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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

정윤수 칼럼

싸움에는 법도가 있다. 물론 친구가 친구의 배에 연장을 담그고 동네 양아치 이강재가 똘마니들 뒤통수를 연탄으로 까는 것이야 영화 속의 싸움이므로 논외다.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탄식은 절실하긴 하지만 아쉽게도 옆집에 가서 물어봐야 할 문제다. 싸움에 법도가 있다는 것은 이를테면 루쉰(魯迅)의 글로 확인된다.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는 루쉰의 주장이 그것이다. 군벌 잔재와 반개혁세력에 대하여 린위탕(林語堂) 등이 이른바 화해와 용서의 ‘페어플레이론’을 내세웠을 때 루쉰은 어떤 경우라도 물에 빠진 개는 때릴 수밖에 없다고 강론한 바 있다.

그 논설의 핵심을 추존하면서도 잠시 곁눈으로 읽을 때 루쉰의 절묘한 매력이 따로 발견된다. 그러니까 루쉰은 물에 빠진 개를 운운하면서 싸움의 법도에 대하여 말한다. 만일 송능한 감독이 <넘버.3>의 속편을 찍는다면 불사파의 강론장면에 인용할 만하다. ‘땅에 쓰러진 상대는 더이상 때리지 않는다’거나 ‘상대방의 수법을 상대에게 적용하라’는 경구는 일체의 감정 개입이 필요없는 담백한 맛을 제공한다. 요컨대
싸움에는 법도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논쟁적 사안일 경우 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핵폐기물이나 네오나치 문제라면 머리띠부터 매야되겠지만 정반합의 룰 아래 영원히 푸르른 생명의 소나무를 찾아내기 위한 논쟁이라면 더욱이 법도는 소중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이 점에서 반면교사가 되었다. 물론 ‘<조선일보>이기 때문에’라는 혐의는 미리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논쟁은 문학면에서 전개되었고 그 마무리가 용두사미였으며 뒤늦게 다른 자리에 판관들을 모아 논쟁의 한쪽 주장을 공식화했기 때문에 반칙이라는 얘기다.

주제는 ‘본격문학 대 대중문학’. 장르 연구가 목적이 아닌 곳에서 문학 앞에 이러한 수식이 붙을 경우 대개 논쟁은 개념을 둘러싼 반론의 연속이기 쉽다. ‘순수-참여’논쟁이 그렇듯이 ‘본격/대중’의 구도 또한 불철저한 구도다. 이 의제는 다시 ‘문학의 운명’,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영상세대와 문자의 사멸’ 등과 맞물리면서 요 몇해 꾸준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이에 대한 적지 않은 글이 제출된 바 있다.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화장실에 모니터를 들고 갈 수는 없다’는 정도는 합의한 바가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 문학팀의 불공정한 게임이다. 처음에 그것은 이용범, 정과리, 이인화, 조창인, 박상우, 김정환 등이 짧은 지면에서나마 서로의 견해를 치고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사동 분위기를 혐오하는 나로서는 문인들이 이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길이 없으나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일반독자는 물론 문학전문 독자도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다양하다니,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534년이 지난 뒤에도 남게 될 위대한 소설 <관촌수필>의 작가에게 수상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던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이 2회 수상작품 예심을 하면서 이 논쟁을 다시 꺼냈는데 <조선일보> 문학팀이 정리한 참석자들의 최종 견해는 대단히 위험한 상태였다. 판관들의 요지는 ‘대중문학을 문학의 한 파트너로 삼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며 ‘대중-통속소설을 붙들고 싸워주는 것만도 그들을 격상시켜주는 결과’이고 차제에 ‘대중문학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해외 본격문단의 분위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두명의 레이먼드, 그러니까 레이먼드 카버와 레이먼드 챈들러가 공존하는 예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저 막막한 우주를 대하고 있는 박상륭과 이영도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어이없는 총결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예의 논쟁에 시작부터 참여하여 두 차례나 글을 쓰면서 한쪽 견해를 주장했던 문학평론가 정과리 역시 심사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이건 반칙이다. <조선일보>라서 문제라는 게 아니다. 그들 말대로 이 논쟁이 ‘본격과 대중의 구분이 무의미해져가는 이 문화혁명의 시대에 작가의식과 글쓰기 철학은 있는가’ 하는 중차대한 상황 인식 끝에 나온 논쟁이라면 아직 논쟁은 진행중이며 그 결론 또한 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이런 성격의 논쟁이란 그 결론이 영원히 유보적일 때 의미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쪽 당사자가 다른 자리에서, 그것도 박완서, 유종호, 김화영, 이문열 등과 더불어 ‘동네 애들하고 괜히 싸웠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고의적인 백태클이다. 더욱이 정과리는 논쟁 과정에서 상대방의 비판문을 두고 ‘한참 열심히 길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오물을 뿌리다니’라고 힐난하면서 ‘문학의 사활을 점검하는 소중한 자리’이므로 ‘논쟁의 규칙을 숙지’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쓰지 않았던가.

말의 단속을 소홀히 한 사람에게는 엘로 카드로 충분하지만 게임의 룰을 어기고 백태클을 한 사람은 명백히 퇴장감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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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심층 면접 예상 문제  정윤수의 이창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문 1.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문대성의 입장이 되어 의견을 말하라. 요즘 태권도협회가 국가대표 선발전의 잡음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지난해 시드니올림픽 선발전에서도 미담 속의 잡음이 한 차례 있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것 자체가 금메달 수상과 직결되는 태권도. 이 종목에서 10여년 이상 세계를 평정한 불세출의 영웅 김제경을 위하여 김경훈과 문대성이 기권과 부상이라는 이름으로 선발전 자체를 ‘무의미한 영광’으로 만든 바 있다. 그런데 김제경이 부상으로 시드니행이 좌절되자 그때부터 영광에 금이 갔다. 협회는 2, 3위에 재대결을 결정했고 이에 99년 세계챔피언인 2위 문대성 선수가 1위가 낙마하면 2위가 출전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보이콧을 했다가 어쩔 수 없이 재대결을 치렀는데 김경훈에게 지고 말았다. 김경훈은 시드니의 면류관을 썼다. 너무 쉬운 문제라구? 그렇다면 문 2. 당신이 다음 시합의 4위 선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시드니의 꽃 강초현. 올림픽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새 아파트를 얻었고 충남대 체육교육학과에 일시 진학한 바 있으며 독일 사격장비업체, 온라인게임회사, 의류업체의 모델로 새 삶을 살았다. 베스트드레서 시상식이나 우리 영화 보는 날 같은 행사에 도우미로 불려다녔으며 조성모, 이휘재 등과의 깜짝 이벤트에도 나갔다. 부도덕한 뮤직비디오 <아시나요>의 파문을 수습하기 위한 기획사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충고는 사후약방문이었다. 그 모든 과정에 미디어가 개입했다. 강초현은 해병 청룡부대에 입소해 지옥훈련을 받았다. 강초현은 미디어의 강요에 따라 여자 코스보다 세배 이상 긴 남자 코스에 도전했으며 로프를 잡고 중간까지 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카메라는 이 과정을 생생히 잡아냈다. 이들은 시합장까지 쫓아갔다. 수십대의 ENG 불빛과 셔터 소리를 들으며 사대에 오른 강초현이 지난 몇 개월 동안 꼴찌에 예선 탈락을 반복한 것은 당연한 노릇인지 모른다. 결국 며칠 전 서울월드컵대회 선발전에서 강초현은 17위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여갑순 이후 여자 사격의 대들보였던 비운의 최대영이 1위, 장미가 2위, 비공인 세계타이기록을 세운 이문희가 3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사격연맹의 어이없는 규정 해석과 무언의 압박에 따라 2위를 차지한 장미 선수가 출전 포기를 밝혔고 연맹은 17위의 강초현을 대표로 뽑았다. 올해 전문대에 입학한 장미 선수는 잇따른 대회출전으로 수업결손이 많아 출전을 포기했다고 밝혔는데 전혀 설득력이 없다. 진작에 수업이 걱정이었다면 선발전에 출전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그럼에도 2위가 포기했다면 4위가 선발되는 게 원칙 아닌가. 강초현 역시 지난 시드니 선발전에서 무명으로 2위를 했다가 자신보다 관록 높은 3위를 내보내야 한다는 변칙 대신 2위를 내보내야 한다는 원칙에 힘입어 시드니로 갔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 자, 이 과정을 4위의 입장에서 풀어본다면 어찌될 것인가. 마지막 문제. 다음 제시문을 읽고 ‘착한 사람은 위대한 예술을 만들 수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가설을 믿는다는 전제 아래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비장하게 죽는 장면을 비판적으로 설명하라. 에스더 김은 한국계 미국인 태권도 선수. 탁월한 기량으로 대표 선발이 유력했으나 같은 체급의 동료 케이 포가 준결승에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에스더 김은 아예 결승전 출전을 포기해버렸다. 결과는 몰수패. 에스더 김의 놀라운 결정 덕분에 포가 대표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스포츠 감상주의의 대제전인 올림픽으로서는 에스더 김의 이 기막힌 드라마를 놓칠 수 없었다. 각종 외신과 인터넷을 들끓게 한 이 미담은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천사들의 이야기로 등극하였으며 미국 올림픽위원회는 에스더 김에게 스포츠맨십상을, 그리고 미 하원의장은 감사장까지 수여하였다. 사마란치는 특별 초청 케이스로 에스터 김을 시드니로 불렀다. 에스더 김에게는 ‘진정한 승자’라는 닉네임이 주어졌다. 이 세레모니의 조연 케이 포는 어찌해야 좋은가. 준결승에서 뼈아픈(실제로 케이 포는 무릎 연골 덮개가 탈골되는 중상을 입었다) 부상을 입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진정한 승자’의 조연이 되어야만 하는 케이 포. 원하지도 않게 ‘진정한 승자’의 들러리가 된 케이 포. 결전의 날. 시드니 올림픽파크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플라이급 1회전에서 케이 포는 덴마크 선수에게 패해 패자부활전으로 밀려난 뒤 결국 예선 탈락했다. 이때 중계 카메라는 매트의 패배자 케이 포를 잠시 비추더니 관중석의 ‘진정한 승자’, 탈락의 비운을 맞은 동료를 향해 아쉬운 눈물과 격려의 손짓을 보내는 에스더 김을 비춘다. 혹시 케이 포는 일부러 진 것은 아닐까. 에스더 김은 그날 경기장에 나오지 말았어야 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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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지독한 고발

숏컷 | 김봉석 칼럼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끈질긴 ‘삶의 투쟁’을 보았을 때도, 별반 감동하지 않았다. 꼭 그렇게 힘들여 살아야만 하나? 나이가 들어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근대정신의 수호자라는 것을 안 뒤에는 씁쓸했다. ‘생존’을 위하여 야생의 섬과 원주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 드는 건 분명 고약한 심성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백인들의 휴양지처럼 만들어버렸다. 물론 한 개인으로서의 생존본능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생존은 그 자체로 의미있을 수도 있다. 나 같으면 게을러서 얼마 안 가 죽어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Q채널에서 지난해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서바이버>를 방영한다고 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던 건 그런 배경 탓이었다. 수만명의 지원자 중에서 16명을 오지로 보내고, 그곳에서 투표를 통해 하나씩 탈락되어 마지막에 남은 ‘최후의 1인’이 100만달러를 챙긴다. 거칠게 말하자면 TV의 퀴즈쇼나 별다를 것 없고, 거기에 ‘야만’의 포장을 덧씌운 것 정도밖에 더할까. 그게 내 선입관이었다. 하지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난 <서바이버>는 꽤 흥미로웠다. 출연자들은 두개의 부족으로 나뉘고, 함께 의식주를 해결한다. 그들 사이에서 협동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경쟁자다. 처음에는 집단간의 경쟁이다. 부족간의 게임이 벌어지고 진 팀은 한명을 내부투표로 탈락시켜야 한다. 한 부족이 연달아 게임에 지자, 부족원들은 ‘약한 사람’을 먼저 탈락시킨다. 게임에서 진 이유가 그의 ‘약함’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지던 부족이 각성을 하고 하나로 뭉치자, 마침내 게임에서 이긴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친다. 합치기 전에는 각 부족이 신경전을 벌인다. 어쨌거나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정이 들었고, 그들은 상대 부족원에게 적개심까지는 아닐지라도 경쟁심은 확연하게 드러낸다. 하나의 부족으로 합쳐 투표를 하게 되자, 그들은 상대방 부족의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표를 던진다. 결국 수의 우세를 확보한 부족이 소수를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바이버>를 조금씩 보다보니, 정말 흥미로웠다. 이건 야생에서의 생존게임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생존게임이었다. 부족간의 대립이 치열하다가, 점차 수가 줄어들며 개인간의 경쟁이 전면에 드러나자 타깃은 ‘개인’으로 바뀐다. 한 흑인여자는 너무 체력이 좋기 때문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탈락된다. 전체의 화합을 해치는 사람도 탈락된다. 능력이나 인간성이 너무 뛰어나도, 너무 처져도 ‘최후의 1인’은 될 수 없다. <서바이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문명이란 옷을 벗겨내자 드러난 맨얼굴과 똑같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다, 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건 언제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내치는 것, 집단의 힘으로 소수를 밀어내는 것, 결국은 ‘최후의 1인’을 향하여 눈돌리지 않고 뛰어가는 것. 그냥 쿨하게, ‘산다는 게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서바이버>는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다. 하지만 조금 사선으로 비껴나면, <서바이버>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지독한 ‘고발’이다. 인간은 타인을 짓밟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존재다.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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