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About My Mother Todo Sobre Mi Madre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cast-세실리아 로스 Manuela 마리사 파레데스 Huma Rojo 칸델라 페냐 Nina
안토니아 산 후앙 ‘La Agrado’ 페넬로페 크루즈 sister Rosa
101분 스페인/프랑스 1999년 제작

이 영화는 여성(정확히는 여성성)에 대해 찬미하며 편견에 대해 저항하며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생명을 아끼고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이렇게 보여줄 수 있다니.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여성이 되고싶어 성전환을 한 남성, 임신을 하고 에이즈에 걸린 수녀가 나오는, 그러나 그것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은 가질 수가 없게 하고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여성으로서의 그들만이 있도록 – 어떤 과장이나 억지 몰입도 없이 – 할 수 있는 영화가.

세 명의 에스테반을 사랑하고 잉태하며 보듬는 마누엘라나,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산다는 성전환자 아그라도나,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창녀를 감싸며 방황하는 성전환 남성의 아들을 잉태하는 수녀 로자나…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성에게서 알모도바르가 보내는 구원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엔딩 자막에서 여자 연기를 하는 여자배우, 남자 배우와 나의 어머니에게 바친다라는 글을 남긴 것처럼 모든 여성성을 지향하는 이에 대해 찬미한다. 그는 진정 여성성 안에 있는 인간의 가치를 아는 것 같다.

감동 먹고 눈물 좀 글썽거렸다. 참 드문 일이다.

가뜩이나 머리에 든 것도 없는데 더더욱 머리로 쓰기가 싫다. 다른 이가 머리와 가슴으로 쓴 글을 영화 이야기 탐색 게시판에 올려놨으니 관심있으면 그 글을 읽으시라…

감독·이마무라 쇼헤이, 촬영·코마츠바라 시게루, 음악·시니치로 이케베
주연·야쿠쇼 코지, 시미즈 미사, 츠네타 후지오
97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이마무라 쇼헤이
별칭 今村昌平      출생일 1926
간장선생, 우나기(각본 겸), 일본곤충기, 인류학입문, 인간 증발
신들의 깊은 욕망, 복수는 나의 것, 나라야마 부시코, 도둑맞은 욕정
끝없는 욕망, 형, 돼지와 군함,붉은 살의,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전후사
마귀환병을 찾아서, 가라유키상, 좋지 않습니까, 뚜쟁이, 검은 비

세진이 녀석이 요즘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내가 술 마시고 하숙집에 들어오면 꼭 이 녀석은 담배 하나 물고 비디오를 보고 있다. 배신감이 느껴진다. 혼자 삶의 질을 높인다며 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나기’를 세진이 없을 때 혼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기 시작했다.(영화에 대한 글을 읽어는 봤었다. 안 본 영화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해서 문제이지…)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과 주연 이름이 뜨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쇼헤이가 ‘나라야마 부시코’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을 곧 기억해 내었다.

영화는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이고 자수하여 제발로 교도소로 갔다가, 8년만에 가석방되어 바깥 세상에 나온 야마시타(쉘위댄스의 바로 그 남자!)라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전개된다. 누군가로부터 계속 아내의 불륜을 알리는 편지를 받던 야마시타. 평소에 즐기던 낚시를 일찍 끝내고 집에 와서 그 불륜현장을 목격하자 잔인하게 살인을 하게 된다. 우리 영화 ‘해피엔드’에 나오는 살인 장면보다 더욱 현장감(?) 있는 이 씬은 차분하던 흐름에 작은 자극이 된다. 작은 자극이라 함은, 몇 초의 긴장 후에는 다시 조용히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가는 야마시타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는 8년간의 복역 후 2년간의 가석방 판결을 받고 바깥 세상에 나온다. 그의 보호자를 따라 온 한적한 시골에서 그는 모아놨던 돈으로 이발소를 차리고 조금씩 세상에 적응한다.

그에게는 유일하면서 유별난 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뱀장어이다. 그는 스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는 뱀장어와 말한다. 인간과의 소통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후부터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UFO를 찾는 소년과 옆집 목공수, 껄렁한 놈팽이, 낚시꾼 등은 울타리 바깥 세상을 향해서 내놓은 작은 쥐구멍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야마시타는 약을 먹고 풀밭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 케이코와 같이 이발소에서 일하게 된다.
케이코는 상냥하고 씩씩해서 이발소는 물론,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고, 야마시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녀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를 걱정하며 급히 병원으로 가 응급 치료를 받게 해 준 야마시타에게, 케이코는 마음을 더욱 키우지만 야마시타는 과거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그녀를 멀리하기만 한다.

케이코에게도 자살을 하려 했을 정도로 괴로운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유부남 애인, 그리고 자신의 애인에게 욕정을 품는,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케이코에게 다가가는 야마시타의 마음은 케이코의 과거가 야마시타의 현재에 들어올 때에 비로소 야마시타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케이코의 옛 애인이 케이코가 가로챈 돈을 빼앗으러 야마시타의 이발소로 들이닥쳤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주먹다짐이 오가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케이코가 밴 아이에 대해 옛 애인이 당황해 할 때, 야마시타는 자신의 아이라며 거짓 선포를 하고는 그렇게 케이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케이코의 실수로 새게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야마시타는 비로소 과거의 악몽에서 자유로와지고, 현재의 자신과 화해하고 케이코를 받아들이는 경종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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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지고서야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케이코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야마시타가 돌아올 때까지 뱀장어의 운명과도 같은 아이와 함께 진실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겠노라 한다.

뱀장어는 적도까지 가서 암컷이 산란을 하고 씨도 모르는 수컷에 의해 수정이 되어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뱀장어는 일본 열도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바다를 향해 갈 것이다. 이 뱀장어의 여행은 야마시타와 닮아 있다. 기나긴 여정을 거치고서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야마시타의 화해하지 못할 과거도, 소통하지 못할 인간도 그만큼의 ‘앓음’이 있고서야 비로소 화해와 소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을 병치시킨다.

사실 나는 나라야마…를 굉장히 지루하게 보았다. 그 영화는 고립된 산골에 사는 특이한 형태의 인간 집단을, 동물과 비유되는 인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이런 영화 잘 못 본다. 나는 영화를 보면 감정이 먼저 몰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라야마 부시코’처럼 무감정으로 인간을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감독은 야마시타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서 그의 삶이 이루는 화해를 지켜본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말이다. ‘나라야마…’에서는 동물처럼 교미하는 듯한 남녀의 성교가 있었지만 ‘우나기’에는 교미 행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 인간만이 할 수 있는 –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담겨 있고 한 삶의 번뇌가 있으며 사람 사이(人間)의 소통이 있다.

일본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절제라는 것이다. 일본 영화나 만화(특히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는 큰 기복이 없다. 감정이 과장되지도 않으며 사건도 돌발적이거나 크게 놀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 사건들은 튀지 않고 잔잔히 흘러간다. 기교도 특별히 없다. 철저히 자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밋밋한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다. 절제되어 잘 정돈되어 있는 정서적 카타르시스가 더욱 크다는 것을 느낄 정도이다. 이 감독도 참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품고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영화를 일본음식처럼 은근히 곱씹게 된다.

마지막 한마디. 케이코 너무 예쁘더라.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제작 : 조안 셀러 (뉴라인시네마)
각본 : 폴 토마스 앤더슨
촬영 : 로버트 엘스윗
음악 : 존 브리언
주연 : 톰 크루즈, 줄리안 무어, 제레미 블랙만, 제이슨 로바즈, 윌리엄 H. 메이시

2000. 07.
나는 지독히도 게으르고 단순해서 한번 나태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나태의 최고치까지 치닫고는 한다.
오랜 나태의 시간을 지나온 나는 오랜만에 책을 들고, 또 영화를 보면서 그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을 영화로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를 선택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도 미미했고 이 감독의 전편을 접하지 않은, 백지 상태에서 하나하나 채워나가자며 선택한 것이었다.
‘매그놀리아magnolia’. 사전을 보니 ‘목련속의 나무’라는 것 이외엔 다른 뜻이 없는 것 같다. 그럼 이 영화는 목련, 화훼에 관한 영화인가? 터무니 없는 생각도 해 보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전혀 목련과 관계가 없는 듯하다. 영국의 그린베리 힐에 사는 약사가 괴한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괴한들 이름이 그린, 베리, 힐이었다, 부부싸움이 잦은 부모의 아들이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마침 1층에 쳐져 있던 그물 덕에 살 수 있었으나 부모의 싸움이 지겨웠던 나머지 어떻게든 되라는 식으로 장전해 놨던 총이 하필 그 순간 발사돼 그 아들이 죽고 말았다, 뭐 이런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일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고 쭈뼛 소름이 돋는 이야기가 영화를 여는 문이라니. 그럼 이 영화는 세상사 믿을 수 없지만 있을 수도 있는 우연의 사건, 기묘한 일치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건가.
당황하고 있던 차에 영화는 시작됐다.
그런데 한 20분을 보고 나니 이건 주인공이 없다. 아니, 주인공이 어림 잡아도 열 명은 넘는다. 이런 저런 사람들의 모습을 병치시키며 나열하는 건 마치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을 보는 듯했다. 원래 게을러서 이런 식으로 집중하고 꾸준히 스크린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머리속을 정리하면서 봐야하는 ‘숏컷’에 매우 고전해 본 전력이 있던 나는 지레 겁을 먹게 됐다.
‘엇! 이거 만만치 않은데. 아무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첫발을 내디딜 만한 영화가 아니다’라는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 오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노인 얼, 그의 아내, 얼을 보살피는 호스피스, 그리고 노인이 버렸던 아들, 암에 걸려 죽어가는 퀴즈쇼 사회자,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지금은 마약으로 망가져가는 딸,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경찰, 퀴즈쇼 출신의 영재였던, 그러나 지금은 별볼일 없는 놈, 지금 퀴즈 쇼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꼬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런,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군.
하지만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가닥이 잡혔다. 이건 퀴즈쇼라는 얼개 속에 묶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를 끊임없이 나열하는 식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서로를 배신하거나 당하고, 증오하고 후회한다. 죽어가는 노인은 그의 아들을 버렸던 과거에 깊은 후회를 하고, 돈을 보고 결혼했던 그의 후처는 뒤늦게야 자신이 노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홀로 일어선, 여자꼬시기를 가르치는(?)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간직하고 있고…그리고 호스피스는 얼의 부탁을 따라 아들을 불러 화해시키려 하고…이 죽어가는 노인의 집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들의 애증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절정에 달하고 폭발하고, 풀고 화해하거나 종결된다. 특히 한 노래를 부르는 등장인물들을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시퀀스는 그 화해와 종결의 실마리를 잡는 순간을 하나의 시공으로 포섭한다. 이런…눈물이 찔끔 나는군.
영화 속 대사처럼 인간은 과거를 잊지만 과거는 그를 잊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쌓아놓은 과거의 무게 속에 신음하던 이들이 이 노래와 함께 그 중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기막히게 연결된 애증의 고리 속에 그 고리들이 새로운 고리를 형성할 절정의 순간이 그 이후 벌어진다. 바로 개구리 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군. 정말 대사처럼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하늘에서 터무니없이 개구리들이(그것도 큼지막한 황소 개구리들이) 떨어진다. 고뇌하는 이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하늘의 계시인가? 하여튼 떨어진다. 황소 개구리가 떨어지는 동안 이들은 화해하거나 용서하고 참회하고 새로운 사랑을 싹틔워 나간다.
아,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가 나는 이렇게 복잡하고 긴 영화는 왜 골라서 고생을 한 건지. 하지만 그 감동은 만만치 않은 양인 것 같다. 새벽을 오래 넘긴 시간까지 눈을 말똥거리며 매그놀리아에 대한 글들을 뒤적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인생이란 다 그런 것 같다. 서로 많이들 상처를 입히고 받으며 그 자욱들을 남기며 살아가는데 그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나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자취들을 돌아보다 문득 후회가 될 때, 그 때 ‘나는 뭘 했던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후회해도 이미 어마어마하게 쌓인 자욱들의 무게는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길거리를 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함 속에도 그들 나름의 상처와 후회를 안고 그것들을 조금씩 부풀리며 사는 것 같다. 그 쌓인 짐들을 조금씩이나마 덜어낼 여유가 있다면…
이 목련꽃 영화는 그렇게 무거운 짐을,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닌 열 명 남짓의 무게를 담아 보여주고 그것을 한번에 덜어주면서 화해의 꽃망울을 피우는 것 같다.

참, 인상깊었던 한 녀석을 등장인물 중에서 빼먹었다. 살인용의자를 경찰에게 넌지시 랩으로 띄워주고 자살하려던 얼의 후처를 발견해 살렸던 그 흑인 꼬마. 하나의 예언자, 화해와 구원의 이미지가 문득 느껴지는데…
모든 어린이들을 천사로 보는 건 위험하지 않다고 화를 내며 말하던 윌리엄 H. 메이시의 대사가 그 흑인 꼬마에게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