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화는 단지 소비하는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누가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은 철부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며 유치하고 일고의 생각의 여지도 없는, 수준 낮아서 어른은 볼 수 없는 그림 놀이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이같은 생각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마디, ‘하야오는 보았는가?’ 그만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어린이에게 꿈을 안기고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 주면서도 어른들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어리석다. 대체로 거의 모든 인간은 하나의 안경 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안경을 갈아치울 생각을 하거나 아예 만화경으로 ‘개량’할 시도를 잘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그 안경을 바꾸어 봤으며 만화경으로 바라볼 엄두를 내기라도 하였는지.
인간은 하나의 안경만으로 세상에 대해 착각을 한다. 모든 인간의 합의하는 것,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도 – 물론 아직도 이 명제의 실현이란 꿈 속의 일이지만 – 그 안경을 통과하면 ‘인간만이 존엄하다’가 되어 버린다. 이 굴절된 명제를 발판으로 삼아 최소한의 이기심이 무한의 이기심이 될 때, 그것이 던져주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는 아마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그려내는 그러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철저히 우려먹고 재탕 삼탕하며 이용해 먹음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할 줄로만 알았던 자연도 이 세상 안에서는 인간을 등져 버린, 더이상의 ‘비전 없음’을 알아차린 존재자들이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자연의 본뜻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자들이고, 이제는 더이상 자연을 그들의 도구로 사용할 자격조차 없는 족속들이다.
하야오가 그리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그런 암울한 비전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보통 SF에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가 인간의 인간성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다면, 하야오의 디스토피아는 확실히 그것을 포함하여 인간의 자연적 본성, 세상에 존재하는 타존재들과의 공생을 위한 조화의 본성 자체의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것의 대명사로 하야오는 곤충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곤충들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딱딱해서 인간이란 그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생명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이 저질러 놓은 죄업인 부해를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로 소리없이 그러나 분명히 정화해 나간다. 그러나 그 원리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또다시 출현할 때 곤충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에서 벗어나 인간을 응징하고야 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은 너그럽지도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한편으로는 잔인하리만치 그냥 그러한 대로 움직이고 존재해 나갈 뿐이라는 인식이 스며있다고 생각된다. 하야오는 그러한 곤충들의 세계를 무채색의 차갑고 딱딱함의 느낌으로 표피를 삼으나, 그 이면에 내재한 촉소의 부드러움, 황·적색의 따뜻함으로 이면을 덧칠하는 탁월한 감각으로 묘사해 낸다.

나우시카는 일면 메시아적 존재이다. 곤충들의 세계와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의 세계 사이에 화해의 가교가 기꺼이 되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포용적이며 생산의 숭고함을 간직한 여성이 그 가교가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행동과 말은 적마저도 포섭하는, 권위적이지 않은 흡인력이 있고 인간성이 자연과 맞닿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곤충을 사랑하고 오염되었으나 발딛고 있는 지구를 사랑하며, 동시에 타자를 존재자로 인식치 못하는 우매한 인간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적인 공동체, 바람계곡 마을이 군사 국가 토르메키아인에 의해 풍지박산 당하고 새로운 생명을 가꾸려던 숲이 망가져 갈 때 나우시카는 이 우매하고 사악한 인간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키우지만 종국에는 인간의 비타협성에 화해의 비전을 제시하고 거대 곤충 오모에게 ‘그래도 소중한,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이해시킨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타인의 사랑에 미치고, 현실의 모순에 닿아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자기 부정을 하고,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이 과정은 하야오가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고뇌해 오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우시카가 화해의 가교가 된다고 해도 과연 인간이 자연과 화해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엔딩의 카타르시스는 부정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연에게서 너무나도 멀리 내달려 오지 않았나라는 의구심에 그 엔딩은 단지 판타스틱한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승화되기가 힘겨워진다(어떤 기사에서 이런 비슷한 평가를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야오는 철학하는 예술가이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날아오르는 판타지가 보여주듯 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희망 있음의 처절한 고집이라는 것이다.

감독 딘 페리섯
제작 드림웍스
주연 시고니 위버, 팀 알렌, 알랜 릭만

영화는 영화를 자가복제한다. 그러면서 그 안은 풍성해진다. 영화를 위한 영화, SF를 위한 영화, 판타지를 위한 판타지.

갤럭시 퀘스트 안에는 현실과 판타지가 여러 겹으로 엇갈려 있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TV SF 시리즈물 갤럭시 퀘스트의 배우들이 이제는 옛 명성으로 사인하는 것으로 근근히 연명하는 엇갈림. 순진한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창조된 판타지를 실제 일어난 일로 알고 있는 엇갈림. 그리고 TV 시리즈물과 똑같이 만들어진 우주선과 모험 안에서 스스로 자신이 연기된 인물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은하 방위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는 엇갈림. 거기다 SF 장르의 관습을 비틀고 패러디하면서도 동시에 전체 구성은 SF의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엇갈림. 겹겹이 이루어진 양차원의 엇갈림은 더더욱 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든다.

갖은 모험 끝에 은하 방위대의 진면모를 보여준 가짜 은하 방위대 대원들은 마지막 순간에서 또한번의 모호하고 서글픈 엇갈림을 맞는다. 외계의 한 종족과 별을 구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지구로 복귀한 지구방위대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들의 프로를 기념하고 축제하는 그곳. 곧 사인회를 치러야 하는 그들이 떠올리는 것들은 실제로는 현실이지만 판타지로 받아들여질 조금 전까지의 일들과 앞으로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야 할 자신들에 대한 서글픈 이미지 파편들일 것이다. 그 순간 악당 새리스의 재등장과 싸움은 더더욱 미묘하게 판타지와 현실이 자리 바꿈을 하면서 – 영화는 어차피 판타지. 그러나 이 영화 안에서 그 싸움은 현실(이라고 약속).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팬들에게 그것은 판타지 – 웃음을 만든다.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오고감을 지켜보노라면 즐겁다. 자신을 위한 판을 벌려놓고 즐기고 노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다. 가짜를 진짜처럼 연기하는 것보다 이건 가짜야 하면서 능청맞게 가짜를 연기하는 것이 솔직하니까 더 재미있다. SF가 자신이 굳어간다고 느낄 때 분명 이 영화를 통해 한껏 몸풀기를 하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거다. 허접 쓰레기 블록 버스터 말고 이런 영화 좀 만드는 데 돈 풀어서 영화 몸풀기에나 썼으면 좋겠다. 자신이 번드르하게 장르를 만들어내지 못할 바에야 기왕의 것들을 반추라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돈 주고 볼 맛이 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영화의 에너지 충전용 영화는 좋게 보이는 거라…

감독 롤프 슈벨
원작 닉 바르코
출연 에리카 마로잔(일로나), 조아킴 크롤(자보), 벤 베커(한스), 스테파노 디오니시(안드라스) 외

참으로 매혹적이다. 일로나가 그렇고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곡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매혹적이다. 빨려들 듯한 그 매혹의 블랙홀에 휩싸인 느낌이다.

실로 예술이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인간과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가 성장해 가는 생명이었다. 안드라스는 ‘우울한 일요일'(여기서는 그 녀석으로 지칭하겠다)을 작곡하였지만 그 녀석이 안드라스에게 던지는 화두는 그 녀석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감성의 단초는 안드라스에게서 출발하였겠지만 그것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선다. 그 의미는 완성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한의 진행형이며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진실을 드러낸다. 언제나 예술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와 닿는 심상으로 우리 내면의 근원을 두드린다.

그 녀석이 던지는 질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 녀석은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갔는가. 안드라스는 그 답을 찾으려 부던히 노력한다. 자신의 창조물이 살인도구가 되는 것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녀석이 던져주는 심상을 더욱 침울한 언어로 덧입히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 답은 안드라스의 삶 그 자체에 있었다.

일로나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지만 ‘줄앤짐’을 연상시키는 리버럴한 사랑의 황금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남자 자보가 일로나에게 매혹된 독일인 사업가 한스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적자생존이란 동물 세계에나 적용되는 말이오. 인간 세상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나는 믿소.’ 그는 일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장사치로서 잇속에 매우 밝은 듯 하지만 일면 피고용자인 안드라스를 친구로서 대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동등한 처지임을 선뜻 인정하는 것으로 보면 보통 떠올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은 아닌 듯 하다. 그의 신념은 독일인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지점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 도구 이상으로 보는 그의 인간됨은 안드라스가 구해내지 못했던 그 녀석의 화두를 어렴풋 잡아내는 데까지 이른다. ‘인간의 존엄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재겨 디딜 틈조차 없다고 느끼면, 정녕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필요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녀석은 침울한 어조로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라스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미로를 헤매다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음을 깨달을 때 미련 없이 그 녀석의 형체를 고스란히 자기 인생의 형체로 옮겨온 것이다.

결국은 그렇구나. 두 가지를 깨달았다. 음악 역시 내가 모르는 언어로 나에게 계속 속삭이고 있었구나, 나는 얼마나 몰취향의 감성을 지녔길래 그 속삭임의 미동조차 느끼지 못하였을까. 수백의 영혼이 그 녀석과의 대화에서 죽음만이 그 시대의 최후의 출구임을 느꼈는데, 나는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영혼이란 말인가. 아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자라고 배워온 이 사회의 몰취향, 무감성을 탓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나의 나태함이 그 앞에서 버티고 있음을 느껴버린다. 하릴없이 주는 것만 받아먹는 나태한 동물.
그래도 나름으로는 영화는 내가 대화할 수 있는 ‘그 녀석’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모호한 생각으로 자위한다. 적어도 나의 언어와 영화의 언어가 만나는 교집합의 공간은 음악의 그것보다는 더 클 것이다라는 식의 안일한 생각.

그래서 과대해석을 하며 이 영화를 이렇게 이해해 버린다. 음악의 언어가 영화의 언어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는 영화, 그것이 시대와의 주고받음을 이루는 영화, 우울한 음악이 정신으로 승화되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