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대한민국

숏컷 | 김봉석 칼럼

‘오마이뉴스’에 들어가 봤더니, 자기 반 학생들이 줄줄이 이민을 간다는 중학교 선생의 글이 있었다. 부모가 그쪽에 일자리를 구한다거나 해서 피치 못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 때문에 일부러 간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의 공교육 자체를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에 대한 전망 자체가 불투명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무사히 사회에 나간다 해도, 과연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영어교육 때문일까.

지난주 <시사 매거진 2580>에서는 강남과 강북의 영어교육을 비교하는 코너가 있었다. 영어시간에는 영어만을 사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뒤, 양자의 풍경은 확연하게 달랐다. 강북에서는 떠듬떠듬이라도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는데, 강남에서는 거의 모두가 능숙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기자가 물어보니 외국에서 살았거나 어학연수 등을 다녀온 학생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외국을 나가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요즘 강남에서는 영어 유치원이 인기라는데, 한달 수강료 42만원짜리가 ‘서민적’이라고 비판받는 실정이라고 한다. 한달에 100만원씩 하는 유치원도 많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연수니, 개인교습이니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중학교, 고등학교 갈수록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부자를 싫어하기는 하지만(그냥 자격지심이다), 그들의 호화로운 행태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저, 그들이 사는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다면, 그 돈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돈을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부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각자의 결단에 달려 있는 문제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만큼, 그들이 소비하는 만큼 ‘정당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당위’다. 그들이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자신들끼리 호화롭게 살아간다면 그들의 ‘호화생활’에 아무런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듯이, 한국사회는 정당하지 않다. 전직 대통령은 언론사의 ‘세금을 깎아주었다’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망해가는 대우는 수십조의 비자금을 빼돌렸고, 대다수의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세는 은행 금리보다 두배는 되는 월세로 점차 바뀌고, 직접세 대신 간접세의 비중이 점점 높아진다는 기사도 어디선가 봤다. 이런데도 한국사회에 희망이 있을까.

영어교육의 문제는 단순한 게 아니다. 영어는 ‘권력’이다. 영어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직업과 직장에는 분명한 차별이 존재한다. 이제는 ‘교육’도 세습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20 대 80의 사회로 고정되는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생각하고 있으면 씁쓸하고, 지겨워지다가 잊어버리고 싶어진다. 도피한다고 사회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편해질 테니. 그 순간만이라도. 아니면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군’의 꿈이라도 꿀까. 권력을 접수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새로운 ‘혁명’의 꿈을.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lotus@hani.co.kr

 


우리 속의 탈레반

“이분법이 모든 경우에 악랄하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이분법이 악랄해지는 것은 그것을 가치의 확고한 서열구조로 바꾸어 분할과 배제의 장치로, 불관용의 근거로, 선악과 우열(優劣)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을 때이다.”

“이분법(二分法) 사라지는 곳에 낙원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문명비평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말이다. 세상 만사를 선명히 두쪽으로 나누고 그 둘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절대의 경계선을 긋는 인간 정신의 관습이 이분법이고 이 이분법을 사유의 방법으로 삼는 것이 이분법적 사고이다. 선/악, 백/흑, 남/여, 이성/감성, 아(我)/타(他)… 이런 개념쌍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천가지 이분법의 일부이다. 많은 경우 이분법은 배제와 분할, 억압과 소외의 논리가 되어 살인, 인종청소, 전쟁, 파괴를 정당화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발칸반도에서의 인종청소, 중세 교회의 마녀사냥,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분리 등은 이분법이 세상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그 이분법을 무너뜨려야 낙원이 온다는 바르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 이분법 무너뜨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이 수만년에 걸쳐 적응하며 살아온 자연계의 질서 자체가 이분화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해와 달, 낮과 밤,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자연환경의 이런 이분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동안 인간의 머리 자체가 이분법을 일종의 사유구조로 고착시킨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지성들은 이분법이 불변 구조가 아니라 정신 관습이 만들어낸 장치이자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분법이 모든 경우에 악랄하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로서, 어떤 복잡성의 인식에 이르기 위한 발견적 수단으로, 혹은 갈등구조를 만드는 드라마의 방법으로 각각 유용한 때가 있다. 이분법이 악랄해지는 것은 그것을 가치의 확고한 서열구조로 바꾸어 분할과 배제의 장치로, 불관용의 근거로, 선악과 우열(優劣)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을 때이다.
최근 지구촌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리반(Taliban 탈레반??? 확인) 정권에 의한 바미안 석불 파괴 행위에 깜짝 놀라고 있다. 석불들은 무슨 공군 사격훈련용 표적처럼 기총 소사를 받아 벌집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이너마이트에 날아가 먼지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석불의 수난을 보고 있자면 지구촌이란 데가 아직도 얼마나 관용의 능력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탈리반 정권으로서는 서방세계에 대해 분노할 수십가지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석불 파괴로 표현될 때 세계 공동체는 탈리반 정권의 ‘분노할 수 있는 자격’ 자체를 불신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전(經典)으로 사는 사회’를 지키려는 귀중한 정신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슬람 문명이다. 그 문명은 배제와 불관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탈리반 지도자들이 파괴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쿠란(Quran) 경전의 한 구절(‘우상숭배금지’)에서 찾는다고 굳이 주장한다면, 그들은 이슬람의 훨씬 큰 보편적 정신보다는 광신(狂信)에 더 충실하다. 경전의 문자적 해석 이상의 수준으로는 결코 올라가지 못하는 정신상태, ‘나’ 속에 ‘남’을 포함시키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가 ‘광신’이다.
지금 지구촌은 ‘타자(他者)에 대한 존중’의 윤리적, 정신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고, 성숙한 사회일수록 시민들이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언론매체, 교육, 대중문화 등 거의 모든 가용자원들을 동원하고 있다. 일부 할리우드영화와 오락게임을 제외하고는 선당(善堂- 이런 용어는 없지만 만들어 쓰자)과 악당을 확고한 이분법으로 갈라쳐 “악당에게는 오직 죽음을”이라는 유치한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문화생산물은 없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이분법보다 타자의 이해와 존중을 가르치는 쪽으로 제작되고 있다.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위상(位相)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은 아직도 멀어보인다. 개인의 불관용보다는 조직, 국가, 체제에 의한 불관용이 더 무섭고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문이다. 지금 우리는 탈리반(원래 페르시아어로 ‘쿠란 경전을 공부하는 학생’의 의미)을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손가락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 속의 탈리반은 얼마나 많은가!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