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런데 환상과 현실을 가르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자리함으로써 환상이 성립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은유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환상에 진입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인물은 삐삐소녀다.
그리워라 – 현경과 영애
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런데 환상과 현실을 가르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자리함으로써 환상이 성립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은유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환상에 진입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인물은 삐삐소녀다.
그리워라 – 현경과 영애
나는 상대주의가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절대화하면 오히려 진리가 뒤로 숨어버리기도 한다.
가치판단 A와 B를 상대주의의 절대적 권능 앞에서 저울질하면 A와 B 어느 것에서도 그만의 고유한 진리값을 얻어낼 수 없다.
결국 우리는 A와 B 각각의 완결된 질서 내에서만 그것들이 지니는 각자의 절대적 진리값을 캐 낼 수 있다.
상대주의는 A와 B의 진리값을 끄집어 내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을 봉합하기도 한다.
때때로 친구와의 지난한 논쟁이 상대주의라는 사막으로 공간이동함으로써 결정적 충돌을 피하는 것처럼.
어쨌든 나는 이것이 절대적 세계 내에서 상대주의가 보여주는 파괴적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화 디 워와 관련한 구설수는 네티즌들이 디 워에 대한 수많은 평론가들의 비평적 혹평에 대해 대중의 호응과 이를 뒷받침하(리라 믿고 있)는 상대주의의 절대적 권능으로 봉합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 워를 옹호하는 이들은 디 워의 비평적 재앙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위에 상대주의의 황무지를 얹어놓으려 한다.
대중을 설득하기 가장 좋은 신은 바로 이 상대주의라는 절대적인 신이다.
상대주의의 절대성 말고는 디딜 만한 든든한 언덕 하나 없는 한국 대중사회의 빈곤한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디 워의 그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