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이 <미스테리아>의 편집장 김용언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부탁 받은 주제는 폭력을 보여 주는 것에 대한 윤리학.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될 것들을 중계하면서 폭력의 미학이라고 꾸미고 있는 한국 영화의 경향에 대해 윤리적으로 반문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주제를 위해 정성일은 영화 <곡성>을 꺼내 들었다. 이 영화는 굳이 말하자면 폭력의 과정을 불필요하게 묘사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가족이 몰살 당하고 난 그 처참한 현장을 제시하기 위해 인물과 이야기를 폭력적으로 몰아 간다. 영화가 처음부터 바라던 쑥대밭의 폐허를 향해 치닫는 영화적 과정이 폭력적인 것이다. <곡성>에 대한 정성일의 생각이 어떤지 참고해 볼 수 있도록, 언제나처럼 장황하고 명료하지 않지만 <미스테리아> 7호에 실린 글 조금 발췌.

<곡성>을 여기서 한 예로 삼은 이유는 단순하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영화를 본 다음 이렇게 자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무언가 답을 얻으려고 한 경우는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여기에는 은폐된 것이 있으며 내가 그 비밀을 밝혀주겠다고 매달릴 때, 모두 각자 자기의 견해만이 올바르다며 일반적인 견해에 대한 불신에 가득차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 한다. <곡성>은 견해의 상상적 공동체라는 것을 거의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성취일 것이다.

더 나쁜 점은 나홍진이 종종 눈속임을 하듯이 교차편집할 때 그저 이야기를 쫓아가는 이들은 잘못된 문제 제기로 인도될 수밖에 없는 함정에 이끌린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졌는데도 무당 일광과 외지인의 굿판을 구태여 교차편집한다. 사실상 이런 편집은 거의 폭력에 가깝다. 목적지는 매번 탈선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이야기가 그런 것은 상관없지만 형식이 그렇게 되었다면 결과를 따라갈 때마다 원인의 역행 지점을 놓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영화의 주인공들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사실상 어떤 결정도 더이상 내릴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진 다음 끝나는 것은, 윤리적 포기 다음에 오는 그들의 소외를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에밀 슈타이거는 희극이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 영화는 차라리 이웃을 멸종시켜버리는 것이 헬조선의 실존이 지닌 부조리함을 구경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것이다.

‘오작동을 거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다’, 정성일, <미스테리아> 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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