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철학은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지나치게 모호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가끔 정직하지 못합니다. 반면 분석철학은 열정적이고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이지만 종종 얕고 따분합니다. 전자는 문학을 향해 있는 반면, 후자는 과학을 향해 있습니다.
문학 쪽 학생들은 프랑스식 해체주의의 신비에 입문하고, 인간 주체의 죽음을 축하하고, 인간은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인간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자각은 무의식의 독재에 심각하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지겹도록 반복해서 배웁니다. 반면 경제학, 정치학, 인지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사회적 제도가 완전히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동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주입 받습니다.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장피에르 뒤피, 지은이 서문(2000년 영어판) 중에서
인용
가면 뒤 진짜 얼굴
“감염증이 퍼지고 몇 년 후에 기생생물을 얼굴에서 제거하는 실험이 성공했지만, 시몬인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가기로 결정했어요.”
“이해할 수 없네요.”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여자는 유일하게 가려지지 않은 두 눈으로 소은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어차피 가면을 쓰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모르지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지금 당신을 향해 웃고 있을까요? 아니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그게 제 진심일까요?”
소은은 말문이 막혔다.
“가면이 우리에게 온 이후로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면은 거짓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시몬 사람들이 여전히 가면을 쓰는 이유랍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구행 우주선이 잠시 뒤에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왔고, 여자는 바닥에 놓여 있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소은이 물었다.
“그래도 떼어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가면 뒤 진짜 얼굴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시몬을 떠나며』, 김초엽
회복은 노출의 한 형식
기형은 근대적 의미의 대문자 주체들의 거대서사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서사할 수 있는 시공간을 창조한다. 사라 아메드는 말한다. “회복은 노출의 한 형식이다the recovery is a form of exposure.” 치유는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재난의 과거를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만들지 않고 과거의 상처가 새긴 흔적이자 표면인 흉터, 그 틈을 남기면서 맞붙어 살아가는 일이다. 현재를 흉터라 불리는 살의 결 곁에서 작동케 하는 것, 신체가 상처로 빚어졌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므레모사』 작품해설 「시간의 살, 므레모사」, 김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