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대인은 무림의 시대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후계자 선정을 위해 엽문과 벌이는 마지막 대련을 그의 딸 궁이에게 꼭 지켜보라며 궁대인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보지 않으면 금새 사라지는 것들이 있단다.”
엽문은 남과 북의 무림을 통합하고 그 전통을 지키고자, 혹은 일제 치하 엄혹한 시대 중생의 무림을 지켜 보며 무예의 마지막 단계를 성취하고자 아내와 아이를 두고 불산을 떠났다. 그는 홍콩에 자리를 잡았고 끝내 불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인생의 봄날은 불산에 영원히 남겨 놓았다.
궁이는 악독한 마삼으로부터 궁가 무예의 정통을 지키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정혼을 파기하고 평생 궁씨 가문 사람으로 남기로 맹세했다. 그녀는 엽문을 사랑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담았고, 끝내 궁가 무예를 전수하지 않은 채 엽문에게 반 평생 담아 둔 마음을 전한 후 세상을 떠났다.
엽문과 궁이는 무림의 전통을 지키려 했고 그에 따르는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인다. 시대가 무림을 밀어 내고 있기 때문에 무예를 통해 교감하고 이치와 뜻을 가리던 인생의 봄날에서 떠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이 영화는 한 시대가, 인생의 봄날이, 그리고 평생의 사랑이 떠나는 것을 운명으로 하는 이들이 그 운명을 견뎌 내고 끝으로 뒤돌아 보는 이야기다. 궁가 비법 노원괘인의 정수가 지르고 난 후 뒤돌아 보는 것이라고 한 궁대인의 말처럼.
엽문에게 무예는 뒤돌아 보면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며, 궁이에게 무예는 뒤돌아 보면 자신을 다스리고 세계를 대하는 길을 찾는 것, 동시에 그 추구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할 굴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인생은 멈출 틈 없이 앞으로 떠밀려 마지막에는 미처 매듭 짓지 못한 생각과 감정의 잔상만이 남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말은 사후적으로, 최소한으로 다루어진다. 엽문의 아내 장영성을 설명하면서 그녀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 때문에 말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이건 동시에 이 영화가, 왕가위 감독이 말을 대하는 태도다. 말은 아껴 두었다가 응축하여 조금씩 내뱉어진다. 그리고 몸짓이 상당 부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세 대결 – 궁대인과 엽문, 엽문과 궁이, 궁이와 마삼 – 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엽문이 아내와 아이를 두고 불산을 떠난 후 당사자는 들을 수 없는 방백으로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또는 궁이가 엽문에게 품은 마음을 삶의 마지막에야 엽문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현재는 몸짓이 지배하고 말은 이를 회상하고 정리하려 한다. 이 영화에서 몸짓은 현재적이고 유물론적인 것이며 말은 몸짓에 대한 노스탤지어, 패티시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 무림의 마지막 시대, 그 한 시대의 스승이라 불린 엽문은 과연 스스로 뜻한 바를 이룬 것일까. 또는 궁이는 복수를 위해 평생을 건 맹세를 온전히 지킨 것일까. 정확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자리한 운명의 세계, 매듭지어야 할 맹세가 있는 무림의 시대를 떠밀리듯 잃어 버렸고, 이 운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미결감이 영화의 정서를 지배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미결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지켜 본 몸짓의 현재성에 매혹된 말로 회상하게 된다. 유려한 몸짓, 손을 오르고 내릴 뿐인 무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지켜본 시간.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