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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하게 찾아보는 박노자의 글이 요즘 점점 좋아집니다.
제가 과연 소위 맑시스트나 좌파 뭐 이런 수사적 범주에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일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게는 원하고 노력한다면 최소한 중산층 언저리에 낄 수는 있을 만한 사회적인 조건이 조금이라도 있기는 하고
그것이 주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또 원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관념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혁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객관적인 존재로서 제게 있어서조차도 혁명은 간절함과 동시에 두려움이나 불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봐 온 혁명을 보면 또한 혁명을 쉽게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박노자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혁명은 권력과 부의 철폐가 아니라 이동으로 귀결됐으니까요.
저는 혁명을 낭만적인 형태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어떤 변화의 양상들이 축적되어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질적인 단절이나 이동이 발생했음을 뒤늦게 알게 될, 즉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될 그런 긴 호흡의 혁명.
(지구상의 몇몇 국가나 지역에서가 아니라, 즉 변화의 전위가 아니라 전체가 바뀌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긴 호흡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과연 이런 긴 호흡의 시기를 지나고 난 후에는 과연 모순이 종식될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혁명 자체에 모순이, 모순 자체에 혁명이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내게 사회적 변화는 그래서 혁명보다 급진적 개혁에 가까운 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집니다.
방금 떠올린 엉터리 가설인데 혁명은 무의식의 형태에, 개혁은 의식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진보적 또는 급진적 의식이 사회 개혁을 주도해 가면서 서서히 무의식의 영역을 바꾸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것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10년 전 발간된 켄 로치의 인터뷰집 <로치 온 로치>의 저자 그레이엄 풀러와 감독 켄 로치가 나눈 마지막 문답은 이렇다. 그레이엄 풀러가 켄 로치에게 “당신은 세태에 관해 낙관적입니까, 비관적입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말한다. “이 악순환적인 타락에 사람들이 직면해 있기 때문에 짧게 보면 낙관적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나는 낙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돌아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표현하게 하고 그런 탄력을 공유하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거든요. 그게 바로 매일 아침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저자는 한번 더 묻는다.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는 계속하실 생각이신가요?” 켄 로치의 답. “글쎄요 확실히 그럴 것 같은데요.”

10년이 지났다. 켄 로치의 신작 <자유로운 세계>의 개봉에 맞춰 <씨네21>과 켄 로치가 나눈 전화 인터뷰(<씨네21> 671호, 피플, “착취 논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에서 그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짧게는 낙관적이라고 보기 힘들겠지만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미래를 기대하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고,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10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동일한 답이다. 그리고 영화 <자유로운 세계>는 낙관적이지 않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렇다면 그가 보기에 희망을 말하기엔 아직 짧은 세월이라는 뜻인가. 켄 로치가 질문의 종류에 따른 인터뷰 매뉴얼을 습관적으로 반복한 것이라고 해도 이 되돌아온 말의 의미와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창작자의 언변을 전적으로 신봉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그가 작품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경청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켄 로치는 세계가 얼마나 좋아질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지금은 참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비껴나 답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결과적으로 매번 같은 자리, 원점에서 싸우고 있음을 가리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옛 문장을 오늘날에 다시 꺼내는 건 시대착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같은 자리에서 매번 문제를 새로 설정한 뒤, 영원한 낙관은 미룬 채 비관적인 현재와 그 현재와 싸울 힘으로서의 당대의 낙관적 징조를 껴안는다. 다시 말하지만 무구한 낙관이 아니라 낙관적 징조다. 켄 로치의 비전은 그러므로 진보를 향해 무한 질주하는 혁명적 기관차의 형상이 아닌 것 같다. 그는 혁명가라기보다 사려 깊은 풍자가이며 논평가다.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다면 혁명가의 자리는 사라지겠지만 풍자가와 논평가는 그때에도 할 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떠나 말할 때 켄 로치가 세계의 진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그는 운명주의자 같다. 이런 규정이 갖는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가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좋아져도 여전히 사회적 모순은 남을 것이며 또한 그걸 직시하는 것은 자기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에 운명주의자다. 이 점이 바로 <자유로운 세계>를 통해 그의 변하지 않는 비전과 영화가 어떻게 만나는지 보려는 이유다.
…(후략)…

<씨네21> 672, 전영객잔 <켄 로치는 세계의 부당함과 어떻게 싸우는가> 정한석

켄 로치는 세계의 진보를 따르는 감독일까, 세계의 운명을 따르는 감독일까?
사실 좀 헷갈린다.
어쨌든 내가 켄 로치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오지 않은 낙관 속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의 영화는 항상 비관으로 인해 생산된다는 것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운명을 예감하면서 진보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한석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혁명가이자 풍자가, 논평가가 아닐까…
부산영화제를 차치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봐야 할까…