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빛과 그늘/ 박노자

현재 한국의 월드컵 열기를 생각하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일이다. 여러 ‘플러스’ 중에서 몇 개라도 열거하면, 고용 창출, 한국 알리기, 외국 손님의 폭발적 증가를 통한 ‘세계와의 만남’ 등의 효과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효과들마저 이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 창출’이라고 하지만, 월드컵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절대 다수의 직장이 ‘파리목숨’ 비정규직이라는 사실부터 머리에 떠오른다. 곧, 외국인에게 귀엽게 웃어주면서 한국 토산물을 파는 ‘민간 외교관’ 아가씨들이, 사실상 시간당 1500~2000원을 받으면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착취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토산품을 사는 외국인이 만약 스칸디나비아처럼 비정규직이 법으로 금지된 지역 출신이라면, 그 사실을 알 경우에 한국 지배층의 ‘아이엠에프 극복’이라는 허풍을 어떻게 볼까?

그러나 ‘국위 선양’의 애호가들이여, 걱정하지 마시기를! 절대 다수의 월드컵 손님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들을 위해서 준비된 각종의 ‘한국 알리기’ 프로그램에서 살아 숨쉬는 ‘민중의 한국’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대문·남대문에 가서 놀라울 정도의 싼 가격으로 양질의 상품을 사도, 그 ‘가격 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그렇지 않아도 탄압을 받는 외국인·비정규직 노동자의 집회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부에 감사를 보내시기를! ‘모처럼 오신’ 외국의 ‘귀빈’들이 이미 박제화·박물관화되어버린 ‘전통 문화’만 약간 구경하고 그걸 ‘진짜 한국’으로 알 것이다. 불의와 착취에 맞서는 민중의 정신이야말로 한국의 가장 고귀한, 지금도 살아 숨쉬는 전통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명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바깥세상’과의 자유로운 왕래가 매우 어려웠고, 병역 미필자 남성이 여권을 쉽게 받을 수 없는 부끄러운 현실을 청산하지 못한 한국에 ‘세계와의 만남’은 분명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을 계기로 하여 어떤 종류의 ‘세계’가 올지 생각해보자. 비행기·호텔·경기장 입장권의 값을 감안해 축구공과 운동복을 만드는 중국·인도·파키스탄·동남아의 노동자들이 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게 돈만의 문제인가? 한국인이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 어렵고 번거로운 만큼 그들로서 한국 비자를 받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비자를 잘 받아도 한국 공항에서 이유도 없이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물론, 월드컵 기간이라고 특별히 한국의 관련 기관이 ‘자비’를 베풀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된 ‘고객’은, 돈이나 입국 절차에 문제없는 서구·미국·일본 등의 ‘특권 지역’ 출신일 것이다. 그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일산·안산·인천의 공단들에서 욕설·구타가 없는 한국인과의 동등한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고언(苦言)은, 월드컵 의미의 전면적인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광기에 휩쓸린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라는 일그러진 배경을 두고서도, 잔치는 어디까지나 잔치다. 비록 국가주의·상업주의의 상징인 ‘빅 스포츠’의 논리에 의한 일이지만, 세계의 시선이 잠시나마 한국에 집중된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큰 경사이자 자랑이다. 다만, 그 잔치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88올림픽이 노태우 정권 시절의 권위주의 사회를 민주 사회로 만들지는 않았듯이, 2002월드컵도 권위주의 잔재에 신자유주의 모순이 복잡하게 겹친, 상처 입은 사회를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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