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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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펌

 

@서울


1950년 4월 14일 ‘서울 동북 10마일’ 지점의 처형장. 39명의 죄수들이 끌려나왔다. 미군측은 이들이
공산주의자이며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는 기자들이 한명도 없었으며, 열흘이 넘도록 어느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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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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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명 처형에 헌병 2백명이 동원됐다. 아직 6.25가 발발하지도 계엄령이 내려져 있지도 않았다. 어떻게 헌병이
민간인에 대한 총살집행을 할 수 있었을까. 미군은 이것이 남한에서 자주 실시된 처형방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90.JPG”>[서울 3]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9.JPG”>[서울 4]

사격을 위해
도열한 헌병들 뒤에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인물을 주목하라. 미군 장교다. 이 처형에는 6명의 미군 무관 및 장교가 참관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3급 비밀문서(Confidential)’로 등급을 매겨 50년 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왜?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8.JPG”>[서울 5]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7.JPG”>[서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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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5.JPG”>[서울 8]

오후 3시.
일제 사격과 함께 광목으로 눈을 가리운 39명의 죄수들이 처형됐다. 미군은 이들이 마지막 순간,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북한
지도자들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으며 당당한 표정으로 죽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4.JPG”>[서울 9]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3.JPG”>[서울 10]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82.JPG”>[서울 11]


@
대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1천8백명이 처형을 위해 끌려나오고 있다. 미군측은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뒤 감옥에서 수천명의 죄수가 풀려난 것에 자극받아 후퇴하기 전에 미리 처형하기로 최고위급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단위 부대장의 결정에 의한 즉결처분은 최전방에서만 허용됐기 때문이다. 후방인 대전에서 일개 부대장이 이런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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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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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들에 의하면 항상 이런 식으로 피학살자를 미리 파놓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엎드리게 한 뒤 등을 발로 밟고 뒤통수에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74.JPG”>[대전 8]

오른쪽은
헌병, 왼쪽끝은 경찰들이 보인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권총을 들고 두 집단을 위협하고 있다.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73.JPG”>[대전 9]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72.JPG”>[대전 10]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71.JPG”>[대전 11]

확인사살.
총살집행이 끝난 뒤에는 지휘관이 피학살자들을 둘러보며 아직 목숨이 남아있는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가운데 허리를 굽힌 헌병이 한 죄수의 머리에
대고 권총을 발사하고 있다.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70.JPG”>[대전 12]

처형이 끝난
피학살자들을 구덩이에 밀어넣고 다시 한 번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3일 동안 1천8백명이 처리됐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남한측의 야만적인 대량학살을 비난하곤 했다. 미군은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 이 사진을 2급 비밀문서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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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처형에 앞선 기념 촬영(?). 오른쪽의 지휘관인 듯한 군인은 웃고 있고, 부역자
혐의로 끌려나온 사람들도 곧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지는 않은 것같다. 왼쪽에 삽을 들고 나온 사람이 보인다. 그것이 자기 무덤을 팔 삽일
줄이야. 1951년 4월 어느 날.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66.JPG”>[대구 1]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65.JPG”>[대구 2]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그들을 구덩이에 몰아 넣었다. 그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라. 그러나 우리는 등을 보이고 있는 코트복장의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미군장교 스스로 잔혹한 처형이라고 기록한 그는 그 야만의 현장 가까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64.JPG”>[대구 3]

href=”http://www.digitalmal.com/Data/4/0000000363.JPG”>[대구 4]

좁은 구덩이를
향해 일제 사격.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단지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그들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이다. 생존을 위해
그 외의 길이 있었을까. 그것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야만 할 죄였을까. 하지만 미군은 이것이 한국군의 일반적인 부역자 처형방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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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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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좌익인사들을 전향시켜 ‘국민보도연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전쟁 초기 30만
연맹원의 다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 되었다. 하지만 지난 50년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일까?(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월 27일 방송[산자와 죽은자] 필청)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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