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모든 것이 퇴행하고 있다

정윤수 칼럼

우리 영화의 퇴행 증후, 지난호 <씨네21> 특집인데, 늦은 감이 있다. 사실 증후가 아니라 확연한 퇴행이다. 문제는 이러한 병리적 퇴행이 단지 영화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계 전반의 일이며 나아가 우리 삶의 어떤 측면까지 확대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과도한 카타르시스는 이미 대중음악쪽에서는 거의 5,6년 전부터 여실한 바 있다. 유승준의 가위춤사위를 받으며 진재영이 죽은 것으로 시작해서 최근의 이미연까지 수도 없이 죽어갔다. TV 드라마의 핑크빛 일상은 말해 무엇하랴. 시청률이나 흥행 같은 상업적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다면 나는 문학마저도 동일한 처지라고 말하고 싶다. 일상에 대한 추구가 우리 문학이 가야할 유일한 길은 물론 아니며 흔히 ‘일상’이라고 요약되는 삶의 어떤 국면에 대한 접근 역시 작가들마다 다를 것이요 응당 백화의 만발로 달라질 때 또한 우리 문학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문제는 그 결실이 흡족한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최영미의 여행기 <시대의 우울>이 그렇다. 90년대 중반 이후 유행했던 작가들의 세계여행기 출간 신드롬을 서평의 틀을 빌려 비판적으로 쓴 일이 있거니와 특히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 그중에서 스페인여행이 못내 거슬렸었다. 최영미가 스페인여행에서 사라고사의 광적인 축구열기에 대해 짜증과 환멸을 낸 것에 대하여, 나는 그가 마드리드와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의 축구팀으로 상징되는 스페인의 역사를, 그 통합과 분열과 독재의 역사를 좀더 이해했으면 했다. 더욱이 역사쪽을 전공한 시인이 아닌가. 그 이력에 걸맞게 그는 고야의 도시 마드리드와 피카소의 고향 카탈루냐를 전투적으로 웅변하는 축구팀에 대하여 관심을 두었더라면 좋았을 터이고 아마 그랬다면 얼마 전,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 피구가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치른 첫 원정경기에서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그에게 욕설을 해대고 피케팅에 오물 세례를 퍼부은, 그 광란의 그라운드를 흥미롭게 이해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그는 피로했던 게 아닐까. 긴 여정에 지친 게 아니라 역사라는 무게를, 실존의 부담을, 일상에 대한 짐들을 몽땅 덜어버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까닭으로 진지한 여행자의 눈은 물론 작가적 관찰마저도 유보하고 스스로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 주목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이것이 하나의 대전제로 승인될 수 있다면 오늘의 작가들이 구체적인 현실과 인간보다는 사물에 유독 집착하는 현상, 인간조차 익명화시키거나 심한 경우 사물의 등가로 치환하는 일이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추측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배수아의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가 그렇다. 이 소설은 주인공 유경의 신경질적인 독백으로 이어진다. 키워드는 결혼과 섹스이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남녀가 유경의 주변에 배치된다. 재미있는 것은 유경이 그들을 자주 특정한 사물(상품)과 연관짓는다는 점이다. DKNY, 에비앙, 96년식 모리스, 쁘와종 등이 그것인데 유경의 친구도 자신의 남자친구를 삼성, 메디슨, 차병원 식으로 부른다. 물론 이것은 사물과 인간의 친연성 회복과는 거리가 멀고 배수아 역시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김승옥이 <서울의 달빛 0장> 주인공이 새로 구입한 차를 모럴의 한 상징으로 ‘하얀 차’라고 썼던 시대로부터 우리가 상당히 멀어졌음을 일러주고 있으며 동시에 사물과 인간의 위상차가 얼마나 좁혀졌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러면 그럴수록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줄곧 연상시키는데, 마치 그 소설의 주인공 킨케이드에 대한 묘사가 흡사 버버리나 랠프 로렌의 카달로그 문구나 진배없었던 것처럼 사물의 인상, 특히 그것의 카피적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유경과 그 주변인에 대한 관심을 확실하게 차단시킨다. 아주 명료하되 단순화된, 또는 실체적 접근이 상실된 유경과 그들의 일상은 마치 제품 사용설명서처럼 요약될 뿐이며 그것은 지금 이곳의 결혼과 연애와 섹스에 대한 사유의 의지를 가로막는다. 양말을 세탁기 안에다 넣어만 준다면 훨씬 행복해질 텐테, 하는 주부의 말을 어리광이라고 유경은 말하는데, 아마 유경은 결혼이든 동거든 그 누구와도 자질구레한 일상을 나누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어리광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심코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이나 제때 사오지 못한 분유 때문에 두 남녀가 어떻게 서로를 할퀴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러다가 겨우 사랑이란 미몽으로 삶을 유지해나가는지 유경은 조금도 모르고 있다.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아도르노가 말했지만 실로 ‘절망적이게도’ 우리는 절망할 일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진대 김수영의 표현대로 일종의 포즈와 제스처가 절망의 대역이 되어 과잉소비되는 작금의 현실이 표백제로 말갛게 씻어버린 기획영화의 한 장면으로 호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비극이 아닐는지….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아저씨의 시대는 가다

신현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늦장가를 간 후배 녀석이 털어놓은 신혼의 고충 중 하나는 “같이 놀자”는 신부(혹은 아내 혹은 마누라 그리고 ‘아줌마’)의 요구라고 했다. ‘같이 노는’ 일 중에서 최고의 고역은 ‘드라마 같이 봐주기’라는 말도 곁들였다. 맞다. 성화에 못 이겨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으면 종국에는 자신을 한심해지게 만드는 게 드라마다. 그건 마치 마약 같은 거다. 아침 시간대에 KBS에서 MBC로, MBC에서 SBS로 20분마다 채널을 돌려가며 아침 드라마 3개를 작파하는 사람도 보았고, 토요일 8시에 MBC 드라마는 녹화해 놓고 KBS 드라마 보다가 9시가 되면 녹화한 비디오를 틀어대는 사람도 보았고, 낮시간에 유선방송으로 어제 못 본 것들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여자들’이자 ‘아줌마들’이었다(하긴 문화적으로 첨단적인 척하는 ‘언니들’마저 <가을동화> 같은 신파 멜로물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계속했다가는 반여성적이고 반페미니스트적 발언으로 이어질 테고, 그러면 최보은 아줌마 같은 사람한테 된통 당할 게 뻔하니 이쯤에서 얼버무리고 끝내야겠다. 이건 뭐 TV라는 가정오락 수단을 빼앗긴 지 오래인 아저씨의 투덜거림이라고 봐주기 바란다. 한마디로 이제 여덟살된 여자애보다도 ‘채널 선택권’이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 아저씨가 선택권을 되찾고 ‘연속극’에 중독되어버렸다. 다름 아니라 장안의 화제였던 <아줌마> 말이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날도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개비작거리던 사람이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귀가를 서둘렀다. 세 가족이 오순도순 바보상자를 보는 재미는 꽤 쏠쏠했다.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것으로 흥미를 더하려는 의도가 과도한 나머지 중반 이후 리얼리티가 떨어졌다’는 나름의 평도 내렸고, 간혹 ‘이거 나 같은 사람 씹어대는 의도가 다분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이 아저씨, 바보 아님), 그렇게 씹히는 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진보지식인’과 ‘문화평론가’들이 대체로 별볼일 없는 존재로 묘사되는 장면에서는 괜히 키득거리기도 했다(이거 웬 마조히즘적 쾌락인가).

압권은 마지막회 방영분에서 존 레넌(장진구의 발음으로는 ‘전 레넌’)에 대한 진보지식인과 문화평론가의 이전인수식 해석이었다. 존 레넌에 대한 전기까지 책으로 쓴 사람으로서 예전 같으면 ‘지들이 얼마나 안다고 존 레넌을 저 따위로 들먹여’라고 깝죽댔겠지만, 전업주부와 진보운동가로 투신하는 동기를 기발한 발상으로 처리했다는 상찬이 앞섰다(하지만 존 레넌이 한국적 컨텍스트에 위치하면 매우 황당해진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 더 시비를 걸자면 마무리가 약했다. 권선징악, 개과천선, 사필귀정, 용두사미 등의 4자성어에나 어울리는, 뻔하면서도 작위적인 결말이었고, 함께 지켜보던 어떤 ‘아줌마’는 “김국진과 조혜련이 나오는 <테마 게임> 같다”고 말할 지경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아줌마>를 보고 난 느낌은 ‘허세부리는 아저씨들의 전성시대는 끝난 것 같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영웅이 있었다면 (‘일그러진 영웅’을 포함하여) 정치인, 군인, 기업인, 운동지도자 등이었다. 다른 나라라면 혁명가나 과학자도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새로운 영웅은 이런 아저씨들이 아니라 배우, 가수, 스포츠선수 같은 ‘오빠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영웅적으로 살려고 하면 그에게 남은 길이라곤 장진구처럼 망가지고 또 망가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선사하는 것밖에는 없어보인다(뭐 다른 길도 있겠지만 그것도 망가지기는 마찬가지다).

드라마 <아줌마>가 끝난 다음 날 정주영이 타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의 빛나는 영웅이자 김대중 대신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마땅할 업적을 남긴 고인의 명복을 빌지 못할망정 싸가지 없이 장진구식으로 견강부회해 보자. “이 사건은 말야.… 아… 주 상징적이야. 그건 말이지. 작업복 차림에 헬멧을 쓰고 현장을 지휘하던 CEO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거든. 몽헌 아저씨가 현대를 살려내는 건 벅찰걸. 천민 자본주의 상징인 삼성과 현대가 아작나는 꼴을 보고 죽는 게 내 오래된 소원이었어. 하나는 실현되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래 재용 아저씨, 당신만 믿어.”

P.S. 일주일 전에 쓴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신현준 / 아저씨 http://shinhyunjoon.com.ne.kr

 

내가 <아줌마>를 싫어하는 두세 가지 이유

김영하의 이창

화제의 드라마 <아줌마>가 끝났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너무 속보이고 그저 <아줌마>가 끝났다, 라고만 적는다. 나는 드라마 <아줌마>가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먹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나는 먹물이다. 그리고 나는 먹물인 내가 좋다. 나는 지식인으로 교육받았으며 지식인으로서 생각하고 지식인으로서 산다. 또한 나는 지식인으로서 드라마를 본다.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월화드라마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때에도 나는 역시 먹물이다. 왜 <아줌마>가 싫다는 거지? 너 장진구지? 그렇다. 나는 장진구다. 손에 흙이나 기름을 묻혀본 일 없으며 오로지 이 주둥이로만 먹고 사는 존재다. 입만 열면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지만 투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 시간은 떠들 수 있다. 영화 <트래픽>을 보고 나오면서, 환각은 자유 아니냐, 도대체 국가가 개인의 환상에 대해 개입할 권리가 있느냐며 열변을 토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는 마약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게 먹물이다.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 그들이 먹물이다. 군대에 갔다오지 않고도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떠들고 국가가 과연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논쟁할 수 있는 자다. 먹물들은 태생적으로 경험주의를 싫어한다. 한마디로 먹물들은 꼴보기 싫은 자들이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노동은 하지 않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소설이니 철학이니 하는 책들을 들여다보며 젊은 날을 허송하고는 국가와 사회를 향해 왜 우리 같은 고급두뇌들을 썩히느냐며 항의한다. 가족과 아내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아직 우리나라는 여건이 성숙하지 않아서, 혹은 인문학의 깊이가 천박해서 그렇다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줌마>는 그런 먹물들에 대한 태클이었다.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상식들은 장진구의 장광설을 한마디로 일축한다. 이름하여 ‘놀고 있네’ 주먹이다.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요설도 한방에 작살난다.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오삼숙이 싫고 오삼숙의 그 ‘놀고 있네’가 싫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먹물들은 정말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먹물은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이다. 문학도 철학도 영화도 미술도 모두 삶의 잉여다. 그러므로 작가도 영화감독도 철학자도 모두 한때는 장진구였다. 한권의 소설이,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이들은 갖은 요설을 동원하여 주변의 오삼숙들에게 곧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숭고함을 각인시켜야 한다.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만한 장진구가 또 어디 있는가. 공자도, 유비도, 그리고 예수도 알고 보면 한때 모두 장진구였다. 예나 지금이나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상식들은 이런 먹물들을 싫어한다. 좋다. 얼마든지 미워하라. 어차피 우리 먹물들은 사회에 기생하도록 진화해왔으니 이런 상황이 별로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먹물답게) 한마디는 하고 가자. <아줌마>는 분명 문제 있다. 우리를 씹고 싶거든 좀더 정교하고 세련되시라. 세상에 장진구 같은 먹물은 없다. 있다면 머릿속에나 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교활한’ 먹물들이 드라마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장진구를 이렇게 부른다. 저런 바보 같은 놈! 뿐만 아니라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도 없다. 죄짓지 아니하며 언행이 일치하며 언제나 서로를 위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는 그들. 설마. 이것이 1930년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선동극이 아닌 바에야 이런 고결한 인물들이 어찌 한 뭉텅이로 모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종석은 드라마 <아줌마>가 입센의 <인형의 집>에 필적할 작품이며,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새로운 기원이랄 만하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고종석은 보수적 논객들이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선동물로 <아줌마>를 비난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우리 먹물들의 오버일 뿐이다. 이혼을 통해 과거의 구질구질한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드라마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먹물들 특유의 착각이다. 대중은 최소한 먹물들보다는 영악하다. 어쩌면 <아줌마>에 오래도록 찬사를 퍼붓는 자들은 오히려 먹물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아줌마>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너무나 건전하고 너무도 올바르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김영하/ 소설가 youngha@write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