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보고 이건 라깡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온은 실재계, 네오는 실재의 작은 조각, 매트릭스는 상징계…
뭐 이런 식으로 구도는 명백한 듯 했다.
하지만 지젝의 글을 보고 아차했다.
나는 내 이데올로기에 젖은 채 그 환상을 충족시키려, 시온과 네오 역시 주체의 영역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시온은 타자의 타자다.
맑시즘이 그런 것처럼, 신에 대한 인간의 매혹이 그런 것처럼 상징계 내에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이중적 두려움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상징계의 큰타자를 기획하거나 조종하는 배후 조종 인물로서 타자의 타자는 인간의 편집증적 환상인 것이다.
벤야민이 언급한 장기 두는 기계의 우화와 같이, 우리는 지지 않는 장기 기계 속에 숨어있는 난장이 천재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음모라는 환상 때문에 매트릭스에 매혹된다.
시온은 실재계가 아니라 또하나의 상징적 질서이며 모피어스가 말하는 실재의 사막은 실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황폐한 이면일 것이다.

당신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든 그 관점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지젝의 말에 유념하자면, 나는 어쩌면 몇 천 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렸을 영화 ‘매트릭스’로부터 기어코 받아야 할 편지를 받아내려 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마지막 편이 나와 봐야 영화 ‘매트릭스’가 진정으로 “미쳤는가” 하는 문제가 명백해질 것 같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다시 말해 라캉의 이론에서 환상이 욕망의 대상-원인인 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제논이 배제한 것이 바로 환상의 차원이다. 환상은 일반적으로 주체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시나리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적인 정의는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조건 위에서는 아주 적절한 것이다. 환상이 상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즉 충분히 만족되는 장면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근본적인 초점은 욕망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주체의 욕망을 조정하고 그 대상을 특화시키며 그 속에서 주체가 취하는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환상의 역할인 것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되는 것은 오직 환상을 통해서다.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 핵심적인 논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유명한 공상과학 단편인 로버트 쉬클리 Robert Scheckley의 <세계들의 상점 Store of Worlds>을 살펴보자.

이 단편의 주인공인 웨인 씨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노인 톰킨스를 찾아간다. 그는 폐허가 되어 썩어가는 쓰레기만이 가득한 외딴 곳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톰킨스는 특수한 종류의 약을 써서 사람들을 그들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평행차원으로 위치이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그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다. 톰킨스를 만난 웨인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톰킨스는 자신의 거래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위치이동 경험으로부터 아주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오며, 되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인은 망설인다. 그러자 톰킨스는 그에게 결심하기 전에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웨인에게는 내내 그 생각 뿐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이내 그는 가족생활의 즐거움이라든가 사소한 문제거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의 매일 그는 스스로 다시 톰킨스 노인을 방문할 것이며 욕망 충족의 경험을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의 주의를 흩어 놓으며 그로 하여금 방문을 연기하도록 하는 가정사가 끊이지 않는다. 우선 그는 부부동반으로 연말 파티에 가야 한다. 그러고나면 아들놈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여름 휴가 때에는 아들과 배를 타러 가기로 약속해 놓았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새로운 약속이 생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 년 내내 웨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그가 조만간 분명히 톰킨스를 방문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갑자기 그가 톰킨스의 오두막에서 깨어날 때까지. 톰킨스는 그에게 친절하게 묻는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만족스러운가?” 어리둥절해진 웨인은 당황해서 “아, 예.. 그럼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물건들(녹슨 칼, 오래된 캔, 그 밖에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톰킨스에게 건내준다. 그러고는 저녁 감자 배급에 늦지 않으려고 무너져가는 폐허를 서둘러 떠난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그가 지하 은신처에 도착하자 한 떼의 쥐들이 쥐구멍에서 나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뒤덮는다.

이 이야기는 물론 핵전쟁 – 혹은 그와 유사한 사건 – 이 우리의 문명을 붕괴시킨 이후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공상과학 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측면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효과는 바로 이 함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함정 속에 욕망의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物) 자체’인 것을 물 자체의 지연으로 혼동하며 사실상 욕망의 실현인 것을 욕망의 추구로, 욕망 고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그것이 ‘충족되는’ 것, ‘충분히 만족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의 재생산, 욕망의 순환운동과 함께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웨인은 환각 속에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무한정 지연시킬 수 있는 상태로, 즉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을 재생산하는 상태로 자신을 위치이동시킴으로써 욕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불안 anxiety에 대한 라캉의 개념의 특성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은 욕망의 대상-원인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다.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헛된 순환운동 속에서 대상 a는 정확히 어느 지점에 있는가? 대쉴 해밋 Dashiell Hammett(1894-1961)의 <말타의 매 Maltese Falcon>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안정된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한 남자를 찾기 위해 고용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페이드는 그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몇 년 후 다른 도시에서 그 남자가 발견된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명으로 살면서, 건축부지에서 들보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빗맞히고 떨어지자 그 곳을 피해 달아났던 때와 거의 유사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라깡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이 들보는 그에게 세계의 부조화에 대한 표지, 즉 였다. 그의 ‘새로운’ 삶이 과거와 거의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새 출발이 헛되지 않은 것이며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대상 소문자 a의 기능을 발견한다. ‘지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해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벗어나려고 했던 것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왜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의 평범한 운명에 만족하고, 하찮은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어디서 우리는 대상 소문자 a를 발견하는가? 대상 소문자 a는 바로 그와 같은 잉여이며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키도록 그 남자를 충동질했던 그 알 수 없는 가상 make-believe이다. ‘현실 reality’ 속에서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공허한 표면(단절 이후에도 그의 삶은 전과 똑같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환상에 있어서의 목표와 목적”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공산주의적 대의 명분이 실패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의 형식적 순수함 속에서 그의 교육극들에 의해 함축된 주체 위치로서, 거절의 몸짓, 포기의 몸짓을 윤곽 그리기 위해서 브레히트로 돌아가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첫번째 예스는 윤리적 사명의 수준에 남아 있고 윤리적 위임을 떠맡는 행위를 나타내는 반면, 두 번째 예스는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 윤리적인 것의 보편적 차원의 종교적 중지의 방향을 가리킨다. 윤리적인 것에 대한 ‘예스’는 그 극단으로 운반될 때 조만간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보다 급진적인 예스, 우리의 발 밑에서 근거를 잘라내 버리는 예스,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에 대한 예스를 취하도록 강제한다. 즉, 진실에 대한 ‘예스’는 진실을 위해 거짓말하도록 우리를 강제하고, 싸움에 대한 예스는 도망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간단히 말해서, 규칙에 대한 예스는 우리를 규칙의 정초적인 예외로 데려간다. 브레히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싸울 수 있으면서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약속을 지키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면서 인정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모든 미덕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다. 즉,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

 주체는 윤리적 의무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인 완수로서 출현하는 이 보편적인 것의 ‘주름ply’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브레히트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해 관계를 따르도록, 진실이 아프게 하지 않을 때 진실을 말하도록, 거짓말이 우리에게 이득을 줄 때 거짓말을 하도록 강제하는 표준적인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윤리학의 내재적인 자기-부정, 즉 윤리적 보편성을 중지시키는 윤리적 명령이다. 거절이 현저하게 현대적인 현상인 것은 바로 이 ‘윤리적인 것의 중지,’ 명예와 윤리 간의 이 분열(불명예스럽게 행동하라는 윤리적 명령)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브레히트가 우리는 혁명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당신이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아닌’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고 단언할 때,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대의를 위한 자기-말소 self-obliteration 라는 통상적인 윤리학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또 다른 나사를 돌려 말소 자체를 말소해야만 한다. 즉 자기-희생의 감상적인 몸짓으로서의 말소를 폐기해야만 한다. 이 보충적인 포기가 라캉이 ‘주체적 궁핍 destitution subjectiv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