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진중권의 디빠들에 대한 비판의 시작점은 적절했다, 하지만 진중권은 그들의 비평적 담론이라는 대타자에 대한 냉소를 막아 서서 깨 부수고 난 다음 다시 대타자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디빠라는 냉소주의적 주체가 하고 있는 비평이라는 대타자 부수기가 디워와 심형래가 전파하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한국적 버전의 세계 패권주의, 기술중심주의 권위로 폭력적으로 회귀하고 있다면 이 경로를 차단하고, 대신 그들이 하고 있는 비평 권위 부수기의 종착지로 안내해 줘야 한다, (그 종착지는 비평 담론의 無의 지점, 사실 비평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라는 말?
그렇다면 김규항으로 가야 한다는 건데…하지만 김규항은 진중권의 최초의 행위을 놓친 것이고…

출처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21592&section=section4&section2=

‘디 워’라는 숭고한 대상과 진중권의 역할
‘디 워’를 둘러싼 망측한 상황에 대한 지젝적 재론

 

레비나스

진중권의 행위는 옳다

인터넷이 요지경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저는 많은 담론가들이 온전히 인터넷 요지경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이 결정적인 간극과 파열의 상태를 뒷골목이야기 처럼 취급하고 있는게 아닌지 한탄만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 이 경황들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네요. 황우석 아니 더 소급해보면 ‘안티 오노’라는 단락과 맞닿아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분명 하나의 재앙처럼 계보적으로 다가가는걸 차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적 난맥상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그런 이유지요. 인터넷이란 공간은 뚝 떨어진 재앙 그 자체가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디워에 대한 진중권씨의 개입은 적절해 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중권씨는 분명한 의미로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꼬집어 냈지요. 그렇지만 그는 이런 문제들을 역사적 계몽의식으로 풀어냄으로서 그의 본능을 침잠시키고 있는게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즉 일련의 상황들의 간극을 역사주의적, 연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하기에 이 상황들이 너무나 특수하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 도구들과 문제의식들은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신체없는 기관’에서 이렇게 주장했지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철학적 가치 쓰레기다. 그러나 레닌의 정치적 본능 그것은 진짜다’라고요. 같은 방식으로 진중권씨를 치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중권의 정치적 해석 쓰레기다. 그러나 진중권의 정치적 본능은 진짜다라고 말입니다.

권력에게 보내는 혁명적이지 못한 냉소들

황우석 또는 디워같은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서 당혹스러운건 이겁니다. 그들은 분명 권력에 대한 냉소를 보내고 있다는점 말입니다. 예를들어 보면, 노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노조의 권력에 대해서 냉소를 보냅니다. 민노당을 비난하는 논리들을 보면 민노당에게 적실시되는 또는 균열지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지요. 대기업 노조에 대한 애매한 관계에서 부터 노동자를 위한 당이라는 주장이 가식이라는 말까지.. 많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디워도 그랬지요.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해서 많은 디워 옹호논자들은 어쩌면 세련된 담론일지 모르는 것들로 비평가들의 권위를 단두대에 올리는 일을 했습니다. 황우석 때도 그들은 모든 윤리적 반대를 우숩게 여기고 그것들을 의문에 부치는 일을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은 어떻게보면 포스트모던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냉소들은 포스트모던의 이론적 파열상과 다르게 전혀 혁명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뽑을 것이고, 민족주의에 열광할 것이며, 국가주의에 함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던의 실패를 예견한 지젝은 탁월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 내고 있지요.

진중권씨가 맞닥드린 그 파시스트적인 주체들은 실은 자유주의적인 주체이며, 그 자신의 이론적 논리의 외형적 모습이 아닐지요. 물론 진중권씨는 그 뒤의 무엇인가 더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주의같은 판본들 또는 보편주의로의 회귀같은, 이 이론적 후퇴들이 진중권씨 또는 자유주의자들이 겪고있는 끔찍한 곤긍이 아닐지요.

마르크스를 거대 담론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많은 사상가들이 그 즉시 거대 담론화 될 수 밖에 없었던 사장된 이론들의 슬픈 장송곡들에 대해서 지젝은 이런 말로 위로했을 겁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그 자체로 탁월한 오이디푸스라네 친구.’ 여기서 지젝은 자유주의의 적실성에 테클을 걸고말겁니다.

‘디 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악무한적인 상황. 지젝적 돌파를 위해서 이론적으로 지젝에게 충실해야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주체가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상징계의 권력에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젝의 주장일테지요. 권력에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이 권력적이라는 아이러니.

칸트로 거론되는 물자체에 대해서, 지젝은 물자체와 관련없는 어떤 영역을 산출해냅니다. 그건 데카트르가 걸었던 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절대적 부정성의 산출이지요.

물자체에 대한 감각과 이성의 개념적 종합은 칸트가 예견했듯이 근본적으로 삐딱하고 왜상적이라는 것, 그런 왜상적 경험들과 종합을 모두 부정하는 데카트르의 의심, 행위에 대해서 지젝은 주체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절대적 부정성의 영역, 유령이 침몰하는 어두운 전조. 세계의 밤.

‘세계는, 대상은 그 자체로 無이다. 그렇지만 주체는 이것들을 삐딱하게 봄으로서 이데올로기(신, 법)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혁명성은 이것들이 모두 부정되는 절대적 부정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실재(대상, 물자체)의 텅빈 지점을 승인한 그 이후의 주체의 자리, 無의 영역을 경험한 후의 주체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읽으면서 지젝은 디 워를 옹호해내는 냉소적인 탈근대적 주체들에게 이렇게 묻고있는 겁니다. 왜 여전히 아무것도가 아닌이 아닌, 무엇인가.

‘디 워’라는 숭고한 대상

저는 디 워라는 대상에 숭고한 이미지를 덧칠하는 것을 보면서 여전히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은 냉소주의적 주체라는 지젝의 주장을 더 상보하는 것이지요. ‘나는 디 워가 쓰레기인걸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양 행위할거야’ ‘나는 자본주의가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양 행위할거야’ 라는..

지젝이 거론한 현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판본인 냉소주의적 주체. 어떤 부류들은 그들의 냉소주의를 포스트모던이나 권력 비판의 새로운 돌파구로 찬양하고 있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충분히 이데올로기적일 겁니다. 진중권씨의 자유주의적 곤긍은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예컨데 진중권씨의 자유주의는 자유라기보다 그것을 적당히 중용하는, 쾌락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차원에 머물러있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진중권씨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름 없는’ 자유의 심연, 그 뒤의 파괴적 실재 그 자체와의 대면이 아닐지. 그는 완벽한 자유를 부정하면서  그것과 대면하면서 이렇게 목놓아 외쳤던 겁니다. ‘저것은 파시즘이다!’

마르크스가 이미 탁월하게 증명했듯이 화폐의 가치는 물화의 영역에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주체에게 가장 두려운 대면은 화페의 무가치성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은폐된 영역과의 충돌은 모든 상징적 조건을 파괴하는 카오스 그 자체지요.

지젝의 논의는 이렇습니다. 주체는 궁극적으로 이런 파괴적, 실재라는 無의 영역을 빗겨가기 위해서 온갖짓을 꾸며낸다는 겁니다. 냉소적 주체들은 이미  ‘까지말아’라는 권력에 대해서 냉소를 보내고 있지만, 그 잠정적 내용속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의 실재적 차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려 하나의 벌충으로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인터넷의 우익화는 어떻습니까. 또는 가까이에는 일본의 우익화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하나의 가치가 생기면서 더이상 우익들을 옹호할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지요. 탈근대 이론들의 곤긍은 그것들은 적절하게 설명할 이론적 개념이 없다는 겁니다.

‘너는 섹스를 즐겨야 한다. 너에게는 이제 더이상 섹스를 하지 않을 변명거리는 없다. 그럼에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결함이다!’

비아그라가 대중화되는 시대에 성의 차원은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에 가깝습니다. 이제 더이상 섹스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 읽히기보다 억압의 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세계가 된것이지요(무엇이든 안되겠습니까. 환락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처럼 냉소주의의 사회, 새로운 사회는 무너진 권위를 벌충하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집어먹고 있습니다. 진중권씨가 보편주의를 집어 먹었듯이. 그러므로 냉소와 믿음이 같은 무게로 주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지젝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임금님은 벌어 벗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은 앎의 영역이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똘레랑스같은 것들도 거부하지요.

이미 우리 교육에서 많은 부분 타자에 대한 관용정신을 강조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비례하게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타자를 더욱 억압하는 세상과 맞닿아 있지요. 학교라는 공간도 저는 오히려 군부독재시절이 더더욱 인간 냄새나는 교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이러니.. 물론 지젝에게도 앎의 영역은 중요하지만, 이데올로기를 돌파하는 것은 앎이 아닌 ‘행위’에 있다는 겁니다. 이타적 윤리보다는 실재의 윤리. 횡단하는 윤리. 모두가 왕따를 했을때 꿋꿋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행위’.

계몽주의적인 진중권씨는 이 지점에서 요점을 그저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디 워가 쓰레기인걸 모르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행위’하지요.  ‘벌거 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에서의 어른들처럼..

‘행위’의 차원에서 진중권씨의 ‘행위’는 분명 하나의 분열 지점을 열어놓고, 주체의 환상을 횡단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봉합지점에서 그는 또 다른 보수적인 ‘행위’를 했지요. 디 워에 대해서 보편주의같은, 똘레랑스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 자신도 논리적인 모순들을 발견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실재를 견디기

라캉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횡단하기 위해서 실재를 명중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실재는 텅비어있다는 것. 그 비밀을 감추기위해 상징계는 여러 장치와 트랩을 설치하지요. 그러므로 라캉은 실재의 명중 과정을 탐정의 사건 해결 과정과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탐정은 남들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문에 부치며 진실에 다가가지요. 범인들이 만든 트랩을 넘어서면서..

데카르트의 광기, 새로운 주체의 출현 혹은 혁명은 이런 광기의 영역을 반드시 넘어야한다는게 지젝의 주장일겁니다. 데카르트가 해야했던 모든 것의 철회는 절대적 부정성의 영역으로 실재를 맨 몸으로 겪어야 했던 충돌의 영역,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세계의 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지젝이 호출하는 주체는 안티고네일 겁니다. 그녀의 고집스럽고 영웅적인 몸짓은 그 자체로 상징계의 분열을 알리는 몸짓이 됩니다. 그녀는 오빠의 장례를 방해하는 왕의 상징적 명령에 의해서 법의 부당함을, 그것의 부정성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오빠의 장례를 치루게 되지요. 법의 부정성을 겪고 그것을 넘어섰던 안티고네..

디시인사이드나 웃대같은 가벼운 냉소들이 흘러넘치는 곳에서 진정한 혁명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진정한 혁명은 상징계가 덧칠해 놓은 그 페인트를 벗겨내는 ‘행위’에서 시작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 보입니다.

그 모든 상징적 장치를 의문에 부치면서 그것을 가로지를 수 있는 ‘행위’말로 지젝이 속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실재의 윤리가 아닐까요. 설사 그 ‘행위’가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해도. 인터넷 냉소주의는 그 덧칠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것에 갇히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겨내자는 주장들에 냉소를 보내면서.. 그러므로 진중권씨의 ‘행위’는 어쩌면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중권씨는 그것들을 벗겨내자는 디오게네스가 했던 ‘행위’를 하고 있지요. 최초의 ‘행위’로서 진중권은 옮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 비평과 포지션, 그것은 처분 되어야할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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