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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구에게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

오삼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가 화제의 드라마가 된 건 주로 장진구 덕이었다. 사람들은 장진구인 사람들과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 장진구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장진구와 다름을 증명하느라 내내 땀을 흘렸고,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은 그 장진구와 현실 속의 장진구의 유사함을 확인하느라 내내 재미를 봤다. <아줌마>는 막을 내렸고 <아줌마>적 논의는 막을 내리지 않았다.

장진구를 자처하는, 소설가 김영하는 ‘내가 <아줌마>를 싫어하는 두세 가지 이유’를 제출했다. 나는 <아줌마>가 싫다, 나는 장진구다, 지식인이란 장진구다, 지식인은 본디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다, 소크라테스만한 장진구가 있었는가, 공자도 유비도 예수도 장진구였다, 우리를 미워해라, 그러나 우리를 씹으려면 좀더 세련되시라…. 김영하의 자기모멸은 얼핏 지성적이지만, 결국 김영하는 <아줌마>를 오독하고 지식인을 모욕했다. 지식인이 먹물이라는 대체어로 즐겨 불리는 데서 보듯, 비지식인들의 지식인 혐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비지식인들은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현실 속에서 대체로 근거있고 사실이지만, 얼마간은 오해다. 지식인에겐 노는 사람이나 사회의 잉여로 오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지식인은 여느 노동들처럼 몸을 움직여 분명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세상의 정신 부문을 담당하는, 세상을 분별하여 세상에 알리는, 매우 추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갖는 그런 추상성은 종종 비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며, 종종 지식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디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곤 한다. 김영하의 경우다.

제 노동의 결과를 아카데미즘이니 인문주의니 딱지가 붙은 궤짝 속에 쌓아두기만 하는 부류는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게 중 나은 편이다. 훨씬 많은 지식인들은 백날 천날 놀면서 각종 실물 정치와 각종 실물 경제에만 집착하는 순수한 잉여들이다. 그런 잉여들의 유일한 노동이란 비지식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오삼숙의 모델이 된 친구가 그랬다. 자기 남편은 아내가 저 하는 말 절대로 알아 듣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고. 또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고….”(<아줌마>의 작가 정성주) 김영하는 소크라테스에 공자에 유비에, 급기야 예수까지 끌어들여 <아줌마>를 공격한다. 그 논리적 해괴함(장진구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은?)은 덮어두고라도, 그런 시공 초월적 지식인론은 <아줌마>라는 과녁과는 거리가 멀다. <아줌마>는 섬뜩할 만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80년대를 밑천 삼아 90년대에 백가쟁명을 과시하였으되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2천년대 정신적 공황기를 도래케 한 사람들이다.”(정성주) <아줌마>의 그런 분명한 설정은 그런 설정 바깥 또한 분명히 한다.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만 자신의 노동을 기억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지식인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김영하는 장진구 같은 지식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했는데, 김영하는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를 착각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건 장진구가 아니라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다. 그 장치를 걷고라면,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2천년대의 정신적 공황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그들의 성실한 노동 덕에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장진구들의 죄가 사함 받는다. 추신 김영하는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들’은 1930년대 소비에트 선동극에나 존재한다고 했다. 소비에트 선동극 속의 민중들은 생으로 지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순결해진다. 어떤 졸렬한 인간도,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가장 순결해지는 것. 우리가 사람인 이유이자 역사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다.

정신의 붕어빵

도정일 칼럼

북미 원주민의 어떤 신화에 ‘실패하는 조물주’ 이야기가 있다. 이 조물주는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면서도 막상 인간을 만드는 대목에 가서는 서투른 견습공처럼 연거푸 실패한다. 그는 진흙으로 두 형상(남자와 여자)을 빚어 도자기 가마 같은 데 집어넣고 공을 들이는데 나흘 만에 거기서 나온 것은 그가 구상했던 ‘사람’이 아니라 암수 개 한쌍이다. 그는 다시 진흙을 빚어 가마에 넣고 이번에는 열사흘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다. 나흘의 세배나 되게 시간과 정성을 들였건만 가마에서는 암수 뱀 한쌍이 쉿쉿거리며 기어나온 것이다. “두번씩이나 실패했으니 사람을 어떻게 만들꼬?” 그는 고민에 잠긴다. 인간 만드는 일이 제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그는 자기 조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조교’의 결정적인 협력을 받고서야 조물주는 간신히 인간을 얻게 된다.

이 이야기를 여기 소개하는 것은 ‘조교 예찬’을 위해서가 (물론 조교는 예찬받을 만하지만) 아니라 사람 만드는 일 앞에서는 조물주도 쩔쩔맸다는 소식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처음 만든 것은 조물주겠지만, 이 창조 사업을 이어받은 것은 인간 그 자신이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사업의 일부이다. 그 인간 만들기가 붕어빵 찍어내기 정도의 작업이라면 사회는 교육이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은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로 밤잠 설치지 않아도 되고 어른들은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로 머리싸매지 않아도 된다. 붕어빵 잘 찍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교육의 가장 큰 고민은 붕어빵 인간을 어떻게 잘 만들어내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붕어빵을 만들지 않을까”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의 이 정당하고도 필요한 고민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붕어빵 만들기의 효율성 문제- 어떻게 하면 붕어빵을 잘 찍어낼까라는 문제로 더 노심초사하고 있다.

대학의 경우,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교수들은 한국 대학생들에게 두번 놀란다고 곧잘 피력한다. 학생들의 ‘게으름’에 놀라고 ‘놀고 보자’ 주의에 또 놀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게으름과 놀고 보자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신입생들에게서 거의 공통으로 발견되는 안쓰럽고 측은한 특징의 하나는 십리 파도를 간신히 헤엄쳐 나와 해안에 상륙한 난파선 생존자와도 같은 탈진상태이다. 젊은 육체는 이 탈진을 감추고 있지만 정신은 기진맥진해서 파김치가 되어 있다. 대학 들어오느라 기진하고 맥진한 이 정신들에 대학은 우선 쉬고 노는 곳 같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의 대학들은 유흥가로 완전 포위되어 있어 노는 데는 그만한 환경이 지구상에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 파김치가 된 정신들로부터는 지적 호기심, 상상력, 도전적 비판력이라는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점이나 잘 챙겨 ‘무사히’ 졸업장 받아 쥐고 나가자는 것이 이 탈진한 정신들의 일반적인 정신상태이다. 중·고교 6년 동안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는 다른 책이라곤 접해볼 겨를 없이 시킨 대로 입시과목에 매달리고 학력고사에 목매단 끝에 대학에 들어온 정신의 붕어빵들은 그렇게 해서 정신의 붕어빵 상태 그대로 대학을 나서고자 한다(붕어빵이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젊은 지성들에는 갈채를!).

현실론자들, 특히 학부모들은 대학 입시의 경쟁을 뚫는 데 다른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다. 학생들 자신도 이 고도 취업경쟁 시대에 무슨 다른 묘수가 있는가하고 질문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적 고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건 교육이 아니고 인간 만들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몸은 작은 자루에 불과하지만 그 정신은 작은 상자가 아니다. 그 정신은 마음놓고 춤출 수 있을 때에만 커지고 넓어져 무서운 탄력을 발휘한다. 정신을 작은 상자에 가두는 교육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교육의 문제는 이것이다. 체제에의 기술적 적응력 키우기만이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수동적 적응이 있다면 틀을 깨고 나가는 창조적 비판적 적응도 있다. 교육의 힘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이 후자이다.

교육제도와 방법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 교육이 자잘한 조무래기 감자 생산작업 이상의 것이 되자면, 대학교육을 포함한 교육의 전 영역에서 국가 및 사회의 투자규모는 최소한 지금의 다섯배는 되어야 한다. 지금의 교육투자로는 우리에게 작은 감자의 미래만 있을 뿐이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

 

천진한 웃음이 무서워!

컴퓨터 게임 – 뽑기 게임

<DDR>로 시작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댄스 게임기들은 오락실의 새 장을 얼었다. 전에는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의 남자들만 득실댔지만 이제 연인끼리, 아니면 여자들끼리도 자주 오락실을 찾는다. 지하의 어두운 공간은 1층에 당당히 자리잡은 밝고 깨끗한 곳으로 바뀌었고, 더이상 오락실에서 학생주임 선생이 불길한 그림자로 군림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더이상 오락실을 ‘비행 소년들의 칙칙한 공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댄스 게임기 열풍은 시작되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식어버렸다. 무리해서 너도나도 들여놓았던 게임기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값비싼 기계를 여러 대씩 사들이랴, 덩치 큰 것들을 들여놓느라 공간 확장하랴, 이래저래 출혈이 컸던 오락실들은 궁지에 몰렸다. 우울한 오락실에 그나마 희망이 되어준 게 뽑기 기계들이다. 금속 집게를 조절해서 인형을 뽑아내는 단순한 게임은 의외로 수많은 중독자를 양산했다. 게다가 이 게임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에는 청소년뿐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성인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 그 자리에서 1만원, 2만원씩 써가며 인형 뽑기에 열을 올리는 광경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인기에 힘입어 인형 뽑기는 오락실이 아닌 팬시점이나 문방구 등에도 많이 설치되었고, 몇몇 오락실에서는 현금을 은밀하게 경품으로 내거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인형 뽑기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돼 나온 게 <가재 뽑기>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가만히 누워 얌전하게 뽑아주기만 기다리는 곰인형이나 오리인형은 시시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봤자 살아 움직이는 가재 한 마리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는 없다. 더 구미가 당기는 건 가재가 헝겊인형보다 훨씬 더 비싼 ‘물건’이라는 점이다. 가재요리를 먹어보려면 적어도 2만∼3만원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금의 노력과 재능, 운만 있으면 몇푼 안 되는 돈으로 횡재수를 낚을 수 있다. 집에 가져가서 요리하느라 익숙지 않은 집게발과 씨름을 벌일 필요도 없다. ‘잡은 가재는 즉석에서 매운탕을 끓여 드립니다’란 팻말이 친절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품으로서, <가재 뽑기> 기계에는 약점이 있다. 바로 단가가 높다는 점이다. 값비싼 가재로는 생각보다 영 수지가 안 맞는다. 그래서 등장한 게 햄스터, 병아리, 토끼들이다. 원가가 몇백원에 불과한데다가, 크고 힘센 가재보다 뽑기도 편리하고,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니 일종의 캐릭터성도 있는 셈이다. 조준을 잘못하면 연약한 피부가 찢어지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직접 피를 보니 스릴이 한층 더한다. 내가 지배자란 느낌이 더 많이 든다. 동물 뽑기는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인기다. 아이들은 대개 동물을 좋아한다. 제발 강아지 한 마리만 주면 정말 예쁘게 잘 키우겠다는 읍소가 인터넷에 넘쳐나고,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자리를 펴고 병아리를 파는 할머니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이다. 버둥거리는 병아리에게 차가운 금속 집게를 겨누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그냥 돈 내고 사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노란색 학교 체육복을 똑같이 입은 아이들이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한 구석에 던져놓고 뽑기 기계를 둘러싼다. 고사리손으로 꼭 쥐고 와 따뜻해진 동전을 한명이 내민다. 정작 당사자보다는 구경하는 여러 명이 더 침이 마른다. 연약한 어린 생명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몇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성공이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린다. 티 하나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