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드디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봤다. 모두들 보고싶은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편인데 유독 나는 돈도 별로 없고 같이 보러 갈 사람도 없다는 명목으로 보고싶은 영화마저도 비디오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매체를 통해 류승완이라는 감독과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해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성룡이 나오는 영화는 절대 놓치지 않을 정도로 홍콩 액션영화에 취해 있었던 그는, 대개 진정한 딴따라나 B급 영화 감독으로 불리운다.

여기저기 조감독으로 영화판을 돌아다니던 그는 이번에 저예산으로 그의 작지만 원대한 꿈 하나를 이루었다. 그가 만든 단편 3편과 새로 찍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부분을 연결하여 장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해 낸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 – 특히 깡패 류의 격투가 나오는 액션 영화 – 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공고를 다니는 두 친구가 있다. 석환(류승완)과 성빈. 석환은 당구장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예술고 패거리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싸움이 휘말린다. 극구 주먹다짐을 만류하던 성빈은 우발적으로 예고생 중 한명을 병으로 쳐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는 소년원가 교도소를 거치고 다시 사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를 따라다니는 과거는 결국 그를 주먹의 세계로 편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석환의 동생 상환, 그는 석환이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깡패 세계를 동경하는 꼴통이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성빈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빈은 조직의 확장을 위해 총알받이 역할을 할 돌격대에 상환을 끌어들여 결국 죽게 만든다. 그리고 석환과 성빈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운명과 우정과 배신 속에서 격투를 벌이고 둘 다 파멸의 길을 간다.
‘패싸움’ ‘악몽’ ‘현대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렇게 4부로 나뉘어진 시퀀스는 액션과 호러, 다큐, 갱스터의 장르를 아우른다고 한다. 실제로 1부에서는 공고생과 예고생 간의 격투가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그리고 2부에서는 실수로 죽인 예고생이 계속 나타나 성빈의 상처를 건드리며 괴롭힌다. 3부에서는 깡패 세계와 형사 세계의 일상과 고달픔을 인터뷰 형식으로 잘 담아내고 있으며 4부에서는 조직간의 격투나 배신, 복수 등 갱스터적인 요소를 잘 담고 있다. 저예산으로 만든 대개의 엉성한 영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영화를 만들고 즐길 줄 아는 감독인 것 같다. 그러나 류승완의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표면적인 주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승완은 그러한 것을 원하는 것 같지가 않다. 그에게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주류 영화가 보여주는 기교적인 액션과 다른, 진정 몸으로 하는 액션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실제로 류승완은 무술이나 태권도 실력이 상당한 것 같다. 얼마전 브루노라는 이탈리아인이 배우려 애썼던 540도 회축인가 하는 기술도 가볍게 선보인다. 그와 성빈이 보이는 액션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나 트릭도 없다. 쉴새없이 내뱉는 욕설과 근육질적인 남성의 날렵한 몸짓, 움직임이 주는 속도감과 쾌감, 거기에 그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있는 듯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류승완의 실제 동생이라는 상환 역의 류승범의 연기도 대단하다. 쉴새없이 내뱉는 욕설이나 ‘깡패스러움’을 대단히 리얼하게 가식 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 혹시 정말로 그 쪽 세계에 몸담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갈 정도이다. 이 두 형제는 실로 영화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주꾼이다.

김지운 감독이 말했던 것 같다. 류승완처럼 철저한 저예산 B급 영화를 B급 영화답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영화계에는 필요하다고. 그리고 류승완의 이 영화를 칭찬하기에 바쁜 영화계로 인해 지금의, 아니 과거의 류승완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실제로 칼럼 제목도 승완아 돌아와라 였던 것 같다)

그는 B급 세계에서 기웃거리며 A급이 쌓아놓은 사상누각의 모래 기둥을 돌기둥으로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역할은 작으면서도 사뭇 크다.
아무튼 그는 이제서야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을 풍성히 하기 위해 계속적인 기웃거림이 필요한 웅크린 개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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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박찬욱
1963년 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3인조>(1997)
비평집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1994)

제작 : 이은, 심재명(명필름)
출연 : 이병헌, 송강호, 신하균, 이영애, 김태우

되도록이면 돈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영화는 최대한 비디오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찜해 놓은 영화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가 그러했다.
같이 지내는 세진이와 꼭 보자는 약속을 해 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보게 된 JSA.
우선 대중들이 왜그리도 입소문이 지독히도 났는지, 왜 쉬리의 초반 흥행 돌풍을 앞질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박찬욱이란 감독의 이름이 생소하다. 그 감독의 작품을 봐두었던 게 전혀 없다.(사실 한국 영화 자체를 본 게 별로 없다) 그러므로 감독에 대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었다.(사실 요즘 나오는 영화 대부분이 그렇다)

영화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판문점. 그 곳에서 남과 북의 병사 사이에 싹튼 우연한 우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미스테리적 요소를 취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잡는다.
포스터 문구대로(여덟발이 아니라 열한 발이었다. 왜 여덟발이라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 사이에 열한 발의 총성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미스테리적 요소보다도 영화에서 진실이라 보이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 바로 그 원인이자 과정인 부분에 더 비중을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20자평에서 본 글처럼 냉전 이데올로기로 몰아 붙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 같기도 한 이 영화는 우리네 사람들의 거시적인 현실을 네 명의 병사에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왜 우리는 서로를 기만하고 위장하며 이 대치 상황을 지키고 있는가. 무엇을 위한 일이며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북한을 괴뢰 정부로, 우리를 정통성을 확보한 정부로 인식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이러한 공식을 대입하여 판단한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제3자인 스위스 중령 이영애의 눈에는 양자 모두 거짓만을 얘기할 뿐이다. 우리도 그들을 기만하고 우리 자신과 세계를 속이며 그들도 우리를 기만하고 그들 스스로를 속이며 세계와 문을 닫은 것이다.
영화 속 병사들은 대사처럼 분단의 반세기, 오욕의 세월, 그 상처를 뛰어넘어 – 한 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 그렇게 우정을 키우고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었지 않던가.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그들도 우리도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말이다. 분단의 현실이란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 함정 속으로 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 배반의 역사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네들의 자아 동일성이라는 문제를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조그만 자극만 줘도 터져 버려 비극이 되어 버리는 판문점의 한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선도 그들의 노선도 아닌 그 경계선이나 그 바깥에서.
그런 의미에서 중립국 스위스 장교이자 과거 북한군의 딸로 설정된 이영애의 위치는 이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군더더기 인물인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를 그 역할은 실제로는 이 영화를 어떤 이데올로기적 틀로도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스위스 장교 소피 중령은 양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희생된 우리 민족의 슬픈 운명을 표상하기도 한다. 북한 포로 중 포로 교환 때 그 어느 진영으로 가는 것도 거부한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중립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세계의 고아가 되어 버린 그녀의 가족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남한 병사와 북측 병사 사이의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배경에 깔리면서 총격이 벌어진다. 남한 병사가 북측 병사를 권총으로 죽이는 장면이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의 죄인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를 그 장면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처절한 상징이다. 진정으로 돌아오지 않는 편지 속 사연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그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지금까지 가져 온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바라봐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영화.

초반에 남측 병사가 투신할 때 스톱모션을 비롯해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장면이나 지뢰밭을 제거할 때 스크린 양쪽에서 불꽃놀이 하듯 번쩍이던 섬광을 처리한 효과 같이 조금 영화 색깔과 어울리지 않는 과잉 기교도 보이기는 하지만 침착하게 내용을 전개시키는 힘이나 미스테리와 드라마 사이에 균형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연출은 뛰어나다. 박찬욱 감독은 3년만의 신작에서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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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강우석
감독 : 박헌수
시나리오 : 박헌수
출연 : 최민수, 황신혜, 여균동, 이미연
한 빵 굽는 사내가 있다. 그는 빵을 굽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자신의 인생관과도 맛물려있는 빵굽기의 미학을 자기의 업으로 삼고 자기 가게도 하나 있고 자기 집도 하나 마련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날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마냥 웃으며 행복할 줄 알았던 아내가 언제부터인가 한숨을 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에게서,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를 다시 행복하게 해 줄 방법을 찾아 골머리를 앓던 그에게,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알고보니 이건 부부교환이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스와핑이다. 윤리의식이 붕괴되고 있다는 요즘 참 문제되는 것들도 많다. 스와핑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왜 스와핑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을까?
그런데 솔직히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랑 하나 생기는 게 문제가 되기나 할까? 어디까지나 나를 나로서 사랑하고 그 넘을 그 넘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아내라면 말이다.
거 참, 회괴한 논리이기도 하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결혼이란 게 엄연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에게 속하여 한 평생 살아갈 것을 강력한 사회규범으로 계약한 게 아닌가? 그 계약을 그렇게 쉽게 깨고는 나를 나로서, 그 넘을 그 넘으로서 사랑한다는 이상한 박애주의로 방패막이를 한다는 게, 도대체가 먹힐 수 있는 얘기인가?
이렇게 보면 영화 속의 ‘나’라는 놈은 참 이상한 놈이다. 이러한 회괴망칙한 논리를 가지고 사랑 운운하니 말이다. 그리고 감독도 참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이런 불륜을 소재로 이렇게 깔끔하고 코믹 풍이 넘치는 드라마 영화를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같으면 한평생 한 남자, 한 여자만을 사랑하며 살 것 같냐고, 살다 보면 중년에 새로운 사랑이 생기지 않으란 법이 있느냐고.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속이려 하지 말라고.
‘나’와 아내, 그리고 그 놈과 그 놈의 아내, 서로의 사랑의 화살이 엇갈려 꽂혀 있는 상황에서 쌍쌍이 마주치는 장면은 참 묘한 긴장을 준다. 그리고 내가 그 놈의 아내를 만나고 그 놈이 내 아내를 만나는 현장이 동시에 서로에게 들켜 버렸을 때, 서로가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던 사실을 창피하게 발각되었을 때, 황당함과 동시에 우리는 온갖 사회적인 관계 때문에 감추어야 하는 마음의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 어차피 살아봐야 반세기인 인생,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죽어버린 할아버지의 5단 케잌처럼 순간순간 자기 마음의 단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어찌보면, ‘넌 참 편하게도 생각한다, 사는 게 그리 쉬운 건지 알어? 얼마나 힘들고 각박한 세상인데.’라는 훈계조 소리를 한마디 들을 만도 하다. 그래도, 영화는 인생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제아무리 여기저기 쫓아다녀도 결국 그 본질은 단순한 것이라고.
‘나는 아내를 아내로서 사랑하고, 그녀를 그녀로서 사랑하고 그 놈을 그 놈으로서 사랑한다’
참 세상 편하게 사는 최민수, 주노명의 말이다.
굳이 우리 고전을 들추어 보자면 예기(禮記)에 ‘大樂必易, 大禮必簡’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대충 위대한 예술은 쉽고, 위대한 예, 법은 간단하다는 말이 된다. 온갖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네들은 정작 쉽고 간단한 본질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