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파의 딸들>

<올파의 딸들>은 가상과 현실의 흥미로운 교차 위에서 시작한다. 올파와 그의 첫째, 둘째 딸 고프란과 라흐마를 대역할 배우가 올파 본인과 셋째, 넷째 딸 에야, 타이시르와 대면한다. 고프란과 라흐마는 국제 테러 조직 IS에 가담하며 집을 떠났다. 대역 배우가 참여하면서 이 가족의 빈 자리는 ‘상징적으로’ 채워진다. 이 상징적 보충은 올파 가족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당사자의 현실과 영화의 가상이 직접적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대역 배우들은 끊임없이 올파와 에야, 타이시르에게 질문한다.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재연할지, 그 때 당신의 감정과 생각은 어땠는지. 영화가 이렇게 올파 가족의 빈 틈에 개입함으로써, 올파와 두 딸은 자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할 도전에 직면한다.

현실은 환상을 통해 구성된다. 이 영화는 환상 장치를 통해 올파 가족이 자기 현실에 대한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가족 당사자 중에서 문제적인 것은 올파이다. 자기 자신의 대역과 대면해야 하는 유일한 인물인 그는 이 영화가 자기 역사의 재구성 가능성을 가장 크게 기대하는 인물이다. 올파는 아마도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모순에 대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얻는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던 올파는 전통적 성역할에 저항적인 여성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의 구획 내에서만 그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올파의 저항은 성역할 구조에서 필요한 국면에 따라 단지 자리 바꿈을 할 뿐인 듯한 한계를 지닌 것 같고, 자신의 딸들에 대해 지나치게 통제적인 면은 올파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수행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런 양육 방식이 고프란과 라흐마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되게 만드는 일상의 씨앗이었음을 이 영화는 당사자의 자기 진술과 대역 배우의 질문을 통해 드러낸다.

인간은 입체적이어서, 모순되는 태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조건이며 자각하기도 쉽지 않다. 그야말로 인간 주체는 다양한 층위에서 상충적인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가 닿는 장소다. 호명되는 주체라는 말이 주체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호명에 응답하는 인간은 저마다의 대가를 치르며, 거기에 우리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책임은 주체의 선택을 초과하고, 이 간극이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고프란과 라흐마가 IS에 뛰어든 데에는 어머니의 책임만 있지 않다. 그것은 부패한 튀니지 세속 정권의 오랜 독재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억압적 이슬람 체제, 가족의 경제적 조건 안에서 조성된 취약한 돌봄 환경 같은 것이 고프란과 라흐마의 경험과 뒤섞여 빚은 결과일 것이다. 고프란과 라흐마, 또는 어머니 올파의 모순은 자신의 모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외부 세계의 모순이 중층 결정된 하나의 양상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염려하게 되는 것은 올파가 끊임 없이 책임의 자기 귀결로 빠질 위험이다. 가족 당사자의 자기 반영적 재현에 집중하는 이 영화가 일으킬 최악의 효과는 아마도 올파의 내적 파국,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책의 지옥일 것이다. 잘못된 신념으로 행한 일에 대한 자기 기각의 수준보다 올파가 감당해야 할 자책은 외상적인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올파는 외상적 자책을 이미 여러 번 반복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올파에게 필요한 것이 자책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는 것, 자신이 호명되는 장소를 전면 수정하는 것, 그러기 위해 그 자리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가 올파의 삶에 개입할 이유가 있다면 이를 돕는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올파에게 할애하는 응시의 지평, 그 폭과 깊이를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가늠하게 된다. 마지막에 올파의 대역 배우는 에야와 타이시르가 억압의 대물림을 끊는 세대가 될 것이라 말하고, 에야는 이 가족이 자신을 망치게 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동안 어머니 올파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다. 환영적 보충물로 완성된 가족의 무대에서 올파의 침묵이 자책과 응시 중 어느 장소의 것인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음 소희>에서 혼자 춤 연습하는 소희를 바라볼 때 받은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소희>의 그 장면에서 내가 소희의 춤을 거친 몸짓의 수준으로 느낀 것은 소희가 자신을 내맡긴 음악을 나는 모르며, 단지 내가 그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희의 몸놀림이 만드는 옷깃과 바닥의 소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소희의 감각을 관객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소희의 춤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소희라는 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케이코의 말 없음이 화면의 공간을 채우는 생활 소음과 타인의 목소리에 대비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도 그런 격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각적 격리는 반대로 작동한다. 소희의 감각이 관객으로부터 차단됨으로써 우리는 소희의 춤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케이코에게 주어지지 않은 소리 감각이 케이코에 대한 이해의 방해물이다. 케이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 영화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청각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각적 이미지에, 케이코의 몸짓과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케이코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모방하면서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케이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이야기를 창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된다. 그런 과정을 잘 드러내는 오프닝 시퀀스는 어쩐지 사랑스럽다. 소리는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만들 뿐, 연속해서 제시되는 이미지가 인물과 시간, 공간을 열어 놓는다. 케이코, 눈이 흩날리는 겨울 밤, 낡은 세월의 복싱장, 관장과 코치, 화이트 보드의 글자로 주고 받는 대화, 권투 훈련, 훈련 일지, 샌드백. 어쩌면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잘 배치된 이미지가 이야기를 생성하고 있다고 직감하는 감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하나 같이 정갈하게 고안된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어서, 이에 감응하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영화가 케이코를 단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불러 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 영화가 노스탤지어 세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려면 케이코가 필요하다. 곧 문을 닫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 된 복싱장의 마지막 여성 프로 복서에 대한 이야기를, 16mm 필름의 입자로 그려내는, 고전적 이미지 서사의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케이코를 도구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케이코가 노스탤지어 세계의 영화적 형식을 납득시키는 열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케이코의 일상을 유심히 지켜보고, 상실에 응수하는 실존적 선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케이코의 삶을 견디고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도 영화의 노스탤지어 세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코가 낡은 복싱장에서 노쇠한 관장과 충직한 코치들과 함께 권투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맞는 것이 두려워진 슬럼프에도 불구하고 복싱장을 대표하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자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코로나 시대에 겪는 케이코의 곤란과 수어로 나누는 대화의 신비로운 침묵을 우리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케이코는 영화에 대해, 영화는 케이코에 대해 정합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이 영화의 노스탤지어를 감상적 아름다움의 지옥으로만 치부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닫힌 세계다. 상대방 선수의 펀치에 고꾸라지는 케이코의 허우적거림이 너무 생동감 없어서 권투의 양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세계가 그런 방식으로 구성된 환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기완결적인 세계의 윤리를 선한 타인들이 아니라 케이코가 지탱한다. 상실과 패배에 괴로워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지 않은 케이코의 작은 선택이 영화에 가능성의 출구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설령 또 다른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케이코가 영화의 환상을 떠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은 아닐까. 어쨌든 예정되지 않은 현실의 불안이 그 뒤에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믿음직스럽다. 달리 좋은 마지막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과 뒤쫓는 임모탄 조 부하들의 차량이 작은 점으로 변하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스크린의 우측에서 몰려와 이들을 뒤덮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이 장면처럼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와 위세를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 우리의 환상이다. 우리는 영화가 쫓고 쫓기는 추격과 질주에 몰입해 온 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운동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관계를 은유하기도 하고, 운동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투사하는 환상의 양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기를,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질주하는 이미지가 그 환상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이 달리는 동안 우리의 환상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추격과 질주가 아찔한 향락적 층위로 우리를 인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만큼 강렬하게 구현하는 영화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는 단지 황량한 사막과 갈증을 불러 일으키는 건조한 공기, 그리고 모래 바람이나 거대하고 고독한 차량과 위태로운 속도 같은 물적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물적 속성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환상을 구성하는 맥락 위에서 상상적으로 감각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도로 위로 끌어 들여 절박하고 긴급한 추격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의 선악 대립에 연루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얽히게 되는 이 선악 감각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전쟁이 야기한 황폐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반복하고 있는 극심한 착취와 폭력의 구조를 지켜본다. 지배자, 임모탄 조는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식량, 물, 석유와 같은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을 예속시켜 성적으로 착취하는 권력을 누리면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우리 현실을 잠식한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의 폭력 구조가 이 가상의 세계에서 폭로되는 것 같다. 우리의 환상에 절박함을 불어넣고 질주의 욕망을 배가하는 질료가 이 닫힌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질주의 환상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얘기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정말 중요하다고 할 것은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자기 자신의 전통을 비튼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은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다. 맥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퓨리오사는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맥스는 투쟁을 돕고 방향을 조언할 뿐, 퓨리오사가 승인하고 결행한다. 맥스는 혁명의 주체의 자리를 퓨리오사에게 양도하였다. 임모탄 조 체제에서 희생자의 총체적 모습을 띈 퓨리오사는 ‘당신이 기다리는 그 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혁명 주체의 원리를 구현한다. 진정한 혁명의 주체는 납치당한 자이고, 복종하고 노동을 착취당하는 자이며, 혐오와 객체화로 위협받는 여성인 것이다. 자신을 납치당한, 착취당하는 희생자 여성에서 혁명을 수행하는 자로 뒤집어 규정하는 순간, 이 영화는 이제 반대로 귀환하기 위해 질주한다. 약속의 땅 그린 랜드는 존재하지 않고 시타델에 두고 온 퓨리오사 자신의 역사를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좌-우에서 우-좌로 뒤바뀐 귀환하는 질주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탈주는 해방과 희열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막다른 곳에서 그린 랜드의 사막을 볼 뿐이라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기겁하며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귀환의 질주가 완수되고 나서, 맥스는 결국 퓨리오사의 시타델을 떠난다. 맥스는 여전히 서부 영화의 영웅과 같은 운명이다. 그는 퓨리오사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 맥스가 왜 떠나는지 나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맥스는 퓨리오사가 새롭게 만들 시타델 체제, 그 역사 바깥에 있어야 이 시리즈의 질주하는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퓨리오사는 멈추었지만 맥스는 떠나야 질주의 향락적 상연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점에 유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혁명보다, 계속 즐기기를 욕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