 삶은 선택의 지뢰밭이며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간단치 않다. 이래서 처세술 책은 잘 팔린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처세술이란 선택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처세술 책을 다 읽어도 선택은 난망이다. 책 밖 세상,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책 속에선 그토록 분명했던 것들이 책을 덮자마자 흐물거리며 불투명한 점액질로 변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을 때만 해도 새로운 세계에서 멋지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처세술 책이 기본적으로 단순화, 그리고 유형화라는 논리적 기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세술의 저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하는 일은 세상을 몇 개의 블록으로 구획하는 작업이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친구와 적, 자산과 부채 등등의 대립항들이 동원된다. 물론 인간 유형도 대략 서너개의 부류로 친절하게 구분해 준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도 아무개형, 아무개형, 아무개형 따위로 나누어 준다. 일단 그렇게 분류해 놓은 뒤에 저자들은 각각의 유형마다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대체로 처세술 책에는 ‘그래 이게 바로 나야’라는 인물 유형이 하나쯤은 반드시 있으며 ‘그래 김 부장이 바로 이런 놈이야’라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인물 유형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니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이 바둑판처럼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정도라면 나로서도 해볼 마하지 않을까?” 이 순간 처세술 책은 피로회복제처럼 일시적이고 휘발성 강한 각성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건 진정한 의미의 ‘처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잘 알고 있듯)세상도 처세술 책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조감도가 아니다.

어쨌든, 피로회복제처럼 소비되는 것. 그게 처세술 책이 계속해서 팔려나가게 되는 원리다. 피로회복제가 피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듯 처세술 책 역시 궁극적으로 처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팔린다. 성공의 꿈, 생존의 희망, 탈락의 불안을 먹고사는 불가사리. 그게 작음의, 아니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처세술 교본들이다. 그럼 어디에서 인생의 참된 지혜와 올바른 선택의 기술과 깊이있는 인간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디라고, 자신있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사기꾼일 것이다. 대신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릎걸음으로 더듬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며 그게 바로 우리가 멋진 영화와 좋은 책을 찾아 어두운 극장과 서점에서 금쪽 같은 시간을 탕진(?)하는 이유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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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목적은?

김봉석 칼럼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별다른 두려움이 없다. < 블레이드 러너>나 < 터미네이터> < 코드명 J> 등의 암울한 SF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든가, 기계의 반란 같은 것에 크게 괘념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희미해지고, 기계가 인간의 위에서 모든 것을 관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정체성의 혼란은, 아마도 태초의 인간부터 겪은 것이 아닐까.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면 선악과(혹은 지혜의 과실)를 먹고, 신의 대지로부터 쫓겨난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혹은 인간이 ‘동물’에서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각 개인에게도 끊임없이 되풀이된 질문이다. 굳이 종의 발견만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늘 자신을 의심하게 되어 있다. 그 의심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퇴화할 것이다.

기계의 반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늘,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게 속박당하고 지배되어왔다.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같은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성이 없는 기계들에 지배된다한들, 절대화된 ‘국가’에 지배당하는 것과 또 무엇이 다를까. 물론 거기에도 수많은 층과 결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내가 넘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사회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할 과제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법,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렵지는 않지만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때로, 귀찮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휴가중이다. 휴가중에 회사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 시킨다고 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휴가를 보내는 내가.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휴대폰이 있고, 도처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지금은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 ‘가능’이 싫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굳이 개입하거나 실행하게 만드는 간섭이 싫다. 나는 그것이 지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면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나의 불찰은 분명 있다. 연락처를 남겨두는 실수를 왜 저지른 것일까. 살다보면 해이해지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없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제, 컴퓨터 없이는 전혀 글을 쓰지 못한다. 과거 원고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연이어 파지를 만들어내던 일이 마치 석기시대처럼 느껴진다. 사냥을 하기 위해 도구가 필요했듯이,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스스로건, 타인의 의지로건 ‘도구’에 얽매이는 순간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린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형식이나 시스템에 매달리는 순간 인간의 얼굴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무수한 ‘목적’ 때문은 아닐까. 행복이라든가, 자유라든가, 믿음이라든가 등등.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