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나는 <서브스턴스>를 두 번 보기가 두렵다. 어떤 영화는 재현하는 이미지가 관객인 나의 시선에 침투해 들어오고, 욕망을 지배하고, 상처 입히기도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쪽에 가깝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이 영화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대상화의 폭력을 반어적으로 풍자하거나 성찰하게 만든다는 해석에도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반대로 그 폭력적 시선이 엘리자베스와 수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대상화의 폭력에 길들여진 안타까운 희생자라기보다, 대상화된 여성의 외설적 향락 그 자체를 체현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는 신체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파편화한다. 이는 단지 수의 젊고 아름다운 몸에 한정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피부의 주름을, 등 피부의 찢어진 틈을, 주사를 꽂는 팔뚝을 극도로 클로즈업한다. 몬스트로 엘리자 수의 놀랍도록 혼재된 신체 기관도 그렇게 확대된다. 나는 영화의 이런 여성 신체에 대한 태도가 페티시즘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육체의 물질성 수준으로 끌어내려 고찰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은 여성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을 극대화하는 방식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영화가 단 하나의 동력으로 삼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욕망에 관객인 우리가 연루되면서 페티시즘적 시선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페티시즘, 물신주의적 숭배,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것을 갈구하는 주체이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엘리자베스와 수, 그리고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느끼고 있을 것 같은 수치심이나 허영심에 우리가 연루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극도로 확대된 수의 엉덩이에 돌기 뭉치가 튀어나올 때, 또는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무대에 올라 피의 향연을 벌일 때 이것은 단지 외모주의와 페티시즘의 내적 균열 또는 외적 응징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 장면은 끔찍한 충격을 창출할 의도를 지니고 있고, 실제로 외모주의와 페티시즘에서 연유할 극도의 수치심과 불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의 괴물성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감정에 전이되지 않고 그 장면의 공포를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공포는 여성 혐오 세계 내부의 작동 원리에 가깝고, 그 에너지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몬스트로 엘리자 수를 관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자기 파괴가 안타깝다는 마음을 쉽게 놓쳐 버린다. 그것은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던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신체 기관이 해체되고 한 줌의 덩어리만 남아 소멸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상찬받는 환상에 빠져 있는 인물을 동정하기는 쉽지 않다. 오로지 그는 괴물이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이것은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효과를 인용한다면) 끔찍한 풍자이며 실패한 미러링이 아닐까. 그리고 이 때문에 반대로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공고함 앞에서 벌이는 피지배자의 무력한 자학의 징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징후적 독해가 이 영화에 대해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이해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상상은 차라리 구태의연한 버전이 아닐까. 몬스트로 엘리자 수가 원귀로 구천을 떠돌며 누군가를 해하는 것. 물질 이상의 환상을 투사해 온 대상-주체를 한낱 물질로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괴물의 자기 소멸 이후에도 이 세계에 반드시 돌아오는 치러야 할 대가가 존재함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레 미제라블>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 몽페르메유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이 고착화된 슬럼 구역에는 이민자와 빈민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혼재하고 무슬림과 집시가 드나드는 이 곳은 21세기 비참이 압축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탐사한다. 영화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강력반 경찰의 행적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그들과 동행하는 기자의 시선에 가깝다. 

경찰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경계하고 적대한다. 범죄와 사건이 끊일 날 없는 몽페르메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 인물이다. 실제로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누구는 살인을, 누구는 절도를, 누구는 폭행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결코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선량한 이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그들 중에서 결국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내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단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싶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하층민과 빈민가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 지니게 되는 오래 된 관습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몽페르메유의 삶을 다른 수준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삶의 표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계급적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옅어지는 순간의 현상의 표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와다가 이사의 집을 수색할 때 마주치는 아프리카식 계모임이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인류학적 현장뿐만 아니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경찰들의 소진한 모습에서도 그 표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내내 우리가 지켜보는 표면은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적대감 서린 눈빛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염병을 들고 경찰을 노려 보는 이사의 눈빛은 순수하게 응축된 적대감 그 자체다. 범죄 사실보다도 이들을 더욱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이 눈빛이 어떤 현상의 표면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경찰의 태도에 상응하는 반응이라고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 범죄 혐의와 상관 없이 모든 주민에 대해 경계하고 적대적인 경찰과,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몽페르메유 사람들을 지켜 본다. 경찰과 주민들의 적대는 서로에게 표면이자 심연이다.

시민을 존중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찰 스테판은 <레 미제라블>을 경찰의 폭력에 대한 빈민촌의 저항 같은 장르적 세계로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역시 대결의 현장에 연루됨으로써 영화 속 적대를 당사자의 차원으로 고정시킬 수 없게 하는 균열 지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몽페르메유에서 벌어지는 일의 표면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는 이를 강렬한 사건의 표면에 뛰어들기 전에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월드컵의 열기가 환유하는 국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조차 본원적으로 주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위험에 포획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세계의 적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나 있는 입구이자 출구다. 이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지혜가 내게는 없다. 다만 <레 미제라블> 안에서 말하자면 스테판이 이사를 겨눈 그 총을 내려 놓는 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어 보인다. 스테판의 총이 이사의 화염병보다 더 파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들>

뉴욕의 뒷골목에서 잘 나가는 갱스터가 된 헨리는 캐런과 첫 데이트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특별한 통로로 캐런을 이끈다. 그 통로는 레스토랑 앞에 늘어선 인파의 긴 줄 옆에 숨은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이다. 문을 열고 좁은 복도를 지나면서 헨리에게 인사하는 사람들과 주방의 분주한 직원을 물리치고 나면 레스토랑 매니저가 헨리와 캐런을 챙겨 가장 좋은 자리에 테이블을 놓고 앉힌다. 이내 옆 테이블에서 선물한 와인을 받아 들고 나면, 헨리와 캐런 바로 앞에서 헤니 영맨의 스탠딩 코미디 쇼가 시작된다. 헨리만을 위해 준비된 레스토랑의 특혜 티켓 통로인 셈이다.

길거리에서 레스토랑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는 헨리의 손에서 시작해 헤니 영맨의 공연 무대까지 이어지는 이 3분짜리 쇼트는 앞선 30분의 러닝타임이 무엇을 향해 할애되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헨리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길 건너 갱스터 세계의 화려한 매력이 이 한 쇼트에 담겨 있다. 모두가 자신을 알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특별대우를 받는 잘 나가는 갱스터의 생활에 캐런과 관객이 한 번에 매료되도록 만들기 위해 스테디 캠의 유려한 움직임이 활용된다.

헨리와 캐런의 뒤를 따르는, 시간과 공간, 시선의 방향과 이동의 강약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눈의 운동은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 관객을 홀린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가 그랬던 것처럼 마틴 스콜세지의 스테디 캠은 자신의 눈이 카메라 시선이 되기를 바라는 관객의 오래된 욕망의 목록에 유영하듯 부드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운동성을 더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카메라가 바에 걸터앉은 갱스터 무리를 차례대로 비추며 소개하는 동안 그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을 거는 또다른 스테디 캠 쇼트는 이 양식이 관객을 영화 세계 안으로 호명하고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 깊이 뛰어들도록 이끄는 고전주의적 면모를 띄지만 동시에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을 거스르면서 이 허구적 세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예외적 순간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갱스터 헨리의 회고록인 <좋은 친구들>의 마지막이 헨리가 웃으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웃음은 영화가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아서, 갱스터를 현명한 사람(Wise Guy)이라 부르고 그들 서로를 좋은 친구들(Good Fellas)이라 칭하는 이 세계에 갑자기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스콜세지의 영화를 특징 짓는 것은 이 성찰적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강고한 환상일 것이다. 파국적 진실과 반복적으로 부서지는 환상을 다루는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나면 이 생각은 확고해진다.

그가 평생을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바쳐 왔음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뉴욕과 미국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뉴욕, 미국, 그리고 어쩌면 인간을 관통하는 이면의 폭력이 관철되는 세계를 반성적으로 관조하고는 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갱스터의 삶이 한낱 이권과 배신, 그리고 마약으로 무너진 후 살해 위협의 공포에 떨며 평생 숨어 살아야 하는 헨리의 후일담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반성적 감상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찰을 좀더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을 타자화해서 관조하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된다. <좋은 친구들>에서 그리는 가족애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마피아의 일원이 되는 의식을 치르러 가는 아들 토미를 기쁜 마음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에게서, 또는 헨리와 캐런의 결혼식을 찾아 진심으로 축하하는 갱스터 패밀리에게서 감지하게 되는 폭력이 무화되는 가족애의 순간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면, 세계가 품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무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진공 상태가 평범한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도 만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