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In the Mood for Love

감독 왕가위
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1998 깐느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
화양연화 2000 깐느영화제 기술상 및 남우주연상 수상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두가풍)
출연 장만옥/양조위

중년의 부부 두 쌍이 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어느날 자신의 아내 또는 남편이 서로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게 배신을 받고 또다른 사랑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려 한다.

중년에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란 힘들고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가볍고 스피디한 요즘 세상에서 보면 ‘집으로 가는 길’의 그들만큼이나 답답하다. 그러나 참고 참고 또 참으면 그들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키노 편집장 정성일 씨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좌파의 이상을 식지 않은 가슴으로 뿜어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인 중의 한 명으로 왕가위를 거론했다. 그는 왕가위의 작품 전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왕가위라는 사람 전체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왕가위는 영화 작품 활동을 통해, 영화와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본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화양연화를 같이 본 이의 말에 의하면 왕가위의 영화는 전체를 다 엮어서 볼 때 한 줄로 꿰어 나아가는 곳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정성일 씨의 말은 빈말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왕가위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가 모자이크처럼 명확치는 않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사랑에 버림받은 남녀의 또다른 사랑 키우기에 촛점이 모여져 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라틴 음악을 지겹게 들으며, 또 전화면에서 본 것 같은 영화 속의 데자뷔를 일으키는 화면들을 반복해서 보며 감정 과잉은 아닌가 할 정도의 분위기를 억지 흡수하며 보았다.

장만옥과 양조위는 방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 같은 날 이사와서 운명일지도 모르는 스침을 반복하며 사랑의 운을 띄운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양조위의 아내가 장만옥의 핸드백과 같은 것을 쓰고 있고 장만옥의 남편이 양조위의 넥타이와 같은 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서로를 보듬으면서부터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위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다가감을 거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향해 나간다.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중년의 유부남, 유부녀 사이의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같이 본 이의 말처럼 상처를 간직하고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타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다가가는 데 서툰 사람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사랑을 잃은 사람의 상처 쓰다듬기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추측하는, 자기 연민의 정서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이별해야 할 순간을 대비할 만큼 소심하고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사랑을 한다. 그래도 그 사랑의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양조위가 머무는 모텔을 나오다 정지하는 장만옥과 양조위처럼, 그 순간은 그냥 그렇게 멈추어 있고 싶은 순간이다. 거기에 라틴 음악의 끈적끈적함과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슬로 모션과 담배를 물고 있는 양조위를 비추는 스탭 프린팅(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다)이 더하여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때가 묘한 그리움의 이미지가 되는 것 같다.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치고는 그 줄거리의 전개가 밋밋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이 영화를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힘은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소심한 그들의 사랑이 주는 아련하고 애타는 정서에 있거나 음악과 화면이 주는 이미지의 정보에 대한 궁금증에 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던져주는 정보의 양이 아직 나의 좁아터진 머리와 가슴으로는 감당하기에는 버거워서 억지춘향격의 생각이거나 잘못 짚은 가닥이 많을 지도 모른다. 대충의 느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다음에 다시 볼 때 보탬이 될 것 같아 긁적여 본다.

아, 그리고 내가 긁적이는 것들이 모두 내가 떠올려 낸 생각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옳은(?) 생각이 아님을 모두들 아시리라 믿는다. 나 역시 보는 눈이 좋지 않아 남의 눈을 빌려 내 느낌이나 생각의 테두리를 가다듬고 어줍잖은 뼈대를 갖추기도 하니 앞으로도 오해 없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록하면서 살찌우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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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Glenn Jordan
출연 Alec Baldwin, Jessica Lange, John Goodman, Diane Lane, Patricia Herd
원작 테네시 윌리암스의 동명 희곡
1995년 TV(미국)
– TV 방영명 :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 비디오 출시명 :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오늘 성적 편견에 대한 탐구라는 과목 수업 시간에 영화를 하나 봤다. 제목이 ‘StreetCar named Desire’란다. 그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그런데 알렉 볼드윈이 나오고 화면은 칼라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95년에 TV용으로 만든 영화였다.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통해 주어진 과제는 스탠리와 블랑쉬 중 누가 문화인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을 계속 던져 봤지만 양자택일하라는 과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블랑쉬(제시카 랭)는 동성연애자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 결국 남편의 자살로 결혼생활에 파탄을 맞게 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 문란한 생활을 한 여자이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억압받으면서 점점 신경쇠약에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
어둠의 탈출구를 찾고자 찾은 동생 스텔라(다이안 레인)의 집은 한껏 과장된 고상함과 까다로움을 보여주는 블랑쉬에게는 너무나 너저분하고 누추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근육질의 남성을 대표하는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알렉 볼드윈)가 있다. 스탠리는 처음부터 블랑쉬를 못마땅해 하고 블랑쉬 역시 그러하다. 블랑쉬가 동생 집에 와서 찾게 된 어둠의 탈출구는 바로 스탠리의 친구 미첼(존 굿맨)이었다. 그러나 스탠리가 미치에게 블랑쉬의 과거를 다 밝히고 블랑쉬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빛을 잃어버리고는 더욱더 망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블랑쉬는 세상으로부터 억압당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탠리는 그 억압하는 기존 질서나 규범 체계인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인물 중 누가 더 문명인인가 하는 것이다. 문명인이라는 것이 뭐지? 야생에서 동물에 의해 길러지지 않은 이상 사람이면 다 문명 속에 있는데. 문명에 잘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문명이 이성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할 때에 이성이 잘 발달되어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러면 스탠리가 문명인인가? 스탠리는 ‘깨끗하지’ 못한 블랑쉬와 마찰을 빚다가 결국은 폭력을 쓰던데. 폭력도 문명의 속성인가?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하던 블랑쉬가 문명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문명이라는 것이 위선과 기만의 가면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본능적 욕망이라는 것이 보통 사용하는 문명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생각될 수 있을까?

도대체가 쉽게 답을 내기가 어렵다. 누구 한 명이 문명을 표상하는 인물이라 볼 수가 없을 뿐더러 문명인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가 앖다. 이런 과제를 내어 놓고 강사는 5분 내에 네 다섯 줄로 써 내란다. 그것도 스탠리와 블랑쉬 중 한 명을 선택하란다. 여간 황당한 것이 아니다. 참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많겠다. 이 수업처럼 말이다. 어떻게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오프닝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다 보여줄 것이지 강사는 또 처음 약 5분 가량과 끝 약 5분 가량을 끊어 버린다. 게다가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엘리아 카잔의 원작을 보여줄 것이지 95년도에 TV용으로 만든 걸 보여주는지.(지는 이 영화를 여러번 봤단다. 원작이 아니라 이 TV용 영화를?)

이런 영화 한 번 보려면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데 괜히 강사는 사람 마음만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억지 답을 요구해 버렸다. 쩝.

감독 : 장이모…(Zhang Yi Mou)
연출작 책상 서랍 속의 동화 (有話好好說: Not One Less) 1999년 중국
집으로 가는 길 (俄的父親母親: The Road Home) 1999년 중국
키프 쿨 (有話好好說: Keep Cool) 1997년 중국/홍콩
트라이어드 (搖?搖, 搖到外婆橋: Shanghai Triad) 1995년 중국/프랑스
인생 (人生 / Lifetimes) 1994년 중국/대만
귀주 이야기 (秋菊打官司: The Story Of Qiu Ju) 1992년 중국
홍등 (大紅燈籠高高掛: Raise The Red Lantern) 1991년 중국/홍콩/대만
국두 (菊豆: Judou) 1990년 중국
대호 미주표 (代號 美洲豹: Codename Cougar) 1989년 중국
붉은 수수밭 (紅高梁 / Red Sorghum) 1988년 중국
제작작 용성정월 (龍城正月: Dragon Town Story) 1997년 홍콩
촬영작 노정 (老井: Old Well) 0000년 중국
출연작 키프 쿨 (有話好好說: Keep Cool) 1997년 중국/홍콩
진용 (秦俑: A Terra-Cotta Warrior) 1991년 홍콩
제작 : 쟈오 위
각본 : 바오 쓰
촬영 : 호유 용
음악 : 싼 바오
주연 : 장쯔이, 순홍레이, 쩡 하모, 쟈오 위에린

나우누리 시네프리에서 연 시사회에 당첨되어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개봉도 하기 전에 보게 되었다. 나같이 게으른 놈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부지런했으면 얼마든지 그러한 기회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중년 남자가 차를 타고 급하게 한가로와 보이는 시골 눈길을 가로질러 온다. 그 남자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간 아버지의 장례를 전통 장례로, 멀리 도시 병원의 영안실에서 산골 구석 마을까지 긴 행렬로 걸어오기를 바라지만 마을 사람들과 아들의 생각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식 사진은 마을 전체에 알려진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아들은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의 구천 돌아가는 길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마중하게 된다.

영화는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급하게 달려오는 아들의 시간, 즉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부모의 시간, 즉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성을 취한다. 보통 흑백이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컬러란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반대의 경우로 적용한다. 나는 이 영화가 과거 부모 세대의 삶과 사랑의 모습에 무게가 있다고 느껴지므로, 현재를 잠시 벗어나 과거를 현재처럼 한번 보아 달라는 의미가 아닌가 억측해 본다.

산골 마을에 열여덟의 아릿다운 처녀가 있다. 처녀는 마을에 새로 온 스무살의 젊은 선생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순박한 처녀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학교 건물을 만들 때 공밥을 정성스레 지어 선생이 자신의 밥을 먹어주기를 바라거나 학생들과 함께 노래부르며 걸어가는 길목에서 자주 마주치거나 학교에서 강의하는 선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써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까지 와서 물을 떠 가는 정도 밖에 없다.
선생은 처녀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찜해 놓았던 그녀를 다시금 확인하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그녀에 대한 애정을 쌓아간다. 문화혁명이라는 격동이 밀려오면서 선생 역시 어지러운 세상에 이끌려 잠시 이별을 해야 하지만 머리핀을 자신의 마음의 징표로 전하고 영원히 그 마음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이 둘의 사랑은 요즘 흔히 보는 로맨틱 영화만큼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하다. 촌스럽기 그지없고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손수 짠 붉은 천이나 이별과 만남을 잊지 않으려는 머리핀은 몇 천 송이의 꽃보다 절박하고 진실되게 보인다. 사랑을 확인하려 키스를 하지도 몸을 섞지도, 하다못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하찮게 보이는 사건과 몸짓도 진실된 사랑을 품는 것 같다. 머리핀을 쥐어주고 떠나는 선생에게 먼길 가며 먹으라고 찐 만두를 전하려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잃어버린 머리핀을 찾으려 몇일을 헤매고 텅빈 학교를 예쁘게 단장하고 선생을 기다리다 앓아눕는 처녀는 요즘 사람들 눈에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장예모는 그것이 어리석을 망정 진실된 마음은 담겨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중국 역사가 부정했던 부모세대는,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세대라 부정되었던 당신들은 이제는 그들조차 중국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감정을 흔들면서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란 과거를 보듬는 공간으로 가는 길을 뜻할 것이다.

장예모의 작품은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밖에 본 것이 없다. 거기서 장예모는 교육, 즉 계몽을 강조한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측면이 보인다. 아버지(선생)는 죽는 순간까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려 했으며(강의하는 문구도 ‘알아야 한다’라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심지어 학교 건물에는 ‘敎育是建設祖國的武器'(교육은 조국건설의 무기이다)라는 선동적인 문구가 붙어 있다 – 물론 당시 사회상이 그러했겠지만 감독의 의도도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계몽주의적인 의식은 잘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처녀와 선생의 사랑과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화해, 과거 역사와 현재의 화해 같은 측면에 몰입되기만 했다.
장예모는 시끌벅쩍하게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자, 감동해라’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이렇단다’라고 차분히 풀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장쯔이의 그 진실된 미소와 눈물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