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 다 썼네…빡새다…
여기다 한 번 실어 본다…거의 머리속에서 쥐어짜면서 쓴 거지만, 다 써 버리니까 홀가분하군…

가치와 사실의 관계

우선 거창하게 시작해 보자. 인간이 외부 세계의 현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간들이 하나의 현상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어떤 선택된 시각에 기대어 이끌어 낸다. 칸트의 오성 개념만을 두고 본다면 우리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인식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선험적 범주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비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경험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경험적 사실을 통해 획득되는 지식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논의는 나로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식론적 범주 또는 가치관은 우리가 경험해 온 사실들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말이다.

분명 가치는 사물들의 현상을 판단하는 데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물들의 현상적 사실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가치관이 형성된다. 이처럼 서로 순환고리를 이루는 가치와 사실의 관계는 자연적 사실의 관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은 이같은 가치와 사실의 쌍방적 순환고리가 더 직접적으로 작용된다. 따라서 인간 행위 또는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사회과학에서는 어디가 가치가 개입되는 지점이며 어디가 사실의 객관적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인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과학에서 추구하는 ‘객관성’이란 그렇게 쉽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그 말 자체가 하나의 이상적 입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경험이 가치를 형성하고 가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한 판단 체계를 구성한다. 이 풀리지 않는 순환고리는 일면 모순적인 상태로 주어져 둘 사이의 관계망과 의미를 파악하는 데 혼란을 일으킨다.

막스 베버는 이 풀리지 않는 혼란스러운 순환고리를 애써 끊고자 하였다. 사회과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 가치와 사실은 서로 다른 자리를 배당받아야 했던 것이다. 가치와 사실에 각자의 자리를 위치지우기 위해 그는 가치중립과 가치연관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개념을 성립시킨다.

가치중립과 가치연관

베버는 과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은 논리적 분석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영역이라고 본다. 그런데 가치의 영역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는, 즉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 그가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들로부터 형성되는 가치를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는 일은 과학의 연구 영역으로 삼기 힘들다. 따라서 과학이 ‘일차적’으로 취해야 하는 연구 대상은 사실의 영역이 된다.

그러나 사회의 현상과 개인의 행위 유형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사실은 행위자의 가치가 필수불가결하게 개입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더 심각히 고려해야 할 부분은 그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자 자신 또한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연구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연구자의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관심 영역이 그 연구자가 연구할 대상의 범위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연구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연구 과정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가치와 분리된 사실의 탐구란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연구 과정과 방법의 과학성을 기하는 데에 곤란한 상황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 대상으로서의 사실은 그 사실을 발생시키는 행위자의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 동시에 연구자 역시 자신의 가치에 인도된 관심을 통해 그 사실을 판단한다. 연구 대상을 객관적 또는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행위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치의 개입 사이에서 가능할 것인가. 막스 베버가 논의하는 가치 중립성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구자가 연구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미 연구자의 가치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구자의 가치가 지나치게 개입되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위 그 자체보다 그러한 행위를 이끄는 동인은 무엇인가에 근본적인 학문적 관심을 보였던 베버는 연구자가 출발점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투사한다 하더라도 연구 행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서는 자신의 가치를 연구 대상에 반영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만약 이 과정이 소홀해진다면 그 연구는 ‘과학적’이라는 수사를 받을 자격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연구자에게는 매우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언제나 그 사실의 영역에 자신의 가치로써 통제하고 개입하려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자제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우리가 완벽한 객관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직시하면서도 그 고지를 향재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위해 가치중립성은 사회과학의 연구자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규범이다. 그러나 그가 완벽한 객관성을 위해 가치의 영역을 방기하거나 포기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사회과학의 연구과정에는 그 출발선상부터 연구 결과가 도출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연구자 또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행위자의 가치 개입이 수반된다. 이것을 가치연관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베버는 이 가치연관성의 개념을 가치중립성과 마주보게 함으로써 연구자에게 있어 사회과학적 연구에 대해 극도의 긴장과 신중함을 요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연구자가 가치중립성과 가치연관성의 대립적 긴장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성실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베버는 이 부분을 ‘지적 정직성’이라는 말로써 대신한다. 연구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자신의 가치를 기준점으로 삼았는지, 자신의 가치가 어느 지점에서 개입되었는지 밝혀야 한다. 이 과정을 생략하거나 은폐하려는 연구자는 이미 그 자체에서 연구 행위의 진정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가치 영역에 대한 판단은 과학적으로 힘들다고 언급하면서도 베버는 이러한 소극적 차원에서의 가치 판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치 판단에 대한 베버의 언급을 더 살펴보아야겠다. 그는 가치 판단의 문제에 대해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특정 차원에 있어서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특정 차원이란 논리적, 경험적으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한 상태를 뜻한다. 그가 제시하는 특정 차원의 가치 – 특히 실천적인 가치 – 판단의 가능성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수단을 지니는 가치인가, 2)그것이 실현되었을 때의 결과는 어떠한 효과를 지니는가 3)그 가치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는 어떠한 효과를 지니는가. 가치 판단을 가능케 하는 이 특정 차원이란 결국 실효성 내지 현실적 파급효과에 대한 평가의 차원이라고 나는 파악한다. 가치 판단의 영역에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사회과학 – 베버는 경험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 이 그 분석과 평가 작업에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서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판단의 영역은 연구자의 가치 개입 과정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연구자가 특정 사실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게 하는 동인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분석 및 평가는 사회과학에 있어서의 가치 판단에 대한 기여를 좀더 적극적인 수준으로까지 견인할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베버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비판과 나의 의문

베버의 가치중립성과 가치연관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으로 볼 때 가치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그 가운데쯤에 어중간하게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치와 사실에 대한 그의 논의는 양쪽 입장에서 동시에 비판받는다. 그러나 비판 내용을 살펴보면 베버의 주장을 양극단으로 해석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베버의 논의는 극단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극단적 해석에 의한 비판은 베버에게 정당한 비판은 아니라 생각된다.

나 역시 그를 정당하게 비판할 만한 지적 소양이 아직 다져지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그의 논의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질문과 같은 것이다. 내가 의문시하는 것은, 베버가 보이는 극도의 신중함이 그를 가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가치에 대한 직접적 평가에까지 다가가지는 못하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가치에 대한 직접적 기여는 불가능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회과학은 가치의 평가에 대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사실의 평가와 가치의 평가는 어느 정도 분리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가치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파악할 때 그 사실에 연관된 가치를 도출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역이나 또는 양자 동시적 방법은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나의 지적 수준으로 볼 때 후자의 의문에 대해 내가 제기할 만한 논제가 그리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여기서는 전자의 의문을 하나의 예를 들어 밝혀보겠다. 베버가 가치의 합리적 판단과 사실의 합리적 판단을 논리적으로 분리하려고 시도한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의 평가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가치의 영역에서 과학적으로 평가내릴 수 있는 부분에 있어 내려진 판단은 부정적인 것이라 해도 사실의 영역에 대한 연구의 평가는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회과학에서는 가치의 평가에 대해서는 제한적이되 사실의 평가는 전면적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실제 사회적 사실에 적용될 때에는 서로 분리된 평가가 그리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해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는 독재 정권이라는 가치에 대해 엄중히 비판하면서도 박정희의 경제적 성취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물론 이 역시 베버의 논의를 기계적으로 적용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베버가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지만, 여전히 그의 논의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능케 해 줄만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해 준다. 가치와 사실의 분리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베버가 제시한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베버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인 긴장과 고민을 책무로서 부여하였지만,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동시에 베버의 논의 자체에 대해서도 그 정교하고 복잡한 언어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중고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 2001년 5월 20일 나 즉자는 두 명의 아리따운 여성과 함께

시네큐브 광화문이라는 극장에 가서

얼마전부터 보고 싶었던 프랑스의 실루엣 애니메이션, < 프린스 앤 프린세스>를 보았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은 전혀 없었다. 프랑스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는 것 밖에. 그냥 막연히 영화가 예쁠 것 같아서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풍의 만화영화와 뭔가 색다를 것 같아서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막연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디즈니의 3차원 애니메이션이 아닌데 밋밋하고 지루하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은 그러나 기우였다.

그림자의 움직임, 배경화면의 색채 등의 실루엣들…..
그리고 매혹적인 영화음악 – 꼭 사운드트랙 음반을 사고 싶다.
그리고 6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있었는데
하나, 하나가 그렇게 재미있고 기발하고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 유머로 가득했는데, 이것이 미국식이 아닌 유럽풍의 유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놀라운 상상력!

-비약일지 모르지만, 카프카의 < 변신>과 같은 기발한 그 상상력 더구나 재치있는.

‘예비역’이라는 정체성

몸이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2년이 좀 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정신까지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그보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개인이 쉽게 집단에 함몰되는 분위기에서 개인은 주체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그 강요된 정체성 중의 하나가 바로 군대생활을 했다는 `예비역’이라는 것이다. 2년이 넘는 기간을 엄마 품을 떠나 살아보았다는 자부심, 고달팠던 생활에 대한 아프면서도 달콤한 향수, 군대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모종의 우월감이 함께 어우러져,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을 군인으로, 즉 `예비역’ 군인으로 동일시하게 만든다.

군가산점 위헌 판결이 내려졌을 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왜 그 고귀한 분노가 정작 그 판결을 내린 남자들, 즉 대법관들로 향하지 않고, 엉뚱하게 그 소송을 낸 여성들의 출신학교 사이트로 몰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자기 삶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법령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국회에서 통과되는 판에, 하필 군필자 중의 극히 일부와 관계 있는 군가산점 문제에 왜들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인지, 이 뜨거운 연대의식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이런 것이다. 즉 군가산점을 둘러싼 논쟁이 그토록 뜨거웠던 것은 그것이 `예비역’으로서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별 거 아닌 문제를 놓고 남성들이 그렇게 신속하게 통일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살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령 나는 텔레비전의 `시청자’, 라디오의 `청취자’, 신문의 `독자’다. 대통령은 나를 `국민’이라 부르고, 시장님은 나를 `시민’이라 부르고, 동장님은 나를 `동민’이라 부른다. 정치가는 나를 `유권자’라 부르고, 국세청은 나를 `납세자’라 부르고, 백화점은 나를 `고객’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동대장님이 등장하시어 나를 `예비역’이라 불러주신다. 그런데 이 수많은 정체성 중에서 왜 하필 동대장님의 부르심만이 신성한 걸까? `예비역’이라는 정체성은 기껏해야 일생에 한, 두 달 정도만 자기를 규정할 뿐이다. 그런데 왜들 자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예비역’과 동일시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이제 몸뚱이만이 아니라 정신도 제대를 해야하지 않을까? 군사문화가 사회 속에서 유지되는 것은 군을 떠나서도 정신은 여전히 군이라는 특수사회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대학의 여성주의 웹진에서 대학 내 예비역들의 행태를 비꼬는 도발적인 글을 실었다가 또 다시 난리가 난 모양이다. 이 발칙한(?) 글을 여기 저기 퍼 나르며 신성한 남성들의 동맹을 촉구하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다. 읽어보니 별 것도 아닌 글이다.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예비역’과 동일시하여 지레 그 글에서 자기가 모욕감을 느끼는 것도 영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며 바지런히 사이버 동원 예비군 소집을 하는 것도 그다지 성숙한 태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디 이번 사건이 이번에도 문제제기를 한 여학생들을 집단으로 성토하는 우스꽝스런 남성축제로 끝나지 않고, 부디 `예비역’들의 몸과 정신에 기입된 군사문화의 잔재를 드러내어 한번쯤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진중권/<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