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지영

출연 : 독고영재, 최민수

 현실이라는 대척점을 벗으로 삼지 않은 이상 속에서 한 인간이 파멸하는 과정은 끔찍하지만 슬프다.

 명길과 현숙이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대편을 병석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병석이 악마인 이유는 병석이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을 너무나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빛은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듯이 참혹한 현실은 더욱더 찬란한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빛이 꺼져 버리면 그림자도 소멸하듯이 이상은 현실에서 발을 땔 때 자연히 소멸한다.

 그것은 죄악일 것이나 나약한 인간의 슬픈 운명일 수도 있다.

 비참의 한가운데서 영화가 선물하는 가상의 상찬에 메달리는 병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듯이. 악마임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듯이.

 그나저나 나는 시네필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병석 일당만큼도 영화를 모른다.

감독 : 노라 에프론
출연 : 탐 행크스, 멕 라이언, 그렉 키니어

근 한달 반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영화 감상을 할 기회가 없었다. 방학을 맞아 꾸준히 영화를 볼 것을 다짐하며 그 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을 영화를 무지 고민했다. 우선 첫 영화는 이후의 식욕을 돋구어줄 수 있는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했다. 애피타이저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각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볍거나 그와 반대로 대단한 집중을 요하는 묵직한 영화가 적당했다. 그러나 비디오 대여점에 무작정 들어가 이것저것 고르는데 이거다 싶은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런 날이 있다. 막연히 영화는 보고 싶은데 썩 내키는 영화들은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 날 말이다. 그렇게 대여점 안을 방황하다 잡힌 건 유브 갓 메일. 왜 이 영화가 나의 영화 감상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하는지 마땅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나 한때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멕 라이언 표 영화는 그런대로 눈감아줄 만한 면죄부를 품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로 잘 알려진 에프론 자매의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케슬린 켈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뉴욕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애정이 담겨 있는 ‘길모퉁이 서점’이 대형 체인점 폭스 서점으로 인해 문을 닫을 위협에 놓인다. 케슬린이 남자친구 몰래 이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버 남자친구 NY152는 케슬린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게 되지만, 실은 NY152는 폭스 서점의 사장 조 폭스이다. 원수지간처럼 지내던 케슬린과 조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익명의 공간인 온라인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앙숙이지만 온라인에서 SHOPGIRL과 NY152로 만날 때에는 더없는 조언자이자 사랑스런 친구이다. 결국은 폭스 서점에 밀려 길모퉁이 서점은 문을 닫지만 케슬린은 온라인의 사랑으로 오프라인의 조에게 화해를 구하고 사랑에 골인한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대자본가에게 소규모 자영업자가 무릎을 꿇는 씁쓸한 얘기라는 점이다. 그나마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상점은 박리다매로 승부를 걸 수 있는 공룡의 발에 뭉개진다. 처참하게 뭉개지지만 영화는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일말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그저 쇼맨쉽에 불과하다. 케슬린은 결국 가게를 잃고 개인적인 동화 집필에 들어간다. 폭스 서점은 승리를 구가하고 조는 케슬린에게 사랑이라는 선물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폭력을 희석시킨다. 도식적으로 보건대 점점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내미는 공격적·폭력적 대자본의 승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일관되게 관철된다.

그러나 멕 라이언의 귀여움은 여전하다. 그녀의 총총 걸음과 장난끼 섞인 천진한 미소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랑스러운 요소이다. 에프론 자매의 손에서 나온 걸쭉한 대사들도 한몫을 한다. 얼굴에 난 152개의 점을 뽑고 생긴 곰보 자국 152개 있는 남자…(조), 나에게 152가지의 길을 알려주는 남자(케슬린) 등의 대사는 달콤한 사랑스러움을 이 영화에 심어준다. 거기다 길모퉁이 서점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추억들은 감상적인 애잔함마저 가볍게 불러 일으킨다.

아, 하지만 그러한 달콤함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친절한 얼굴을 한 대자본의 승리를 위해 연출된 가식에 불과할지니. 케슬린은 어떻게 자신의 생계 기반을 파괴한 남자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는 공적 영역에서의 냉정함과 사적 영역에서의 다정다감한 인간미를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판타지 속에 스며든 메시지란 것이 단지 누추하고 비루한 현실 원칙의 당연함을 설파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찌 이 영화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랑은 들러리에 불과하고 냉혹한 현실이 주가 되어 버린 이 영화는 에프론 자매의 영화가 실은 별 얘기, 별 생각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추악함을 사랑스러움으로 가리고 있는 유브 갓 메일은 미국 온라인계의 대기업 AOL사의 홍보용 영화로서 최적격이다. 라이언의 사랑스러움을 나는 그저 겉모습만 즐길 뿐이다.

오늘, 2001년 5월 20일 나 즉자는 두 명의 아리따운 여성과 함께

시네큐브 광화문이라는 극장에 가서

얼마전부터 보고 싶었던 프랑스의 실루엣 애니메이션, < 프린스 앤 프린세스>를 보았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은 전혀 없었다. 프랑스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는 것 밖에. 그냥 막연히 영화가 예쁠 것 같아서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풍의 만화영화와 뭔가 색다를 것 같아서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막연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디즈니의 3차원 애니메이션이 아닌데 밋밋하고 지루하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은 그러나 기우였다.

그림자의 움직임, 배경화면의 색채 등의 실루엣들…..
그리고 매혹적인 영화음악 – 꼭 사운드트랙 음반을 사고 싶다.
그리고 6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있었는데
하나, 하나가 그렇게 재미있고 기발하고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 유머로 가득했는데, 이것이 미국식이 아닌 유럽풍의 유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놀라운 상상력!

-비약일지 모르지만, 카프카의 < 변신>과 같은 기발한 그 상상력 더구나 재치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