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알

영국에서 출판된 많은 책들이 우리보다 문명수준이 낮은 나라에 가면 분명히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런 저자나 출판업자들은 사람의 악한 면에 호소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그 악은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며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인생관에 깊은 해악을 남길 것이다.(<드라큘라> 작가 브람 스토커, 1895)
나는 부모님이 내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내역을 틈틈이 검색하고, 검토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받아드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를 불신하여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터넷을 좀더 안전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인터넷 사용 규칙’, 2000)

2000년 7월18일, 한국 판사 김종필은 2년 전 미성년자보호법(현재의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미 무혐의 처리된 영화 <거짓말>도 재론해야 한다며 기세를 올리고 작가 이현세를 비롯한 만화가들은 비탄에 빠졌다. 한국 사법부가 만화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는 건 분명해 보인다. 김종필은 이현세가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작가라서 유죄 판결한다 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관대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무조건적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모양을 한 범죄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여과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여과장치의 역할을 공권력이 맡는 건 봉건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과장치는 전체 일반인의 의견이 공정하게 반영되는 민간의 것이어야 한다. 김종필은 “음란성은 작가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정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가 말한 일반인이란 실은 (앞의 인용문을 남긴) 도덕주의자 일반이다.
그런 도덕주의자들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그들 스스로 쉴새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조리퐁이라는 과자는 여성 성기이고 가수 이정현이 꼽고 나온 비녀는 남성 성기이며 테트리스 게임은 삽입성교이고 거북이알이라는 과자는 콘돔이다. 그들의 ‘음란성’은 놀랍지 않은가.
그들의 눈에 온세상은 성기와 닮은 것들이다. 나는 그들이 총각김치나 조개구이를 먹는지가 정말 궁금하다.
(이견을 존중하는 근대인의 자격을 잃고 싶지 않기에) 나는 온세상을 성기를 닮았는가로 판단하는 그들의 특별한 생각을 하나의 생각으로 인정한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그들이 거북이알 불매운동을 벌이든 테트리스 거부운동을 벌이든 그건 그들의 삶이다. 문제는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이해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해와 일없이 성교한다는 점이다. 검찰이 <천국의 신화>에서 처음 문제삼았던 집단성교와 수간 장면이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청소년본에는 삭제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한국 사법부와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만족스런 성교다.
한 사회의 성인들이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을 염려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염려의 목적이 아무것도 모르는 앙상한 인간을 기르는 게 아닌 풍성한 정신을 가진 균형잡힌 인간을 기르는 일이라 할 때, 청소년을 성인세계의 ‘나쁜것들’에서 무조건 차단하는 시도는 어리석다. 완벽한 차단은 완벽한 통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청소년들의 사생활을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차단은 그런 ‘나쁜것들’을 음지로 옮겨놓을 뿐이다.
고길섶이 짚었듯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의 우량한 자식이다. 국가보안법이 국가보안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웠듯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보호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이적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았듯 청소년보호법은 유해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는다.(청소년을 보호하는 데 표현의 자유가 대순가!) 가까스로 정치적 파시즘을 벗어난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문화적 파시즘을 맞고 있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drumcom@shinbiro.com

염치2

김규항 칼럼

영화감독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환대 속에 그들의 영화를 시작했다.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란 대개 그들의 출신대학과 약간의(아주 약간의) 80년대 이력을 근거로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식있는 엘리트’의 자격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들의 데뷔작 <성공시대> <칠수와 만수> <세상밖으로>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오늘 그들의 필모그래피는 갈수록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비껴간다. 장선우의 최근작은 섹스로 정치를 말한다는 <거짓말>이다. 그런 해석에 대해 장선우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곤 했지만, <거짓말>에 대한 그런 해석 역시 장선우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가 관련되어 있다. 장선우가 만든 영화엔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전문가들(서구 전문가들의 한국어판인)이 협력함으로써 <거짓말>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감각의 제국> 따위 이른바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의 계보에 등재된다.

<거짓말>은 그런 영화들과 같은 계보에 등재될 자격이 있어 보인다. 다만 <거짓말>을 비롯,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는 영화의 계보가 아니라 포르노도 사회물도 아닌 정체불명의 활동사진의 계보에 등재되는 게 좋겠다. 그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다는 주석이나 해설을 지참하지 않고는 그 영화들 스스로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음을 드러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체불명의 활동사진들은 현실 속의 구체적 변혁 의지를 포기한 일군의 유럽 살롱좌파들이 자신들의 열패감을 마스터베이션하기 위해 마련한 자폐적 이론 집착증(포스트 맑스주의니 문화과학이니 하는)의 영화적 변종이다.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전문가들은 변화무쌍한 예술적 천착이라고 한다. 상식의 입장에서, 그 필모그래피는 어떤 진지한 예술적 천착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야 말겠다는 변덕무쌍한 욕망에 가깝다. 요컨대 장선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회를 믿기 어려울 만치 제멋대로 사용하는 참으로 염치 좋은 사람이다. 그런 염치 좋음은 박광수(의 최근작은 역사적 사건의 역동성을 믿기 힘들 만치 정교하게 거세해 보인 <이재수의 난>이다)나 여균동(의 최근작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만을 생각게 하는 <미인>이다)에게도 어김없이 해당한다.

내 영화 내 맘대로 만드는 데 무슨 상관이냘 수 있겠지만, 그들이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사양하긴커녕 적절히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그런 가치중립적 권리는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이 변했으니 영화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한다면, 나는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삼십오년째 세상과 변함없는 긴장을 이루는 한 좌파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켄 로치다.

한국영화의 비극은 다름 아닌 켄 로치가 없다는 것이다. 유례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빠진 한국에, 수많은 80년대의 좌파청년들이 영화에 투신했다는 한국에, 자본주의와 긴장을 이루는 한명의 감독이 없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의 슬픈 비극이다.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이 받은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한국의 켄 로치에 대한 기대였다. 사회는 그 ‘의식있는 엘리트들’이 영화라는 무기로 세상과 긴장하리라 기대했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그런 기대가 애당초 허황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분명히 근거가 부족했고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감을 심어준 그들의 데뷔작들은 그 제작 시점에서 어떤 분투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사회가 그들을 포기하든 그들이 사회적 환대를 포기하든 그들과 사회 사이에 지속되어온 이 염치 좋은 코미디는 이만 끝내는 게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켄 로치를 기다리도록 하자.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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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도정일 칼럼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자연철학자였던 괴테(1749∼1832)의 긴 창작 생애에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주요 작품만으로 따진다면, 그가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낸 것이 스물다섯 때이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쓴 것은 마흔일곱이 되어서의 일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일흔둘에 그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여행> 완결판을 내고 또 거기서 11년 뒤인 여든셋에 극시 <파우스트> 제2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해에 그는 죽는다. 그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죽었다는 것이 꼭 특별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특별한 것은 그가 근 60년 동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창조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여든셋이란 이미 적당히 노망기 들거나 혼미해져 코끼리 다리가 넷인지 다섯인지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하는 일조차 귀찮아질 만한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이르도록 창조력이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비범한 힘의 비밀은?

괴테의 어떤 시편에는 이 비밀의 단서 하나를 제공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한 군데 나온다. 그가 자기 부모를 회고해서 쓴 듯한 구절이 그것인데, 풀어쓰면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Lust zu fabulieren)이라? 이 즐거움은 무슨 생물학적 디엔에이(DNA)가 아니라 괴테가 어머니에게 배워서 알게 된 즐거움- 경험과 체득의 디엔에이임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괴테의 어머니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여자이다. 셰헤라자데처럼 그녀는 어린 괴테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어머니, 말하자면 ‘아들의 셰헤라자데’이다. 그녀는 회고한다. “바람과 불과 물과 땅-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어머니의 회고는 좀더 계속된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의 눈은 잠시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어떤 인물의 운명이 그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쪽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아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리고, 그가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엄마, 공주는 그 못된 양복쟁이하고 결혼하면 안 돼. 양복쟁이가 악당을 쳐부순다 해도 말야.’ 그럴 때면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결말은 다음날 밤으로 미루었다. 그런 식으로 내 상상력은 가끔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어떤 때는 바로 다음날 아침 그가 바라던 대로 주인공의 운명을 고쳐 이야기해주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넌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 결과는 네가 생각한 대로 된 거야.’ 그러면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빛났고, 나는 그의 어린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괴테의 놀라운 창조력이 오직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한 군데로만 몰아 창조성의 원천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성의 다른 이름은 상상력이며, 괴테의 경우 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워준 첫 번째 공로자는 밤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을 놓아주었던 그의 이야기꾼 어머니이다. 더구나 그 길 놓기는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다. “가끔 내 상상력은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괴테의 어머니는 어떤 정해진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들의 예민한 반응에 적절히 반응하고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든다. 반응은 이미 상상력의 참여이고 발휘이다. 이야기 들려주기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라 ‘아들과 자기 사이의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을 괴테의 어머니는 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반응하고 그 반응에 어머니가 반응함으로써 화자와 청자는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극받는다. 이 자극은 이야기 지어내기를 즐거운 일이게 한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를 즐겁게 나는 상상력은 또 별과 인간을 잇고, 지상의 별들인 사람과 사람의 가슴 사이에, 사람과 개구리 사이에 길을 놓는다.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이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교육열 높다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화책 사다 던져주고 “네가 읽어”라 말하거나 무슨무슨 학원으로 내쫓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비디오만 열심히 틀어주는 부모도 많다. “내가 시간이 어딨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 ‘우리’에게 괴테의 어머니는 말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라, 함께.”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