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들리 스코트
음악 한스 짐머, 리사 제랄드
출연 러셀 크로우, 조와킨 피닉스, 코니 닐슨, 리차드 해리스, 자이몬 혼수

글라디에이터

영화 좀 좋아한다는 이들은 다 봤을 글라디에이터를 이제서야 보다. 스펙터클은 스크린으로 즐기는 것이 제격임을 아는대도 우습지만 스펙터클은 극장에서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비디오로 출시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

이 영화를 본 느낌? 역사와 권력에 대한 서사시적 우화. 너무 거창한 것 같으나 느낀 바는 이것이었다.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절대 권력을 쥐고 있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체득한,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권력에 대한 거의 본능적이라 할 정도의 탐욕을 지녔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네가지 덕목 그 어느 것도 지니지 못한 그의 아들 코모두스, 그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우렐리우스가 절대 왕정을 접고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시무스 장군을 적임자로 선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그런데 막시무스는 로맨티스트이자 휴머니스트이다. 또한 일면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띄는 것도 같다.(나의 자의적인 판단이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눈꼽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철학자이자 성군인 듯한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신의에 바탕한 충성을 바칠 뿐. 그러나 그것이 코모두스에겐 달갑지가 않다. 그의 누이이자 유일한 사랑인(근친상간은 고대 비극에서도 나오는 것 아닌가) 루실라마저 막시무스의 몫이니 코모두스에게 막시무스는 그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이다. 이 두 인물 사이의 갈등관계, 고대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설정 아닌가…(아님 말고)

이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리들리 스콧이 말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역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듯 하다.(과연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가 보기에는)  로마의 황제라면 영화 서두에 나오는 자막과 같이 당시 세계 인구의 25%가 속해 있었을 정도로 거대한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 그 최고 권력에 앉고 싶은 욕망이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집중된 권력은 가진 자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핍박당할 수밖에 없게 한다. 공화정이 성립되어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은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자연한 수순.
막시무스는 그 자연적 수순의 역사적 흐름을 이끄는 영웅이다. 물론 인류 역사의 전개라는 것이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고난이 있게 마련.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의 대장군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산다. 그러나 역사는 그 고난을 딛고 새로운 변혁의 기치를 드높이는 법. 콜로세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군중의 지지를 확보한 막시무스는 끝내 코모두스의 폭정을 그의 손으로 단죄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역사의 법칙을 영웅적 삶으로 증명해 낸 막시무스는 죽음의 문을 열고 가족의 품으로 가지만 남은 사람은 역사의 흐름을 계속 꾸려나가야만 한다. ‘이제 평온의 세계로 갔군. 그러나 나는 아직 갈 수 없어.’ 살아 있는 우리는 이 역사를 어디론가로 계속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리들리 스콧은 이런 것을 말하려 한 듯 하다.

사실 영화 첫 전투장면은 그 처참한 살육 광경과 웅장함이 일면 충격을 안겨준다고 하여 기대하였지만, 나에겐 내 눈을 휘감고 뒷통수를 치면서 짜릿하게 할만한 충격은 오지 않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현대 화기의 무서운 위력을(맞으면 그냥 사지가 터져 나가는) 본 터라 고대 병기, 칼과 방패, 투척기, 불화살 등은 그저 고전적 웅장함의 느낌만을 던져줄 정도였다 – 스콧의 스펙터클한 표현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무튼 서구인의 무의식에 담겨 있을 로마 시대에 대한 향수의 욕구는 이렇게 웅장하고 고전적이며 영웅적인 서사시를 통해 채워진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함정도 생각해야 할 듯하다. 과연 역사는 영웅이 만들어 가는 것인가. 역사는 위대한 개개인에 의해 변혁을 이루고 발전 – 이 영화는 역사의 발전을 믿는 듯하다 – 하여 왔는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수호하려던 사람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죽게 했는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는 그 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이끌려 왔으며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수호하려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반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 위에 있어 왔으며 역사는 그들에게 주물린다. 막시무스도 뜻은 이루었으나 권력자 코모두스의 손에 같이 죽음을 맞는다. 권력은 무서운 거다.(그리고 더러운 거다) 아, 그러나 권력도 역사의 흐름은 막지 못한다. 막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그 길을 가고야 만다.
이 영웅 서사시는 단지 이 말을 하려는 우화이면 좋겠다.

Postcards From The Edge1990

감독 : 마이클 니콜스
출연 : 메릴 스트립, 셜리 맥클레인, 데니스 퀘이드, 아넷 베닝, 진 해크먼, 로브 라이너

케이블 TV에서 하던 것을 부실하게나마 흘깃흘깃 보다가 결국은 빠져들어 엔딩까지 보게 되다.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와 같이 헐리웃 뒤의 어둠을 보여줄 것으로 짐작하였으나 결국은 헐리웃 비사가 아니라 세상 사는 이야기인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였다. 뮤지컬 배우로 주가를 올렸던 엄마를 뛰어넘으려는 배우 딸의 그리 녹녹치 않은 살이에 대한 이야기. 딸을 사랑한다고 여기지만 지나치다 싶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치고 올라올 자녀 세대에 대한 방어 의식은 아닌가 싶을 정도인 어머니와 어머니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여기면서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의 벽 앞에서 힘겹게 버텨 내려는 딸, 알콜 중독 어머니와 마약 중독 딸, 묘한 이 모녀관계가 이 영화의 중심축. 부모 세대의 그늘에서 뛰쳐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그곳은 결국 뛰쳐나와야 할 곳이지만 그곳을 벗어난 바깥은 얼마나 험한 곳인지…그리고 자기 품을 뛰쳐나가려는 자녀를 붙잡으려는 부모의 심리는 어떠한 것인지…
영화를 만들어 내는 헐리웃이라는 현장을 배경으로 채택하여 그 생생함을 느낄 수 있고 스타라는 덧칠을 벗겨낸 헐리웃쟁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특기 사항.

무엇보다도 모녀가 주고받는 뛰어난 노래와 연기는 이 영화의 흡인력을 한층더 배가하는 강력장치. 스트립이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나온 것을 환영하며 연 파티에서 보여주는 어머니의 노래 솜씨와 끼,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스트립의 노래 실력 – 그녀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노래를 불렀다!’ 정말 마돈나보다도 나은 걸쭉한 컨츄리였다. 메릴 스트립을 접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녀의 진가를 비로소 인정하고 알 수있었던 영화. 기회 되면 보시라.

누가 영화는 단지 소비하는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누가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은 철부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며 유치하고 일고의 생각의 여지도 없는, 수준 낮아서 어른은 볼 수 없는 그림 놀이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이같은 생각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마디, ‘하야오는 보았는가?’ 그만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어린이에게 꿈을 안기고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 주면서도 어른들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어리석다. 대체로 거의 모든 인간은 하나의 안경 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안경을 갈아치울 생각을 하거나 아예 만화경으로 ‘개량’할 시도를 잘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그 안경을 바꾸어 봤으며 만화경으로 바라볼 엄두를 내기라도 하였는지.
인간은 하나의 안경만으로 세상에 대해 착각을 한다. 모든 인간의 합의하는 것,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도 – 물론 아직도 이 명제의 실현이란 꿈 속의 일이지만 – 그 안경을 통과하면 ‘인간만이 존엄하다’가 되어 버린다. 이 굴절된 명제를 발판으로 삼아 최소한의 이기심이 무한의 이기심이 될 때, 그것이 던져주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는 아마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그려내는 그러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철저히 우려먹고 재탕 삼탕하며 이용해 먹음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할 줄로만 알았던 자연도 이 세상 안에서는 인간을 등져 버린, 더이상의 ‘비전 없음’을 알아차린 존재자들이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자연의 본뜻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자들이고, 이제는 더이상 자연을 그들의 도구로 사용할 자격조차 없는 족속들이다.
하야오가 그리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그런 암울한 비전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보통 SF에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가 인간의 인간성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다면, 하야오의 디스토피아는 확실히 그것을 포함하여 인간의 자연적 본성, 세상에 존재하는 타존재들과의 공생을 위한 조화의 본성 자체의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것의 대명사로 하야오는 곤충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곤충들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딱딱해서 인간이란 그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생명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이 저질러 놓은 죄업인 부해를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로 소리없이 그러나 분명히 정화해 나간다. 그러나 그 원리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또다시 출현할 때 곤충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에서 벗어나 인간을 응징하고야 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은 너그럽지도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한편으로는 잔인하리만치 그냥 그러한 대로 움직이고 존재해 나갈 뿐이라는 인식이 스며있다고 생각된다. 하야오는 그러한 곤충들의 세계를 무채색의 차갑고 딱딱함의 느낌으로 표피를 삼으나, 그 이면에 내재한 촉소의 부드러움, 황·적색의 따뜻함으로 이면을 덧칠하는 탁월한 감각으로 묘사해 낸다.

나우시카는 일면 메시아적 존재이다. 곤충들의 세계와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의 세계 사이에 화해의 가교가 기꺼이 되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포용적이며 생산의 숭고함을 간직한 여성이 그 가교가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행동과 말은 적마저도 포섭하는, 권위적이지 않은 흡인력이 있고 인간성이 자연과 맞닿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곤충을 사랑하고 오염되었으나 발딛고 있는 지구를 사랑하며, 동시에 타자를 존재자로 인식치 못하는 우매한 인간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적인 공동체, 바람계곡 마을이 군사 국가 토르메키아인에 의해 풍지박산 당하고 새로운 생명을 가꾸려던 숲이 망가져 갈 때 나우시카는 이 우매하고 사악한 인간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키우지만 종국에는 인간의 비타협성에 화해의 비전을 제시하고 거대 곤충 오모에게 ‘그래도 소중한,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이해시킨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타인의 사랑에 미치고, 현실의 모순에 닿아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자기 부정을 하고,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이 과정은 하야오가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고뇌해 오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우시카가 화해의 가교가 된다고 해도 과연 인간이 자연과 화해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엔딩의 카타르시스는 부정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연에게서 너무나도 멀리 내달려 오지 않았나라는 의구심에 그 엔딩은 단지 판타스틱한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승화되기가 힘겨워진다(어떤 기사에서 이런 비슷한 평가를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야오는 철학하는 예술가이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날아오르는 판타지가 보여주듯 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희망 있음의 처절한 고집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