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U

감독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주연 : 줄리엣 비노쉬
음악 :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소유하는 것은 동시에 반대로 그 소유 대상에 자신이 귀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대개 그 소유 또는 귀속이라는 것을 영원하리라 믿고 싶어하고 또 그 영원의 상태를 유지하려 애를 쓴다.
소유하거나 귀속되는 대상은 자신의 의미 또는 본질을 규정해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유, 귀속의 영원성이란 하나의 의미 또는 본질로 고착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한다기보다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줄리는 자신이 소유하면서 동시에 귀속의 대상이 되었던 남편과 딸이 영원할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상당 부분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일순간 그 대상을 동시에 상실한 상태, 그 상태에서 줄리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해 줄 대상을 잃어버려 한동안 그 영원에 대해 집착하면서 방황하지만 특정 계기를 통해 – 남편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 그 영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규정하게 된다.(따라서 이 영화에서 줄리가 자유의 상태로, 또는 대자의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은 남편의 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시점부터 – 물론 충격이 분노로, 분노가 소유 또는 귀속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 더 필요하겠지만 도식적으로 본다면 – 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영화가 자유라는 큰 틀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이러한 줄리의 삶의 변화는 자유의 상을 그려내기 위한 소묘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말을 반복하자면, 자유는 소유와 귀속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자기 아이덴티티를 타자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것은 영원한 불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며 오직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런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유도 귀속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상태이다. 소유와 귀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통한 스님들의 선문답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이 소유와 귀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들렸다면 위의 말은 위험한, 아니 불가능한 주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만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본질을 규정해 나간다고 하는 말도 불가능한 임무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아직까지 나에게는 딜레마이다. 영화 속 줄리도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수영장 신이다. 푸른 물만이 존재하는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줄리가 자유로이 유영한다. 그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떻게 수영할지 자신이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그 선택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수영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멀리서 잡은 카메라는 수영장 전체를 비춘다. 그 장면에서 줄리는 넓지만 한정되어 있는, 즉 수영장이라는 그녀만의 공간 안에서만 자유롭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만은 자유란 획득될 수 없고 설령 획득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수영장 바깥의 세계는 그리 고요하고 평화롭지 못하다. 그리고 바깥 세계는 줄리만의 수영장을 너무나도 쉽게 침범해 들어온다. 자유란 그렇다면 어느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다시 말해 자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질문은 아직 쉽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ROUGE

감독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 이렌느 야곱
음악 : 반덴 부덴마이어(즈비그뉴 프라이즈너)

 1. 붉은 색은 박애이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규정하고 시작하는 의미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키에슬로프스키에 의해 창조된 세계이며 그 세계 안에서 이 영화의 의미는 완전해진다. 그야말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극적이지 못한 영화가 그의 세계 안에서 의미심장한 생명을 지니게 된다.

 2. 블루에서도, 화이트에서도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각 영화의 색조는 필터를 통해서든 조명이나 섬광을 통해서든 의도적으로 어느 순간 화면을 장악한다. 문득문득 내던져지는 그 빛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아니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이미지에서 의미를 구하려 한다. 그 의미는, 대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 안에서는 온전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의 세계를 벗어나면 아무런 의미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의미를 원래 지니는 것일 수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에다 진실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일 수도 있고 진실을 거짓으로 판단해 버릴 수도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의미로 가득하다. 각 시퀀스, 컷, 쇼트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서 동시에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영화를 보는 동안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실을 던져주지만 동시에 거짓이기도 하다. 유의미하면서 또한 무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세계는 현실이자 환상이며 참이자 거짓이다. 그는 진실을 탐구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회의하는 것이다.

 3. 레드에서는, 물론 붉은 색이 문득문득 화면을 뒤엎는다. 그것은 때로는 자연광(햇빛)이 되고 실내등이 되면서 우리 눈을 자극한다. 동시에 발렌틴이 모델인 거대한 현수막 광고를 통해서도 강한 색상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것은 일면 붉은 색, Red가 박애라는 의미로 침잠할 때,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럼 박애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도적인 색상의 이미지이며 나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려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점잖은 부추김이고 동시에 극에 대한 몰입을 거스르는 각성제이다. 화면에 던져지는 색조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세계와도 다른 공간이며, 영화를 보고 있는 나와도 다른 공간이다. 그것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공간이며 그러한 방식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영화와 나의 대화 과정에 참여한다.

 4. 그럼 박애란 무엇인가.
 발렌틴은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아니, 사랑의 존재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다치게 된 주인 모를 개를 걱정하고, 타인에 의해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익명의 타자들을 보호하려 하며 그러한 넘쳐나는 사랑의 힘으로 늙은 퇴직 판사에게 생의 의미를 되찾아 준다.

 늙은 퇴직 판사는 사랑을 잃어버렸었다. 그는 사랑했던,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었고 그때부터 여성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판사였으되 사심에 의해 판사의 권력으로 복수를 했고 그 일로 조기 퇴직을 해 버렸다. 그는 그 때쯤부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행위에 대해 회의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려 했던 자신에 대해 경멸하는 데 이르렀던 그는 동시에 타인, 아니 타자에 대한 애정도 상실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잠재해 있었다.

 이 영화는 우연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연은 필연이며 운명이다. 어떤 사건이 아무런 개연성 없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영화 전체의 흐름에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또는 존재들도 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발렌틴은 그러한 우연을 부여잡는다. 그녀는 매순간의 우연적일 것같은 일도 그 자체로 사랑한다. 그녀는 매일 아침 슬롯 머신을 튕기며 하루의 운명을 점쳐 본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을 우연 그 자체로, 무의미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우연을 부여잡는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논리에 의해 타자를 부여잡는다는 말과 상응한다. 그녀는 항상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타자들에 대해 관심을 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발렌틴의 표정이라 할 수 있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는 때묻지 않은 진지함의 눈길은 타자에 대한 애정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우연에서 운명을 찾는 것은 자신의 존재 사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바깥에 대한 관심어린 애정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필연성이나 운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선 사랑이란 그 울타리 안을 사랑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동일한 의미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박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거의 근접해 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자아와 타자는 분리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개체는 전체와 필연적 얼개 속에서 상관되는 것이며 하나의 주체는 또다른 그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결국 박애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요건이 된다.

 자유와 평등은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유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자아라는 울타리가 타자와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애란 하나의 주체가 지니는 가치를 이끌어내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은 레드를 통해 진정으로 통합된 결을 지니게 된다.

5. 병을 쓰레기통에다 집어넣으려 애쓰는 가련한 노파는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이전의 ‘블루’, ‘화이트’에서는 주인공은 그 노파를 지긋이 바라보며 웃음 지을 뿐이다. 그런 관조를 통해 주인공은 문득 하나의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고는 했다. 이 영화에서 발렌틴은 그 가련한 노파를 그냥 두고 지켜보지 않는다. 그녀는 노파에게 다가가 그 힘겨운 작업을 도와준다. 그렇게 그 연결 고리는 레드에서 한차원 고양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6. 앞에서 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의 기반이라는 요지의 말은 마지막 장면에서 증명된다. 세 영화의 각 인물들은 배 조난 사고를 통해 한 화면에 잡힌다. 그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하지만 그렇게 필연적인 고리를 형성하며 진정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7. 발렌틴의 옆집에 사는 판사 지망생 청년은 극중극처럼 간간이 제시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 청년은 퇴직 판사의 젊은 시절이다. 발렌틴과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퇴직 판사의 또다른 모습은 – 시간과 공간이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 한 존재를 두 겹으로 만들면서 발렌틴에게로 겹쳐 놓으면서 앞에서 말한 존재를 가능케 하는 가치로서의 박애, 우연과 필연의 통합성이라는 말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말해 준다.

 퇴직 판사와 예비 판사는 발렌틴에 의해 사랑을 재발견하고 진정한 존재감을 맛볼 것이다. (예비 판사는 조난 사고의 구조 작업에서 발렌틴과 함께 구조됨으로써 그러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8. 발렌틴은 천사이며 동시에 구원이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행위 뿐이다.

결혼피로연

감독 : 이안

출연 : 랑웅, Mitchell Lichtenstein, 조문선(Winston Chao), May Chin, 김소매

우리는 이 세상 위에 홀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보통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다. 생각보다 세상은 세밀하게 조직되어 있고 어떠한 출구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그 그물망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리도록 만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좌절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은 꽤나 동양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대답은 좌절도 저항도 아니고 그 가운데도 아니면서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체념도 아닌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결혼피로연은 내가 알기로는 이안 감독의 소위 ‘아버지 3부작’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미국으로 진출했던가. 아무튼 서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한 이유가 이 영화 안에는 긍정, 부정이 뒤섞인 채 스며들어 있다.

고위동은 동성애자이다. 그는 대만에서 살다가 좋은 아버지를 만난 덕에 미국으로 건너와 생각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대만에 있는 부모님은 도입부에 나오는 바벨의 짓누름과 같이 일반과 구별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한 강한 억압요소가 되고 있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부모의 존재는 기존 사회의 조밀한 그물망을 뜻한다. 그는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를 이어주길 바라는 부모의 바램은 그의 성향과 충돌하고 그는 그 바램을 부정해 내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위장결혼은 묘한 긴장감을 안겨다 준다. 위동의 부모는 위동의 실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마냥 흡족해 한다. 위동과 위위는 다정한 척 하지만 속앓이를 하고 있고 위동의 가시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애인 사이먼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다. 이 묘한 긴장감 속에서 치러지는 성대한 피로연은 일면 흥겨우면서도 나와 사회가 충돌하고 내가 사회에 의해 끌려다니는 피로한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성을 억압해 온 결과입니다.’ 시끌벅적 중국의 피로연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와도 같은 유쾌한 피로연 사이에 툭 던지는 한 하객의 이 한마디는 감독의 심중을 찌른다. 피로연은 유쾌하지만 그 유쾌함은 내가 남을 괴롭히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위동과 위위는 그 안에서 숨막혀 한다. 위위는 영주권 획득을 위해 이처럼 기만적인 일을 저지른 데 대해 마냥 넋나간 듯이 웃어 대기만 하고 위동은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타인들의, 사회의 요구에 억지 부응하느라 기력이 소진한 상태가 된다.

피로연을 치르고 심신이 피로해진 위동의 충격적인 고백 한마디는 위동의 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위동을 질책하고 경멸하지 않는다. 똑같이 위위에 대해서도 증오를 비치지 않는다. 일종의 정이라는 것이 그 화해될 수 없는 차이를 보듬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정에 의한 화해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그러나 소위 ‘아버지 3부작’ 중의 한 작품이라면 아버지에게로 관심을 돌릴 법도 하다. 과연 아버지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 영화의 아버지는 어떠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몸이 쇄약해진 아버지는 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내색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내색을 하면 대를 이어야 하는 자신의 어줍잖은 의무가 성취되지 않을 것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서먹해질 것이며 혼란만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유가 기회주의적이고 미운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 알면서도 눈감고,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하며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미묘한 지점에 서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위동에게 고백한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부모님이 억지로 장가를 보내려 한 것에 반항하려 가출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그가 위동에게 대를 잇는다는 책무를 본의 아니게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의무는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을 쉬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기존의 질서란 그렇게 쉽게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위해, 또는 국가를 위해 힘써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시달릴대로 시달려 왔고 이제는 병약해진 상태이지만 그제서야 당위와 당연의 차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그 지점에서 그는 기존의 것과 그 반대의 것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나왔는가? 그 해답이란 우리가 배워온 것처럼 명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머리로서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지혜이고 대개 그것은 깔끔한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상투적이고 적당히 볼거리를 제공하면서도 그 안에 삶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을 이안도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서 있는 지점에 함몰되지 않고 그 지점마저 관조할 수 있는 달관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은 적당히 마모된 인생 속에서 피로와 함께 다가오는 체득된 지혜에서 가능한 모습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인정과 조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공항 입구로 들어간다. 이제 다 드러난 진실, 그러나 덮어진 진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위동과 위위, 사이먼을 뒤로 하고 그는 몸 수색을 받는다. 탐지기를 들이미는 공항 직원 앞에서 서서히 손을 들어보이는 슬로우 모션의 마지막 장면은 – 그것이 일반적인 속도로 찍혔다면 경박한 복종의 모습이 될 것이다 – , 그래서 나에게는 이렇게 해석된다. ‘세상은 나에게 이처럼 강요하네. 이것 말고 저것도 있는데도. 나는 그것만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세상이 강요하는 그것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도 알고 있네. 그 건널 수 없는 강 한 가운데서 나는 다만 손을 들어줄 뿐, 체념도 저항도 아닌 인정의 의미로…’

말로써 다 풀어낼 수 없는 맛이 한문에 스며 있듯 이러한 동양적 인간관에 대해 서구 관객과 비평가들은 매혹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매혹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맛이 이 영화에도 숨어있는 듯 하다.

이안은 이 영화를 더 나은 조건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해외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를 빌어 본다면 그는 위동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한마디 툭 내뱉을 것만 같다. ‘그건…나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