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로의 여행>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나로 하여금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기괴한 장애물이 영화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 <큐어>에서 경찰의 공개 심문 자리에 선 마미야가 “본부장, 당신 누구야?”라고 내뱉는 질문이 일으키는 효과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관통하는 관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아가 텅 비어 버린 듯한 마미야는 끔찍한 최면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앉은 심문 자리에서도 태연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 보라는 후지와라를 향해 오히려 몇 번을 반복해 본부장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되묻는다. “뭘 묻고 싶은 거야?” 후지와라는 마미야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비껴가려 한다. 마미야의 치명적인 몇 마디가 주체에 균열을 가하고 보는 이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기괴함이란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근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불안해진 주체의 신경증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영화가 그런 기괴함을 불러 일으키는 지점을 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현실의 기술 복제 예술인 영화는 현실적 허구로서 자기 타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 들이기 힘든 환상이 출현할 때, 영화는 때로 관객이 품을 만한 의심과 검증을 스스로 대리 수행함으로써 이 허구적 세계의 현실성이 믿을 만한 것임을 납득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속임수에 가깝지만, 영화가 자기 세계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나면 관객은 그 태도를 따라하게 된다. 가상의 세계를 그럴 듯하게 완결된 것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영화는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검증을 해 본 척 하며 의심스러운 틈을 봉합하는 것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이 같은 봉합이 수행된다. 사고 3년 만에 돌아온 남편 유스케가 미즈키 앞에만 보이는 허상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하철 역무원과 대화를 하는 장면부터 서서히 해소된다. 미즈키 이외의 타인과 대화하고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 주면서 우리는 유스케의 육체성을 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상하게 견디기 어려운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유스케가 영화 속에서 정말 실존하는 인물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영화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유스케와 같은 존재라는 시마카게가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 시마카게의 집이 폐허로 돌변하는 것이나 후지에의 죽은 동생 마코와 미즈키의 죽은 아버지의 육신을 대면하는 이 영화의 세계를 제시해 주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나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허구의 자기 검증 뒤에 남겨 놓은 이상한 잔여물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한 아이가, 그리고 시장에서 어떤 승려가 유스케를 향해 보내는 응시에 붙잡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유스케의 육체성을 확인시켜 줄 정도의 검증에 그치지 않고, 응시하는 눈빛을 보태어 놓았다. 그들의 응시는 영화가 구축한 허구적 세계에 일부러 내 놓은 갈라진 틈 같았다. 텅 빈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영화 자신도 사실 유스케를 이상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 순간을 지난 이후에도 영화가 자기 세계가 잘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한 실체를 알아 버린 사토코가 홀로 제국주의의 심장과 대면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그의 정신이 무너진 것처럼, <해안가로의 여행>은 유스케를 의심하는 영화 자신의 응시를 감지하고도 이 허구적 세계를 계속 믿으며 따라 가야 하는 일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광기를 경험하더라도, 혹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어떤 것과의 대면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인 더 하우스>

<인 더 하우스>는 대체로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클로드가 라파 가족의 밤을 탐사하는 문제적인 장면에 들어 찬 빛과 어둠의 표현주의적 충동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빛은 부드럽고 그림자는 옅게 다루는 편이다. 자연광처럼 느껴지는 빛이 여러 각도에서 고르게 인물을 비추어 얼굴의 굴곡이 도드라질 겨를이 없는 야외 낮 장면을 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빛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빛과 어둠의 대조가 두드러진 장면이 나오면 이내 그 예외성 때문에 눈여겨 보게 된다.

광원이 화면 안에 놓여 인물과 사물에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이 클로드와 제르망의 관음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뻔한 독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조성해 가는 빛을 다루는 방식의 평균치를 갑자기 벗어나기 때문에 이루어 내는 효과는 크다. 화면 안에 자리한 광원은 시각을 성립시키는 빛의 존재를 뚜렷이 상기시킨다. 감각의 조건으로 머물지 않고 인물, 사물과 함께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로 전면 등장할 때 빛은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영화적 진술이 된다. 라파 부부의 대화를 엿듣다 황급히 돌아선 클로드가 벽에 걸린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는 척하는 장면에서 건너편 벽의 조명 빛이 클로드가 은폐하려는 것을 동시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화면 속 광원은 그 자체로 말하는 제3의 존재다. 제르망 부부가 여전히 클로드의 소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극장 속에서 영사기 빛이 시각화하는 거대한 열망의 크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빛에 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은 사실 화면 속 광원보다 극대화된 조도가 만드는 느낌이다. 클로드와 제르망이 클로드의 소설에 대해 논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교실 장면은 한쪽에 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도 밝아 교실 내부를 환히 비춘다. 그 밝기가 야외 낮 장면보다도 밝아 의아할 정도다. 빛이 측면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데도 인물의 얼굴 그림자는 부드럽고 빛을 받은 실루엣이 때로는 밝게 번지기도 한다. 반사판으로 그림자를 조절하고 최대의 조도를 실내에 쏟은 이 장면이 교실 내부를 신전과 같이 만들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라파 가족의 일상을 두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소설을 만드는 클로드와 그 작업을 지도하는 제르망이 이 순간 어떤 신적 권능을 지닌 것처럼 심취해 있음을 극대화된 조도가 드러내고 있다고 느끼고 나면, 이 영화가 빛을 신전과 현실, 그리고 심연의 세 단계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클로드와 제르망의 신적 권능이 현실과 재현의 세계를 뒤섞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 보면서 영화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냉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다양한 층위의 냉소가 향하는 것은 결국 착취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르망이 아내 쟝과 클로드를 착취하듯이 클로드 역시 제르망과 자기 삶을 착취한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양자적 관계의 군상은 자기 결핍을 다른 것으로부터 보상 받으려 할 뿐 아니라 독점하고 침해하는 양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술을 본받을 것 하나 없지만 미적 감각은 키워 주는 허영의 도구로 대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클로드의 소설 작품 역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착취하여 완성된다.

현실을 착취하는 예술의 탐욕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카메라의 응시가 관음증적 착취의 시선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렌즈가 누구의 눈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에 달렸음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은 이중으로 덧댄 눈에 가까울 것이다. 한 프레임을 가득 채운 아파트의 각 세대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 자신의 시선, 그 중층적 시선의 결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클로드가 몰래 집 구석구석을 도둑질 하듯 뒤져 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벽에 붙어 섰을 때, 카메라는 클로드가 불가능한 시야까지 움직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스더를 확인한다. 이 때 카메라는 전적으로 클로드의 확장된 눈이 되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서스펜스의 법칙 아래 카메라는 오로지 훔쳐보는 자의 시선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카메라 시선의 지위를 자기 냉소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사후적으로, 그것도 예외적으로만 가능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이 영화는 위험한 질주를 해 본 것이다. 영화 안에서 신적 권능을 지닌 카메라 시선의 문제는 그 시선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