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필립 카우프먼

출연: 제프리 러쉬, 케이트 윈슬렛, 조아퀸 피닉스, 마이클 케인

이 영화는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낳게 한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 후작의 광기 서린 성적 예술적 집착에 관한 묘사를 한다. 잡지를 통해 소개받은 사드 후작의 면면에는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나 가학적(심하면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은, 구질구질함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면면은 생략하고 들어간다. 필립 카우프먼이 말하려는 것은 광기의 억압, 성의 억압,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고 – 사드 후작의 성행위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광기, 특히 예술에 더 비중이 실린 듯한, 제목도 Quills(깃 촉)이 아닌가 – 사드 후작은 그 테마를 위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보는 내내 떠오르는 것은 작년에 읽었던, 고전주의 시대부터 정신 병리학에 걸치기까지 광기를 다스려 온 유럽의 이성과 권력…이 거대한 테마를 소상하게 고고학적 자료를 들이밀고 폭로했던 푸코의 ‘광기의 역사’였다. 물론 이 영화가 이 책과 요철과 같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예의 경험으로 인해 –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읽은 책은 꽤나 내 생각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듯 하다 – 그 책의 내용에 맞도록 이 영화를 재단하고 있었다. 아차 하여 정신차리고 보려 했지만 많이 늦은 듯 했다.

때는 아마도 비이성, 특히 광기를 일종의 ‘질병’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인 듯하다. 아니, 대화와 같은 정신적 방법을 통해 치료하려고 하는 젊은 병원 원장 쿨미에 신부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 후인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광인을 병자로 간주하고 일종의 ‘병원’ 시설에서 보호하고 치료하여 ‘정상인’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했나 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육체적,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 그것을 통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별하고 자신은 지금 정상적이지 못하며 빨리 이 비정상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함을 경각시키고 정상으로 돌이킬 수 있다고 우직하게 믿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이라는 녀석의 합리적 판단이었나 보다. 아무튼 그 시기에 사드 후작은 온갖 기행(물론 성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거기에 대한 묘사는 없다)을 저지르며 광인으로 취급받았는지 쿨미에 신부가 있는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는 성적 욕망을 실제 섹스로 푸는 것보다는 펜끝으로 풀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펜끝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얼마나 변태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고 얼마나 사람들이 그 언어로 인해 열광할지를 아는지라 나폴레옹(키 정말 작게 나온다. 의자에 앉아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니…)의 모종의 조치를 당한 것이다. 아무튼 그의 쓰고자 하는 욕망은 갇혀 있는 방 안에서는 가능하나 밖으로의 유출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병원의 하녀 매들린을 통해 사드 후작의 글이 밖으로 나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판이니 쿨미에 신부는 그의 성적 욕망의 배출구를 모두 차단하기에 이르지만, 사드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는 억압당하는 성적 욕망을 부단히 표현하며 세상의 권력에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저항을 통해 억압당하는 진실을 밝히는, 즉 일종의 세상의 또다른 진리를 밝히는 예술에 대한 그의 강인한 의지가 그려진다. 그러나 자신의 글로 인해 충동받은 환자 한 명이 매들린을 그 글대로 잔인하게 죽이는 데에 이르러서는 방기된 자유에 대한 신중함을 권고하는 듯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거의 일관되게 이성의 권력적, 폭력적 횡포를 폭로하고 예술적, 비이성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 웅변한다. 이는 가학적 변태성이라는 사디즘의 원조 사드 후작보다 더 가학적인 이성적 정신병리학 의사 꼴라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정신적 평온과 욕망의 억제를 부탁하던 그 침착하고 이성적인(또는 종교적인?) 쿨미에 신부가 종국에는 사드 후작의 뒤를 잇게 되는 결말부의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 또한 이성적 지식만이 우리의 인식을 독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 방기된 인식은 재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온 몸을 원고지 삼아 소설을 써 버리고 자신의 몸이 곧 소설책이 되어 버린 사드 후작은 거만하고도 광기에 찬 표정으로 웃음지으며 서 있다.

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마틴 쉰

간만에 나타난 과 친구 녀석이 영화 한 편 때리잔다. 무언가 육중한 걸로. 온갖 육중한 영화를 고르고 고르다 결국 다 대여된 것에 실망하면서 선택한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 제목부터 묵직하다. 말론 브란도라는 이름도 꽤나 그 무게를 더하고 있다. 베트남의 열대숲을 비추는 화면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간다. 그 육중함을 짊어지고.

베트남전 영화를 볼 때 항상 유념하는 것이 있다. 보통 전쟁 영화가 그러하듯 전쟁의 참상을 담아내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 본성의 경계를 암묵적으로 설파하지만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는 그 전쟁의 특성상 피해자와 가해자, 특히 가해자임에도 일종의 허무함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이 요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대개의 베트남전 영화는 양키들의 허무함과 죄의식으로 겉 포장을 한 것 같지만 실제 잘 씹다보면 뭔가 캥기는 게 나오기 쉽상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인지하면서 영화를 봐 온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베트남전 영화를 만든다는 그 사실 자체가 가해자의 눈으로 보는 입지의 취약성을 항상 담지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태생적으로 가해자의 눈이란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명이나 반성 말고, 진정으로 피해자인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볼 수는 없는 아닌가. 그러나 이유없이, 정말 이유없이 민간인을 죽이는 장면이나 전장에서 사치스런 서핑을 즐기려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장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광기같은 잔인성에 대해 애둘러 사죄하는 듯 하다. 또 하나 철학적인 전쟁 영화라면 빠질 수 없는 전쟁을 통한 인간 본성의 성찰. 그것에 대한 심각하고 진지한 표현이 빠진다면 전쟁 영화는 골 텅 빈 스펙터클의 광기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이 영화에서 군이라는 Fucking할 곳의 기계적 위계질서 속에서 명령에 죽이고 명령에 죽으며 명령에 사는, 개인의 자유의지는 망가지고 짓밟히며 산산조각 나는 참상(모든 조직은 그 올가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 할지도 모를 일이다)을 검은 그림자 속의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뛰어난 능력을 소지한 군인이었지만 이중 스파이 베트남인 3명을 살인하고 군 계통의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단독 작전을 감행한 커츠 대령을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띄고 기나긴 지옥의 여정을 시작하는 마틴 쉰이 거쳐가는 지옥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질문을 낳고 공감을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커츠라는 인물은 서서히 검은 그림자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군인이었고, 명령에 사람을 죽였지만 그 살인이 가져다 주는 개인에 대한 떨쳐낼 수 없는 죄의식마저 군이, 국가가 대신할 수 없었고 남을 죽이는 것만큼의 자기학대를 할 수밖에 없었음이 마틴 쉰이 처한 현실과 맞닿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60년대 베트남이라는 공간에 있었던 젊은이들이 함께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할 지옥이었다. 결국 지옥이란 내가 나일 수 없고 사람이 의식을 위해 제단에 오른, 무참히 살이 잘려 나가는 소만도 못한 그 순간의 자신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나는 왜, 무슨 이유로 이 지옥 속에 떨어져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는가.

이같은 육중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욕구불만의 분노를 느낀다. 자유민주 진영 수호라는 광기의 다른 이름을 한 구호 아래 저질러 놓은 전쟁을 놓고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타자의 눈에서 본 그들의 몰골은 없는가. 양키 자신이 비루하고 잔인한 야수임을 왜 직접화법으로 고백하지 않는가. 자유의지의 상실과 그 지옥의 순례를 통한 회복의 노력을 하는 공간에는 왜 아메리칸만이 존재하고 베트남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왜 아직도 양키 새끼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국가로 자임하며 세계를 주무르고 있으며 우리는 찍소리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가. 운운…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볼 수 있는 베트남전 영화는 양키들이 만든 것뿐인 작은 미국의 한 주에서 살고 있는 것을. 베트남에서 만든 베트남전 영화는 없는가. 그 영화들에서 묘사할 잔인한 괴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

레이닝 스톤

감독 : 켄 로치

출연 : 브루스 존스, 줄리 브라운

간만에 세진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장예모의 영화를 부르던 그 녀석에게 떫더름한 반응을 보이자 불쑥 켄 로치의 영화를 들고 나선다. 빌리 앨리엇을 보고 켄 로치로 넘어가 보자고 생각하던 나는 환영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하숙방에 보기 싫게 자리하고 있는 중고 TV의 14인치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의미로 가득찬 이미지로 장식되지도 않는 영화가 가끔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그 동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와 교감 가능한 사실성,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픽션 속에 현실성이 담겨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이다. 아마도 레이닝 스톤은 그러한 경로로 나에게 감동을 안겨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적이라는 말, 특히 영화 속에서 그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영화 속의 사실성이란 결국 어떤 꾸밈 – 조명이나 미장센, 배우의 연기 등등 작위적 장치 모든 것 – 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사실성이란 달음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벼랑 앞에 서게 된다. 아무리 피사체를 꾸밈 없이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다 하여도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담기는 순간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의미를 지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프레임 안의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편집이 작위적이라는 의미에서 영화가 시작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컷 하나 없이 이어놓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무편집으로 편집되어 버린다. 결국은 형식에 있어서의 사실성이란 내용에 있어서의 사실성이 없이는 그 본연의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곳을 재인식시켜줄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영화의 사실성을 결정짓는 열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를 절망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까발린다. 실직 노동자 토미와 밥이 소수를 택하고 다수를 버린 자본주의에 대해 궐기하듯 이리뛰고 저리뛰며 보여준다. 아직 빵과 포도주가 왜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성찬식 드레스조차 사 주기 힘들어 노심초사하는 밥, 그에게 종교적 신념은 돈 앞에서 너무나도 철없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빚진 밥의 집에 쳐들어와 그의 아내와 어여쁜 딸을 위협하며 횡패를 부리는 고리대금업자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중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이곳을 그대로 체감하게 된다. 노동자의 일주일은, 더구나 실직한 그들의 일주일은 쉬지 않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적인 삶일 뿐이다.
고리대금업자 탠지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짓밟힌 밥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범죄자의 대열에 끼어든다. 한계선상에 와 있는 인생 앞에서 밥 뿐만 아니라 토미의 딸도 이웃 사람들도 점점 범죄, 술, 마약으로 망가져만 간다. 누가 범죄자이고 누가 선한 시민인가.
왜 현실이 이러한가. 왜 우리는 이같은 땅 위에서 비루하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혀야 하는 척박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가. 캔 로치가 보여주는 이 비루고 팍팍한 주인공의 몇 일간은 끊임없이 그 질문만을 되뇌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밥의 장인어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제도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돈 앞에서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음을 여실히 확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있을 때 이 말을 듣노라면 아직도 소심하고 싱거운 나까지도 기꺼이 그의 진영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의 몸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나눠 준 예수의 삶은, 그 숭고한 정신은 과연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없단 말인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을 나눠주는 신부와 엄숙하고도 처연하게 그것을 받는 밥의 마지막 장면은 그 말을 수없이 되뇌이게 한다.

켄 로치는 신부가 되어 밥의 삶을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